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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관점에서 본 세계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세계사(世界史), 혹은 세계의 역사, 내지는 인류사(人類史)는 선사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구상 모든 인류의 경험과 활동을 기록한 역사이다.[1] 넓은 의미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같은 원인(原人)에서부터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현생 인류 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 전체를 다룬다.[2] 학자들은 생활 양식에 따라 선사 시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와 같이 시기를 구분하며, 지역과 문화에 따라 서양사, 유럽사, 중동사와 같이 구분하기도 하고, 한국의 역사, 일본의 역사, 미국의 역사와 같이 나라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세계사는 이러한 시기와 지역 및 나라별 역사에 대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적인 연관성을 지닌 세계의 역사"[3]를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생 인류는 대략 3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진화했으며 처음에는 수렵 생활을 영위했다. 이들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아프리카에서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갔으며, 12,000년 전에 빙하기가 완전히 막을 내렸을 때는 지구 대부분에 거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신석기 혁명 덕분에, 인류는 식물과 동물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초기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했으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에서 정주민으로 생활 방식을 전환했다. 인류 사회의 복잡성이 커져 나감에 따라 회계나 쓰기와 같은 문명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결국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허에서 초기 문명들이 등장했다. 이후 문명에서 발전해 나온 수많은 지역 국가들이 출현했고 농경이 본격적인 사회 기반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인구 역시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 무렵에 힌두교나 불교, 유교, 그리스 철학, 도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다양하고 혁신적인 철학적, 종교적 사상이 대두되어 각 문명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했다.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후 1,500년 사이의 기간은 각 지역의 문명들이 세계의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해나가며 다른 문명 사회들과 전쟁을 비롯한 여러 교류를 시작한 시기였다. 이때는 로마 제국, 이슬람 칼리파국, 몽골 제국, 중국 왕조들이 두각을 드러냈으며 이들 이외에도 다양한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 시기의 화약과 인쇄기, 그리고 몇몇 기술의 발명은 이후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기원후 1,500년에서 1,8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 강대국들은 전 세계를 탐험하고 식민지화하여 각 지역들 간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강화했다. 이 시대에는 르네상스, 과학 혁명, 계몽주의 전파에 힘입어 특히 유럽에서 지적, 문화적, 기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18세기에 이르러 지식과 기술의 축적은 산업 혁명을 불러일으켰고, 유럽 사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 세계화 과정에서 유럽 국가들은 서로 다른 문명을 '억지로' 연결하고 19세기 내내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애썼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결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인류는 전쟁의 무서움과 국제 사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50년을 전후하여 오늘날의 세계는 인구, 농업, 산업, 경제, 과학, 통신, 군사 등의 분야에서 이전과는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성장을 일구어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 오염이나 소수 민족, 테러, 내전 등의 문제는 현대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선사 시대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류의 역사이며, 석기 시대 전반을 포함하고 별다른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당시 사용하였던 도구를 기준으로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등으로 구분된다. 이때는 재산의 유무가 없어 모두가 평등한 공산사회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인류는 유인원에서부터 차츰 진화하여 대략 700~500만 년 전에 호미닌(사람속)으로 분화했다.[5][6][7][8] 최초의 인류는 에티오피아의 아파르 지역에서 발견된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로 대략 450~440만 년 전에 거주했으며,[9] 420만 년 전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원시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진화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능력은 원시 인류들을 침팬지같은 다른 영장류와 구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서식지를 삼림에서 사바나 초원으로 바꾸는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10][11] 초기 인류들은 약 330만 년 전부터 초보적인 석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a][15][16]
'호모'(Homo) 속은 초기 인류였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속에서 별도로 분화해나왔다.[17] 가장 오래된 호모 화석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280만 년 된 LD 350-1이며,[18] 학자들은 이들 종을 230만 년 전에 진화한 호모 하빌리스라고 명명했다.[19] 호모 하빌리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뇌 용량이 50% 정도 증가했다는 차이점이 있다.[20] 호모 하빌리스에서 다시 진화한 호모 에렉투스는[b] 200만 년 전에 분화되었으며[21][c]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최초의 사람속이다.[23] 최소 150만 년 전에,[d] 확실하게는 25만 년 전부터 원시 인류는 불을 사용하여 요리를 포함한 여러 작업들을 수행하기 시작했다.[24][25]
대략 50만 년 전에 호모속은 유럽의 네안데르탈인, 시베리아의 데니소바인,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인 등 새롭고 다양한 구인류로 진화해나갔는데,[26][27] 이것은 단순히 선형(線形)적이거나 분지(分枝)적인 진행이 아니라 근연종들 간의 교배 및 혼혈을 수반했다.[28][29][30] DNA 연구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모든 인류 개체군에는 네안데르탈인에서 기원한 여러 유전자가 있다고 하며, 네안데르탈인 및 데니소바인과 같은 다른 사람속들이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사람들에게 그들 게놈의 최대 6%를 나누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31][32]
18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는 사하라 남부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00만 년 전, 하이델베르크인이 아프리카 북부와 근동 지방으로 퍼져 나간 데 이어 약 50만 년 전에는 북유럽에까지 이르렀다.[9] 진정한 현생 인류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종은 약 30만 년 전의[e]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f][34][35][36] 그뒤 인류는 10만 년 전에는 보석과 황토를 이용해 몸을 치장할 정도가 되었으며[37] 5만 년 전에는 죽은 이를 매장하고 투척 무기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항해술을 구사할 수준까지 계속 진화했다.[38]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구문 언어의 발달로 인류의 의사소통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39] 초기 예술적 표현의 징후는 상아, 돌, 뼈로 새긴 동굴 벽화와 몇몇 조각품들에게서 나타나며, 이것은 일반적으로 애니미즘이나[40] 샤머니즘의 초기 형태로 간주되기도 한다.[41] 독일 슈바벤 주라에서 발견된 뼈 피리는 4만 년 전의 인류가 사람의 목소리 말고도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42][43] 이때의 인류는 수렵채집 사회였으며 때때로 유목생활도 병행했다.[44]
해부학적으로 보면 호모 사피엔스, 그러니까 현생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은 대략 194,000~177,000년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었다.[45][g] 학자들 사이에서는 50만 년 전 즈음에 첫번째 이동이 멈추었고 10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남부 사하라에서 퍼져나가면서 두번째 이동이 시작되었으며, 아프리카인을 제외한 모든 현대 인류가 이때 아프리카를 떠난 이들의 후손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49][50][51][h] 당시 지구는 제6빙하기 전의 온난기로 아프리카 대륙에는 이미 나일강이 흐르고 있었고 현재의 사하라 사막 등 아프리카의 사막은 녹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53] 65,000~50,000년 전, 인류는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렀고[54] 45,000~30,000년 전에는 유럽,[55] 33,000년 전에는 서태평양들의 섬들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으며 21,000~15,000년 전에는 아메리카에도 인류의 발길이 닿았다.[56] 4,500년 전, 대륙빙하가 줄어들자 극지방 근처까지 주거지가 넓혀졌다. 마침내 2,000년 전에 인류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들까지 퍼져나갔고 1,200년 전에는 뉴질랜드에 도달했다.[9] 이들 모두는 아직 날씨가 그다지 온난하지 않았던 최종빙기 시기에 이루어졌다.[57][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2,000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인류는 (극지방 깊숙한 곳을 제외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59] 한편 이때 홍적세 후기 멸종과 네안데르탈인의 절멸이라는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다.[60] 이것은 아마도 기후 변화나 인간 활동이라는 각각의 요소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거나, 아니면 두 요소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61][62]
기원전 10,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 세 가지가 일어났는데, 정착 생활의 시작과 최초의 농경, 최초의 도시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농업의 발전을 두고 신석기 혁명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기원전 8,000년경에 오늘날과 같은 기후 조건이 마련되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식량을 습득하는 기술은 아주 천천히 변화해왔다. 그때까지 인류는 수렵 및 채집을 하는 무리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개체 수가 점차 늘어나기는 했지만 생활 방식은 이전의 선조들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는 자연 조건을 적절하게 개조하면서 자신들이 재배할 수 있는 종의 수를 늘려나갔는데, 이는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특히 남위 10°에서 북위 50° 사이의 지역에서 오늘날과 같은 종류의 동식물들을 길렀다. 인류가 야생 곡물을 수집하여 먹었던 것은 최소한 105,000년 전이지만,[65] 그로부터 수만 년이 지난 23,000년 전이 되서야 레반트의 갈릴리 호수에서 겨우 에머 밀, 보리, 귀리와 같은 곡물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66][67] 한편 쌀은 기원전 11,500년에서 기원전 6,200년 사이에 중국에서 작물화되었으며, 최소한 기원전 5,700년에 최초로 재배가 확인되었고[68] 녹두, 대두, 아즈키 콩이 그 뒤를 이었다. 양은 13,000년에서 11,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길들여졌으며,[69] 돼지의 가축화는 약 10,500년 전에 유럽, 동아시아, 서남아시아를 포함하여 유라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야생 맷돼지를 길들이면서 이루어졌다.[70][71] 에티오피아 고원과 서아프리카 열대우림에는 또다른 농경 중심지들이 생겨났고[72] 인더스 강 주변에서는 기원전 7,000년 즈음에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6,500년경엔 이미 소를 가축화하여 사용하고 있었다.[73][i] 남미의 안데스 산맥 일대에서는 감자가 10,000년에서 7,000년 전에 콩 및 코카, 라마, 알파카, 기니피그와 함께 재배·사육이 가능한 종이 되었고 사탕수수와 몇몇 뿌리 채소들은 9,000년 전 뉴기니에서 작물화됐다.
식물 재배 및 동물 가축화의 기원, 기원전 4,000년경[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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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동남아시아 | 서남·중앙아시아 | 열대 아프리카 북부 | 중앙아메리카 | 남아메리카 북부 |
곡물 | 아시아벼, 기장, 조 | 보리, 귀리, 호밀, 밀 | 아프리카 벼 | 옥수수, 테오신트 | (없음) |
콩류 | 녹두, 대두 | 잠두, 이집트 콩, 야생 완두, 렌즈콩, 완두 | 동부, 완두 | 강낭콩, 꼬투리콩, 덩굴콩 | 강낭콩, 리마콩 |
뿌리 작물 | 토란, 얌 | 당근, 파스닙, 무 | 얌 | (없음) | 카사바, 감자, 고구마, 얌 |
과일 | 살구, 바나나, 감귤류, 망고, 복숭아 | 사과, 대추야자, 무화과, 포도, 올리브, 배 | 타마린드, 수박 | 아보카도, 토마토 | 구아바, 파인애플, 가시여지, 번여지 |
기타 작물 | 가지, 코코넛, 사고야자, 차 | 마늘, 양파, 홍화 | 커피, 야자, 참깨 | 칠레 후추, 호박 | 캐슈, 칠레 후추, 코코아, 땅콩, 퀴노아, 호박 |
가축 | 닭, 돼지, 소, 물소, 염소, 사슴, 말, 당나귀, 낙타, 야크 | 칠면조, 기니피그, 라마, 알파카 |
신석기 혁명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제안되었다.[75] 일부 이론에서는 인구 증가를 주요 요인으로 파악했는데, 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늘어나는 식량 소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져 새로운 식량원인 곡물을 찾게 되었다. 한편 다른 이들은 인구 증가가 원인이 아닌, 식량 공급의 개선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76][j] 추가로 제안된 가설로는 기후 변화, 자원 부족 등이 있긴 하다.[77]
기원전 7,000년에서 6,000년경에는 곳곳에서 신석기 마을이 나타났다. 당시 경제 체제는 동식물의 사육 및 재배 기술의 발전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 무렵에 아나톨리아부터 자그로스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밀과 보리 재배, 염소 사육 등이 일반화되었고 이러한 농업 관행은 곧이어 그리스와 그 너머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 건조했다.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 무렵에 강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관개 기술이 개발되고 나서야 농경지가 비로소 메소포타미아 평원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파키스탄의 카치 평원에서는 기원전 7,000년에 정착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그 지역의 사람들은 보리와 밀을 재배했고 양, 소, 염소를 길렀으며, 기원전 6,000년부터는 진흙 벽돌로 창고를 지은 뒤에 그곳에 식량, 도구, 교역품을 구분하여 저장하였다. 한편 근동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에, 중국에서는 기원전 5,500년경에 마을에 방어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들은 농경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동물의 힘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소가 최초였다. 또한 기원전 5,000년~기원전 4,000년 사이에 번성한 이집트의 파이윰A 문화의 경우 당시 사용한 토기와 움집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보리, 밀, 아마와 같은 작물이 재배되었고 양과 나귀를 가축으로 길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78]
기존의 수렵채집 사회는 직접적으로 식량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식량을 제공하지 못했지만, 농경 사회로 체제가 전환되자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79] 곡물의 엄청난 생산성 덕분에 식량 생산은 이제 흑자로 돌아섰고 인구 부양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결국 농경을 통해 식량을 마련하려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 등장한지 2,000년이 채 못 되어 몇몇 지역에서 부락이 등장했으며, 5,000년이 지난 뒤에는 최초의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80][9]
도시는 무역, 제조, 권력의 중심지였으며[81] 다른 마을들과 생산물을 서로 교환하고 공산품 및 다양한 수준의 정치적 이익을 제공하는 등 상호 유익한 관계를 발전시켰다.[82][83] 초기 원시 도시는 기원전 10~9세기에 건설된 차탈회위크와 예리코(성벽 도시)였다.[84][85][86][k] 한편, 유라시아 스텝 지역이나 아프리카의 사헬 지대와 같이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동물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유목 생활 방식이 발전했다.[88] 그러나 유목 생활은 필연적으로 농경 생활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유목민들이 이따금 마을이나 도시들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사건은 이후의 세계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되었다.[89]
신석기 시대의 사회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조상이나 성지, 또는 의인화된 신을 숭배했는데,[90]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기원전 9,500~8,000년에 건설된 튀르키예의 종교적 복합단지인 괴베클리 테페이다.[91][92] 또한 기원전 5,000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 분묘에서는 매장된 시신과 함께 토기, 장신구와 같은 유물과 개의 뼈가 발견되어 당시 이미 내세 사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93] 당시 일반적인 숭배 대상은 태양이었으며 이러한 태양 숭배는 이집트, 인도, 중국, 한반도 등 지역에서 두루 발견된다.[94][95] 또한, 모성 숭배와 함께 하늘을 아버지에 견주어 숭배하는 사상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96]
야금술은 기원전 6,400년경 구리 도구와 장식품을 제작하기 위해 처음 발명되었으며[72] 얼마 있지 않아 그 대상이 금과 은으로까지 확대되었다.[72]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은 기원전 4,500년경에 최초로 등장했지만,[97] 기원전 3,00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98]
이 시기가 되면서 인류는 지역에 따라 독특한 문화를 가진 문명을 이루어냈고 문자를 발명했으며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과의 교역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여 지도의 제작과 지리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졌다. 한편,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철학, 종교, 윤리와 같은 문화를 낳았다. 고대 시기의 국가들은 문명에 따라 도시 국가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제국을 이루기도 하였다. 국가의 지배를 위해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웃 지역과의 충돌로 국가간 전쟁이 일어났다. 고대 시기의 시작과 끝은 각 문화마다 그 시기가 다르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각 지역에서 문명이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99][100]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3,300년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저지대에서 일어났으며,[101][102] 그 뒤를 이어 나일 강의 이집트 문명(기원전 3,200년경),[103][104] 페루 해안의 노르테 치코 문명(기원전 3,100년경),[105] 파키스탄 인더스 강의 인더스 문명(기원전 2,500년경),[106][107][108] 그리고 황하와 양자강 일대의 황하 문명(기원전 2,500년경)이 차례대로 발생했다.[109][l]
이들 문명은 중앙집권적인 정부, 복잡한 경제 및 사회 구조, 글자와 기록 보관 체계 등의 여러 공통된 특성을 발전시켰다.[112] 특히 바퀴,[113] 수학,[114] 청동,[115] 돛단배,[116] 돌림판,[115] 직조,[117] 기념비적인 건물 건설,[117] 문자[118] 등은 이 시기에 발명된 대표적인 기술들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 시기에 지금까지 인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 도시, 정치, 법률, 철학과 같은 것들이 출현하였다.
문자는 행정과 도시 관리, 아이디어 표현, 정보의 전달과 보존이 더욱 쉽게 이루어지도록 했다.[119] 기원전 3,3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120] 기원전 3,250년경의 이집트,[121][122] 기원전 1,200년경의 중국,[123] 그리고 기원전 650년경의 메소아메리카 저지대 등 적어도 4개의 고대 문명에서 문자가 독자적으로 발명, 발전해나갔다.[124] 최초의 문자[m]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로, 초기에는 그림 문자였기 때문에 꽤나 단순하고 추상적이었다.[126][127][n] 영향력이 있는 다른 초기 문자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인더스 문자가 있다.[129] 중국에서는 적어도 상나라 시대인 기원전 1,766~1,045년 사이에 처음으로 문자가 사용되었다.[130][131]
“ | 블레셋 사람 진영에서 가드 사람인 골리앗이 나왔는데 그 신장은 여섯 큐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청동 투구를 썼고 몸에는 사슬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가 청동 5,000 세겔이며, 다리에는 청동 각반을 쳤고 어깨에는 청동 단창을 매었더라. | ” |
— 「구약성서」 사무엘상 17:4~6 |
야금술의 발전으로 기원전 4,000년 무렵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청동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비소와 구리의 합금으로 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후 비소 대신에 주석을 섞은 것이 보다 견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석-구리의 합금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132] 성경, 사기 등 많은 기록에서 당시 청동기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의 획득으로 인류는 석기 시대에 비해 농업 생산의 효율을 향상시키고,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직업의 분화, 문화 수준의 향상이 일어났다.
강과 바다를 포함한 수로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려는 시도는 아이디어, 사상, 발명품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133][134] 한편 유라시아 대초원의 육로를 통해서도 위의 요소들이 자주 교류되었는데 이때 이미 비단길의 원형이 되는 교역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소가 함유된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가 중국 북부에서 발굴되어 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5] 청동기 시대 후기에는 말을 이용한 전차나 기병과 같은 새로운 육상 기술이 등장하여 군대가 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136][137] 무역은 도시 사회가 머나먼 땅에서 생산된 상품과 자신들의 원자재를 교환함으로써 방대한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고대 세계화가 시작됨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138] 일례로 남서아시아에서 청동기를 생산하려면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주석을 수입해와야 했다.[139]
도시의 성장은 종종 국가, 그리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제국의 등장으로 이어졌다.[140] 기원전 3,100년경, 상부와 남부로 나뉘어져 있던 이집트가 통일되었으며[141] 기원전 2,600년경에 인더스 문명의 사람들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등의 도시를 건설했다.[142][143]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여러 도시 국가들 간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패권이 이동하는 일이 빈번했으나[144] 기원전 25~21세기 사이에 아카드 및 신수메르(우르 제3왕조) 등의 제국들이 잇달아 출현했다.[145] 기원전 2,000년경 크레타 섬에서 등장한 미노스 문명은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간주된다.[146]
그 후 수천 년 동안 전 세계 각지에서 문명이 발전했다.[147] 기원전 1,600년경, 미노스 문명의 뒤를 이어 그리스에서 미케네 문명이 출현하여[148] 기원전 1,300년~기원전 1,000년 사이에 많은 지중해와 근동의 문명들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 청동기 시대 후기의 붕괴까지 번성했다.[149] 한편 비슷한 시기에 아나톨리아에서는 하티인들이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장악하여 히타이트를 건국했는데, 그들은 철기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들로 유명하다. 철기는 나중에 유목민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반투어 화자들은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중앙아프리카,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일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150] 이들의 확장과 다른 민족과의 만남은 피그미족 및 코이산족의 이주를 초래했고, 더 나아가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역에 혼합 농업과 제철 기술을 퍼뜨림으로서 훗날 이 지역에 세워지는 국가들의 기반이 되어주었다.[151]
라피타 문화는 기원전 1,500년경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군도 일대에서 등장하여, 오지 오세아니아의 많은 무인도를 식민지로 삼아 확산되었으며 기원전 700년에는 사모아까지 도달했다.[152]
아메리카 대륙에서, 특히 안데스 일대에서는 기원전 3,100년경에 등장한 노르테 치코 문명 이외에도 차빈 데 후안타르와 같은 종교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차빈 문화,[153] 일상 생활을 다양한 토기로 묘사한 모체 문화, 사막에 기하학적인 그림을 남긴 나스카 문화 등의 여러 안데스 문명들이 번성했다. 한편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올멕 문화가 기원전 1,200년경에 등장하여 거대한 현무암 석조두상 등의 유산을 남겨주었고[154][155] 마야는 테오티우아칸 건설 및 메소아메리카 달력의 고안과 같은 업적을 이루어냈다.[156] 더 위쪽으로 가면 북아프리카 평원의 인디언 부족사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모두가 평등한 수렵채집 사회였으며, 때때로 식량이 부족할 경우에는 동부의 농경 단지에서 길러진 식물을 섭취했다.[157] 이들의 유산으로는 루이지애나에 건설한 왓슨 브레이크(기원전 4,000년경)와 빈곤 지점(기원전 3,600년경) 등이 있다.[158]
“ | 옛날 옛적 지위가 낮은 작은 신들은 노동을 하고, 큰 신들은 그들을 지켜 보며 쉬고 있었다. 홍수를 방지하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작은 신들은 강과 수로의 흙을 파내야 했다. 노동이 점점 힘들어지자 신들은 점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 지혜의 신 엔키는 지하수의 여신 남무에게 진흙에 신들의 피를 섞어 신들의 노역을 대신할 사람들을 만들게 했다. | ” |
— 수메르의 인간 창조신화 |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오늘날의 이라크와 튀르키예 남동부, 시리아 북동부, 이란 북서부에 걸쳐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두 강 사이의 땅'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이름대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 토양이 비옥하고 수자원이 풍부하여(비옥한 초승달 지대) 농경 생활에 적합했다. 기원전 8,000년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에는 신석기 문화가 등장했고 이것이 발전하여 최초의 문명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가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59] 최초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사람의 흔적은 기원전 6,500~3,800년 사이에 등장한 우바이드 문화이나 아마도 그 이전의 흔적은 충적층 아래에 가려져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160][161] 이 시기에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농경과 목축 등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북부에서 더욱 그랬다. 남부에서는 관개 수로를 이용한 농경이 주로 이루어졌다.[162]
기원전 6,000년경 이집트 전역에 신석기 정착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163] 형태학적,[164] 유전학적,[165][166][167][168][169] 고고학적[170][171][172][173]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신석기 혁명 동안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 지역에 농경 기술을 가져온 근동의 이민자들 덕분이라고 한다. 텔 알 우웨일리는 기원전 5,4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가장 오래된 유적지이며, 우르 역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174] 남부에서는 우바이드 문화가 기원전 6,500년경부터 기원전 3,8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175] 그뒤 농업의 집약화와 교류 촉진, 인구 밀도 급증과 함께 거대한 도시들이 세워지며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그중에서도 주요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도시 국가들이 생겨났다.
“ | 길가메쉬가 [그의] 뱃사공인 우르샤나비에게 말했다. "우르샤나비여, 성벽에 올라 우루크로 들어가서 거닐어보아라. 밑의 토대를 살펴보고 건물의 석공술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가마로 구워낸 벽돌이 아니던가?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일곱 현인들이 그것의 기초를 세웠다. 1'사르'[o]는 도시이고, 1사르는 대추야자나무 숲이 우거진 정원, 1사르는 점토 채석지, 그리고 이슈타르 신전이 있으니 우루크의 규모는 [모두] 3사르이다." |
” |
— 「길가메쉬 서사시」 中 |
수메르 문명이라고도 불리는 우루크 시대는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3,100년 사이의 메소포타미아를 가리키며[177] 이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수메르 도시인 우루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전성기의 우루크는 그 면적이 250~300 헥타르에 달했고 25,000명에서 50,000 명의 인구가 한데 거주했다. 이때 기술적으로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 메소포타미아 최초로 도시 생활이 등장했고 쟁기의 사용으로 농업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폭증했으며, 초기 형태의 야금술이 나타났다. 우루크 시대 후기에는 쐐기 문자가 발명되었다. 이 지역에서의 원시 문자의 등장은 기원전 3,800년경, 초기 문자는 기원전 3,300년경, 그리고 초기 쐐기 문자는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통 인장과 함께 구리 장식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도자기 그림이 쇠퇴한 것도 이 시기였다.[178] 우루크 시대의 수메르 도시들은 아마도 신권 정치를 기반으로 했을 것이며,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된 원로원의 도움을 받아 대사제-왕('엔' 또는 '엔시')가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179] 후기 수메르의 판테온은 아마도 이러한 정치구조를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우루크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는 기원전 3,100년부터 기원전 2,900년까지 이어진 젬데트 나스르 시대가 열렸다. 이때 쐐기 문자가 발전을 거듭했다. 가장 오래된 점토판은 우루크에서 생산되었으며 제작년도는 기원전 4,0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젬데트 나스르 시대보다 약간 빠르다. 이 시기가 되면 대본은 여러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는데, 원래는 단순히 그림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이미 더 간단하고 추상적인 외관을 갖추게 되었으며 상징적으로 쐐기 문자를 사용했다.[180][181] 한편, 이때 우루크의 무역망이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지역들뿐만 아니라 저멀리 북캅카스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젬데트 나스르 시대는 나중에 정치 체제와 사회 계층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원전 2,900년경에 초기 왕조 시대로 이어졌다.[182][183][184] 그뒤에 도시 국가들의 권력은 기존의 사제들과 성전에서 보다 세속적인 '루갈'(위대한 남자)에게로 이동했다.[185] 루갈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초기 그림문자에서 음절 문자가 발전하기 시작한 기원전 2,700년경에 역사적 기록이 시작되기 직전에 통치한 것으로 보이는 엔메르카르, 루갈반다, 길가메쉬 등이 있다. 문명의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수메르 통치자들은 점차 인근 지역으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수메르인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아카드인이나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과 같은 이웃 셈족은 수메르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창기 지구라트는 초기 왕조 시대 말기에 건설되었다.[186] 이 시기에 수메르 도시 국가들의 여러 왕조들은 두각을 잠시 드러냈다가 쇠퇴하고 다음 왕조로 대체되는 등 흥망성쇠를 거듭했다.[184]
라가쉬의 왕인 에안나툼은 기원전 2,500년에 역사상 최초로 확인 가능한 왕국을 세웠다.[187] 오늘날 이란 지역에 있던 엘람 역시 동기 시대에 도시를 이루어 왕국을 형성했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주요 국가들 중 하나였다.[188] 기원전 3,000년경에 남겨진 엘람인들의 기록들 가운데 일부분은 수메르 역사의 초기 기록과도 유사하다.[189] 그 무렵에 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 사이에 매우 친밀한 문화적 공생 관계가 이루어졌다.[190][191][192] 아카드인이 점차 다수가 되면서,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기 사이에 아카드어가 점차 수메르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193] 마침내 기원전 2,350년경 사르곤의 치하에서 아카드 제국이 등장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했다.[182] 아카드 제국은 기원전 24세기에서 2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후 엘람이나 구티와 같은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아카드 제국은 멸망했지만, 수메르인들은 우르남무의 치하에서 구티를 몰아내고 우르 제3왕조를 세워 페르시아 만에서 니네베까지 이르는 그들의 패권을 재확인했다.[194][9] 기원전 2,004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패권이 최종적으로 붕괴된 이후, 그 지역에 있던 셈족들은 두개의 주요 국가들로 나뉘어졌다. 북쪽의 아시리아(초기 왕들의 연대는 기원전 25세기로 확인됨)와, 몇 세기 후에 세워진 남쪽의 바빌로니아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기원전 20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사이에 강력한 고대 제국을 세웠다. 이들이 강성해짐에 따라 수메르인들은 결국 셈족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인들에게 동화되었다.[195][196]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 A(기원전 10,200년)와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 B(기원전 7,600년에서 기원전 6,000년)에 존재했던 발달된 신석기 문화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등장했으며 얼마 있지 않아 동쪽과 서쪽으로 확산되었다.[197] 그뒤 나일 강을 따라 생활하던 수렵채집 사회가 최초로 낫을 사용하여 곡물을 수확하는 농경 사회로 변모하였다. 지질학적 증거와 컴퓨터 기후 모델링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8,000년경에 일어난 기후 변화는 목초지였던 북아프리카를 건조하고 메마른 사하라 사막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이집트인들의 초기 조상이 비교적 비옥한 나일 강 주변에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했다.[198] 이집트에서, 완전히 성숙하고 또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5,500년경에 시작된 파이윰 A 문화이다.
기원전 5,500년경, 나일강 주변에 모여살던 작은 부족들은 저 멀리 수단 남부까지 일련의 상호 협조적인 문화로 발전하면서 농경과 축산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빗, 팔찌, 구슬, 토기 등의 물품을 만들어냈다. 상이집트 북부의 초기 문화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서부 사막 지역의 바다리 문화는 특히나 정교한 토기, 석기, 구리 사용으로 유명하다.[199] 아프리카에서 소는 최소한 기원전 4,440년경에 파이윰 일대에서 가축화되었다.[200] 바다리 문화의 뒤를 이어 나카다 문화가 등장해 여러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냈다.[201] 나카다 문화의 첫번째 시대인 암라티야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암석 박편에서 돌칼과 기타 도구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흑요석을 에티오피아에서 수입했다.[202] 이집트 최초의 왕조가 등장하기 직전인 기원전 3,300년경, 이집트는 남쪽 나일강 중상류의 상이집트와 북쪽 나일강 삼각주 일대의 하이집트로 나뉘어져 있었다.[203]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 게르제 문화(또는 나카다 2기)로 알려진 나카다 문화의 두번째 시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뒤인 기원전 3,150년경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었다.[204] 이 무렵에 식량 생산의 대부분이 농경으로부터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인구가 정주 생활을 선택함에 따라, 나일강 주변의 정착지들은 약 5,000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민들은 진흙 벽돌을 사용하여 건물을 건설했고 아치형 벽과 움푹 들어간 벽을 장식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205] 돌 대신에 구리를 가지고 도구와 무기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205][206] 게르제 도자기 겉면에 새겨진 기호가 이집트 초기 상형문자와 비슷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207] 이 시기에 근동, 특히 가나안과 비블로스 등의 해안 도시들과 접촉했다는 증거가 있다.[208] 이와 같은 문화적 발전에 힘입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모두에서 그 지역의 마을과 사회를 통일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3,100년경에 히에라콘폴리스의 통치자들은 상이집트를 장악하고 하이집트를 넘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전 3,273년에서 기원전 2,987년 사이에 상이집트의 왕이었던 나르메르가 이집트 전역을 통일했다.[209]
이로써 이집트 초기왕조 시대가 열렸다. 일반적으로 고고학계에서는 나카다 3기에서부터 기원전 2,686년경 고왕국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제 1왕조와 제 2왕조의 지배기간을 초기왕조 시대로 여긴다.[210] 왕의 신격화와 함께 수도는 기존의 티니스에서 새롭게 멤피스로 옮겨졌다. 예술, 건축, 종교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주요 요소들이 이때 형성되었으며, 이집트의 통치자가 스스로를 파라오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강력해진 왕권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성장에 필수적으로 작용한 토지, 노동력, 자원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를 가능케했으며 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겸했다.[211]
고왕국 시대에 이르러, 명확한 중앙집권 체제의 형성으로 비로소 가능해진 농업 생산성의 증대와 함께, 이집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212] 고대 이집트의 최고 유산 중 하나로 꼽히는 기자 대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역시 이때 건설되었다. 짜티라 불리는 재상의 지시에 따라 중앙행정부는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농작물의 수확량을 조사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백성들을 모집하여 대규모 건설 작업에 참여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화 및 질서 유지의 목적으로 형법 체제를 구축했다. 중앙 행정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파라오로부터 봉토를 수여받은 교육받은 서기관이나 관료들이 신흥 계급으로 떠올랐다. 파라오는 또한 지역 사원이나 무덤을 관리하는 곳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자신이 사망하면 이들이 왕가를 떠받치는 지지자들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5세기에 걸쳐 행해진 이러한 관행은 결과적으로 파라오의 경제력을 점차 약화시켰고, 마침내 국가 경제가 더 이상 대규모의 중앙집권적인 행정 정책을 뒷받침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210] 파라오의 권력이 약화되자 노모스라 불리는 지역 총독(주지사)들이 통치자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2,200년에서 2,150년 사이의 극심한 가뭄과 함께 140년 동안 이어질 제1중간기의 막이 올랐다.[213][214]
인도 아대륙에서 등장한 가장 초기의 신석기 유적지 중 하나는, 기원전 7,600년경 오늘날 인도 하리아나에 있는 고대의 가가르-하크라 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비라나이다.[215] 또다른 초기 유적지들로는 갠지스강 중류의 라후라데와, 그리고 갠지스강과 야무나강이 합류하는 지점 인근에 건설된 주시가 있었다.[216][217]
오늘날 파키스탄의 메르가르에서는 토기 신석기 문화가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5,500년까지 지속되었고, 그다음에 3,300년까지 초기 청동기 문화로 발전했다. 메르가르는 농경과 목축이 이루어진 흔적이 있는 인도 아대륙 최초의 유적지 중 하나이다.[218] 메르가르를 중심으로 하여 퍼져나간 문화가 인더스강 근처에 자리잡아 인더스 문명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219] 이 지역에서 가장 초기에 요새화된 마을은 기원전 4,000년경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일대와 조브 강 계곡 근처의 지역에 건설된 라흐만 데리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다른 요새화 도시로는 신드의 암리(기원전 3,600년~기원전 3,300년)와 코트 디지, 그리고 하크라 강의 칼리방간(기원전 3,000년)이 있다.[220][221][222][223]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300년경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2,600년경에 막을 내린 초기 하라파 단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인더스인들은 여전히 마을을 기반으로 정착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으며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만든 도자기뿐이다. 그러나 이때 초기 인더스 문자가 발명되었고,[224][225] 중앙집권적인 체제와 점점 더 도시로 변모해가는 시타델이 등장했다.[226] 국제 무역망은 이 문화를 근처의 관련 지역 문화들 뿐만 아니라 저멀리 수메르에까지 연결시켜, 라피스 라줄리 및 기타 재료들이 채굴되는 머나먼 원천지와 인더스 문명이 교류할 수 있도록 했다. 기원전 2,600년경쯤 되면 인더스인들은 완두콩, 참깨, 대추, 목화 등 수많은 작물을 재배하고 물소를 비롯한 동물들을 길들였다.[227][228]
그뒤 하라파, 돌라비라, 모헨조다로, 로탈, 루파, 라키가르히 등의 정착지들이 대규모 도시로 성장하고, 비교적 크기가 작은 1,000개 이상의 마을과 도시가 등장하면서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1,900년 사이에 성숙 하라파 시기가 열렸다.[229] 이 시기의 인더스인들은 야금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여 구리, 청동, 납, 주석을 생산하고 높은 수준의 공학을 선보였다.[230] 특히 모헨조다로나 라키가르히와 같은 도시에는 상하수도 및 위생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었다.(자세한 것은 인더스 문명의 발명 및 발견 목록을 참조) 덕분에 주민들은 도시 내에 있는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었으며, 목욕을 하고 난 뒤에 생긴 폐수는 도로 옆에 있는 배수구로 흘려보내면 되었다. 심지어 여러 명이 사용하는 대중 목욕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 주택들은 안마당을 구비하고 있었고 길에는 살짝만 개방되도록 설계되어 있어 사생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지역의 일부 마을에서 보여준 건축은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하라파의 건축 양식과 유사한 점을 가진다.[231] 하라파의 주요 건축물로는 인상적인 조선소, 미곡창, 창고, 벽돌 공장, 그리고 성벽 등이 있다. 인더스 도시들의 거대한 성벽은 주기적으로 범랑하는 강에서 자신들을 지키거나 주변 도시들과의 군사적 충돌을 염려하여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232]
기원전 1,800년경에 접어들면서, 인더스 문명 전역에서 점진적으로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700년경에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버려졌다. 이들이 갑작스럽게 몰락한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불명이지만, 학자들은 아마도 강의 유로 변화와[233] 중동 인근 지역까지도 영향을 미친 기후 변화에 의해 인더스 문명의 쇠퇴가 촉발되었다고 본다.[234][235] 2016년 현재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와의 무역이 줄어들면서 인더스 문명이 붕괴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236] 가가르-하크라 강 유역의 도시들은 그 지역에 내리는 비에 의존하였는데,[237][238][p][239][q] 기원전 1,800년경부터 몬순이 전반적으로 약화되어 이 지역이 이전보다 시원하고 건조해진 것은[237][240][241] 가가르-하크라 강의 유로를 히말라야 산기슭으로 뻗어나가게 만들면서 농사에 필요한 충적토를 가져다주던 홍수가 점차 불규칙하고 덜 광범위하게 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인더스강 일대의 농업 생산성이 크게 약화되었고, 마침내 그 지역에 닥친 극심한 가뭄은 문명의 종말을 초래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건조를 피해 동쪽으로 이주해야 했다.[242][243][244][r] 몬순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홍수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할 만큼 빈번하게 발생하지 않게 되자 주민들은 소규모 마을들로 이동했다. 이 작은 지역사회에서 생산된 조그만한 잉여 자원은 무역의 발전을 허용하지 않았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 지역들과의 긴밀했던 연결이 끊어졌다. 마침내 옛 도시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245] [s]
그 무렵에 인도아리아인들이 갑자기 인더스강 일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247] 이들은 다뉴브강과 우랄산맥 사이에 있던 얌나야 문화(기원전 3,300년~기원전 2,600년경)에서 기원했으며, 오늘날에는 대체로 신타슈타 문화를 계승한 안드로노보 문화 중 정주문화를 받아들인 이들이 세운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고고학적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아리아 계통 문화는 기원전 1,900년대부터 1,300년대까지 번성한 묘지 H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황토색 도자기 문화(OCP) 및 구리 공예품 무리 문화(CHC)이다. 이들의 경우 인더스 문명과의 연결성과 더불어 아리아 문화의 영향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에, 인더스 문명에서 아리아인의 지배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로 주목받는다. 다만 방금까지 설명한 문화들은 인더스 문명과의 문화적 연결성이 명확하게 보이고 인더스계 주민이 여전히 다수 잔존한다는 점에서, 이 문화의 구성원들 일부 또는 다수가 아리아인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인더스 문명의 후기 시대, 또는 토착 인더스 후기 문화로서 평가받고 있다.
고고학, 지질학, 인류학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 학자들은 중국 문명이나 역사의 기원을 선형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서로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의 상호 작용이라고 보고 있다.[248] 중국에서의 기장 농업에 대한 초기 증거는 기원전 7,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249] 양자강 인근의 청투산에서 발견된 벼 재배에 대한 초기 증거는 기원전 6,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투산은 중국 최초의 성벽 도시가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250] 신석기 혁명이 시작될 무렵, 황하 강 유역은 기원전 7,000년경부터 기원전 5,000년경까지 농경, 건축, 토기, 매장 등의 요소와 함께 번성한 페이리강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251]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점진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곡물을 저장 및 재분배하며, 장인과 관리 등의 직업이 나타날 수 있는 잠재력이 생겼다.[252] 이 시기에 형성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지 중 하나는 지아후이다. 몇몇 학자들은 기원전 6,600년경 즈음에 발명된 지아후 부호가 중국에서 등장한 가장 초기의 원시 문자라고 주장했다.[253] 그러나 이것은 문자 자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동안 석판이나 갑골 등을 사용하여 의사소통하던 것이 본격적인 문자로 넘어가기 전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254] 고고학자들은 페이리강 문화가 정치 체제가 거의 없는, 모두가 평등한 공산 사회였다고 믿는다.
마침내 기원전 5,000년경에 석기를 연마하고 고도의 체계를 갖춘 양사오 문화가 등장해 기원전 3,000년경까지 발전해나갔다. 이들은 심지어 초기 형태의 양잠업을 할 줄도 알았다.[255] 양사오인들의 주요 식량은 서곡이었는데, 일부 주역에서는 조를 먹고 다른 지역에서는 기장을 먹었지만 쌀을 먹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양사오인들이 일군 농업의 정확한 성격은 현재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대체로 소규모 화전농업 또는 반영구적인 정착농업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지역의 흙이 다 사용되면, 주민들은 자신들의 물품을 챙겨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을 건설했다.[256] 그러나 장즈와 같은 양사오 문화 중부 유적지에서 잉여 곡물 저장에 필요한 고층 창고와 밀가루의 제작에 사용되는 연석이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257]
나중에 양사오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1,900년경까지 황하를 중심으로 발전한 룽산 문화로 대체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타오쓰였다.[258] 기원전 3,000년기 동안 이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많은 마을들이 주변에 흙으로 만든 벽을 쌓았다. 기원전 2,000년경에 룽산 문화는 쇠퇴하다가 중부 지역에서 갑자기 청동기 기술을 가진 얼리터우 문화가 등장했다. 초기 청동 유물은 얼리터우 문화와 이웃한 마자야오 문화(기원전 3,100년~기원전 2,700년)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259][260]
본격적인 중국 문명은 얼리터우 문화의 두번째 단계(기원전 1,900년~기원전 1,500년)에 시작되었다. 때문에 얼리터우 문화는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수준 사회로 여겨진다.[261] 그러나 얼리터우 문화가 반전설 상의 하나라인지, 아니면 그와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하여 상당한 논쟁이 있다. 중국 측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2,070년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600년경에 멸망한 하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며, 서주 시대의 「죽서기년」과 같은 몇몇 고대 중국 사료에서 확인되었다. 이들은 중국 역사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나, 현재까지 그들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문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얼리터우 문화 시기에 청동 야금술과 도시화의 수준이 발전을 거듭했으며, 사회계층화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인 궁전과 같은 복합단지가 여럿 건설되었다.[262] 얼리터우 문화는 약 50년에 걸쳐 발전을 거듭했는데 이를 네 단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고고학적 증거와 역사적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함으로써 그 실체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중국 왕조는 상나라(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경)이다. 상나라인들은 가장 초기에 등장한 중국 문자인 갑골문자를 제작했으며, 뼈를 가지고 점을 치기도 했다. 이것들은 당시 정치, 경제, 종교 관행부터 중국 문명 초기의 예술적, 의학적 단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소들을 어림잡아 추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69] 몇몇 역사학자들은 얼리터우 문화의 초기 단계를 상나라 역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미국 국립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는 중국의 청동기 시대를 기원전 약 2,000년경에서 기원전 771년경까지의 시기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얼리터우 문화 발생부터 서주 통치의 붕괴까지를 아우른다.[270] 한편 양자강 상류, 즉 사천 일대에서 번성한 삼성퇴 문화는 상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또 다른 중국 청동기 문화이지만, 이들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청동 제조 방법을 발전시켰다.[271]
수메르인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우르 제3왕조가 기원전 2004년경 멸망한 이래로, 근동은 여러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난립하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는데 그중에서 셈족계 아모리인의 바빌로니아가 두각을 드러냈다.[272] 기원전 1,792년에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함무라비는 수도 바빌론을 국제적인 도시로 만듦과 동시에, 팽창 정책을 펼쳐 엘람, 라르사, 마리 등을 잇달아 정복하고 나아가 아시리아까지 굴복시킴으로써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지배 하에 두었다. 이때 제국의 영향력은 아나톨리아 동남부까지 이르렀다.[273][274] 그러나 바빌로니아 역시 그 창시자가 죽자 오래가지 못했다. 함무라비 사후, 아시리아와 이라크 남부는 기존의 바빌로니아와는 별개의 민족이 통치하는 바빌론 제2왕조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론 제2왕조 역시 또다른 외부 민족이었던 카시트인에게 바빌로니아를 빼앗겼다.[275]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는 제1중간기 이후 중왕국 시대를 거치며 나름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기원전 1,650년경 셈족 계통의 힉소스인들이 쳐들어와 나일강 삼각주를 점령하고 제15왕조를 세우면서 다시금 혼란기의 막이 올랐다. 이때를 제2중간기라고 한다. 그뒤 제17왕조의 후예였던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를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하면서, 이집트는 본격적인 전성기인 신왕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제18왕조와 제19왕조의 기나긴 통치 기간 동안에 등장한 유능한 파라오들은 내치를 정비하고 외부로의 적극적인 팽창을 도모했다. 이때 이집트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나일강 삼각주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저 멀리 제벨 바르칼과 주변의 백나일강 지류들을 포함한 누비아 일대를 아울렀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레반트 남부와 동부 사막 및 홍해 연안, 시나이 반도,[276] 그리고 (여러 오아시스들을 거점으로) 서부의 사막 지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새로운 적과 직면했는데, 아나톨리아 대부분 및 시리아 북부를 석권한 하티인의 히타이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수필룰리우마 1세와 무르실리 2세의 치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히타이트의 주요 관심사는, 철기 제작에 필수불가결한 재료인 철광석의 산지이자 대부분의 국제 무역로가 집중되어 있는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집트가 시리아 남부까지 쳐들어오자 히타이트로서는 이들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 그리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이끄는 군대가 기원전 1,274년에 카데시에서 맞붙었는데, 그 결과는 불완전하나 아마도 히타이트의 근소한 승리 또는 무승부로 끝난 듯 하다.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양 제국은 현저하게 쇠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기원전 14세기 무렵 중아시리아가 갑자기 이 지역의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아슈르-우발리트 1세 치하의 아시리아인들은 후르리-미탄니 제국을 멸망시키고, 히타이트의 거대한 영토 대부분을 합병했으며, 카시트인의 바빌로니아를 정복했다. 심지어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집트를 공격해 이 지역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엘람인, 프리기아인, 가나안인, 페니키아인, 킬리키아인, 구티인, 우라르투인, 딜문인, 아람인 등을 잇달아 물리쳤다. 전성기에 중아시리아 제국은 캅카스 남부에서 바레인까지,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에서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기원전 1,206년경, 고대 근동 세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붕괴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미케네 그리스, 에게해 지역, 아나톨리아의 궁전 경제가 무너지면서, 그 일대에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750년까지 계속되는 암흑기가 도래했으며 여러 도시들은 무역이 단절된 채로 각자의 작고 고립된 마을 문화를 형성했다. 아나톨리아와 레반트에 걸쳐있던 히타이트는 이 시기에 멸망했고, 중아시리아나 이집트 신왕국 등은 약화된 상태로 겨우 명맥을 존속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이러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을 펄쳤는데, 그 중에서는 기후 변화, 화산 폭발, 가뭄, 질병, 바다 민족 또는 도리아인의 침공, 제철 기술의 발달로 인한 경제적 혼란, 전차전의 쇠퇴를 가져온 새로운 군사 기술 및 전략의 도입 등이 유력하다. 기원전 1,150년 이후 이러한 피해들이 회복되면서 고대 근동 세계는 기원전 1,000년기에 철기 시대로 이어졌다.
“ | (유다 왕 히스기야가 이르기를)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 ” |
— 「구약성서」 열왕기하 18~19 中 |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인들은 신아시리아를 세워 근동의 패권을 다시 한번 잡았다. 그것은 고대 근동에서 등장한, 유례없이 강력한 제국으로서 이전의 바빌로니아, 이집트, 우라르투, 엘람을 훨씬 능가했다.[279] 많은 학자들은 신아시리아 제국이 지정학적 지배와 세계 지배에 기반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을 최초의 '세계 제국'으로 간주한다.[278][280] 신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전역은 물론이고 아나톨리아, 아라비아 북부, 그리고 오늘날 이란과 아르메니아 및 튀르키예 대부분에 걸친 대제국이었으며 아다드-니라리 2세, 아슈르나시르팔 2세, 샬마네세르 3세, 세미라미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사르곤 2세,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의 치하에서 기나긴 전성기를 구가했다.[281]
이 시기에 아시리아에서는 아카드어의 영향을 받은 동아람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사용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아람어가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 주민들의 언어로서 기존의 아카드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언어의 후손 방언들은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 거주하는 만다안인과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는 아시리아인들에게로 이어졌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문화적으로 중요한 유산을 남겼는데, 이들이 확립한 정치 구조는 신아시리아의 뒤를 이은 후기 제국들의 표준 모델이 되었고, 신아시리아 통치자들이 실시한 보편 통치의 이념은 세계 정복이라는 이데올로기 형성에 영감을 주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은 신아시리아 통치 시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초기 아시리아 신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많으며 초기 유대교 신학에 대한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피지배민족에 대해서는 잔혹한 탄압 정책을 실시하여, 다른 도시로의 강제 이주를 명하거나 대대적인 학살을 벌이기도 했다.[277][282]
결국 많은 민족들의 증오를 받은 신아시리아 제국은,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슈르바니팔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내부가 분열된 틈을 타 수도 니네베가 바빌로니아인, 칼데아인, 메디아인,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스키타이인, 킴메르인 연합군에게 함락당하면서 기원전 605년에 멸망하였다.[283]
그 후 칼데아인이 세운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신아시리아의 뒤를 이었다. 이들은 본래 시리아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이었으나 청동기 문명이 붕괴하던 기원전 10세기 말~기원전 9세기 초엽에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주하였고, 시간에 지남에 따라 토착 바빌로니아인들과 동화되어 스스로를 바빌로니아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기원전 626년에 칼데아인이었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아시리아 지배에 반기를 들었으며, 신아시리아 멸망 이후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레반트, 가나안, 이스라엘, 유다를 정복하고 이집트까지 물리침으로써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사례는 고바빌로니아 멸망 이후 메소포타미아 남부 도시가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한 마지막 사례였다. 신바빌로니아 통치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전례없는 인구 및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문화예술의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신바빌로니아의 가장 위대한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그 명성과 업적이 고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와 견줄 만 하다. 그가 아버지 나보폴라사르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웃한 메디아의 공주 아미티스와 결혼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동맹을 견고하게 구축했다. 몇몇 기록들은, 아미티스가 식물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고향을 그리워하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그녀를 위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건설했다고 한다. 43년 간에 걸친 그의 통치는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된 바빌로니아의 황금기를 상징한다.[284] 신바빌로니아 패권은 기원전 539년경 마지막 왕이었던 나보니두스가 페르시아에게 폐위당하면서 끝장이 났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285] 소위 '축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에는 서로 독립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발전한 혁신적인 철학적, 종교적 사상이 등장했다.[286] 중국의 유교,[287] 인도의 불교와 자이나교,[288] 유대인의 유일신론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발생했다.[289]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되었지만, 이 시대가 되서야 그것을 받아들인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국교로 지정되었다.[290]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에서는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철학이 대두되었으며,[291] 최초의 올림픽이 기원전 776년에 개최되었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두고 '고전 고대'(Classical antiquity)라고 명명하기도 한다.[292] 기원전 508년,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적 정부 체제가 아테네에 도입되었다.[293]
축의 시대에 등장한 사상들은 그 지역만의 종교적인 특색과 역사를 발전시켰다. 유교는 추후 도가, 법가 등과 함께 중국 사상을 지배하게 될 세 철학 중 하나였다.[294] 그중에서도 특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유교 전통은 대체로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닌, 기본 덕목과 스스로의 수양,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모범에 입각한 이상적인 통치를 추구했다.[295] 유교는 나중에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296] 불교는 기원전 1세기경에 중국에 들어와서 널리 퍼졌는데, 7세기가 되면 북중국에만 약 30,000개의 불교 사원이 있을 정도였다.[297][298] 불교는 나중에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주요 종교가 되었다.[299] 그리스 철학 전통은 기원전 4세기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인해 지중해 세계를 넘어 페르시아, 심지어 인도까지 확산되었다.[300] 한편 유대교의 신념에서 나중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창시되었다.[301]
기원전 500년부터는 전례 없는 규모의 제국이 잇달아 출현했다. 잘 훈련된 군대, 통일된 이데올로기, 정교한 관료제의 발전은 황제라 불리는 단 한명의 인물이 인구가 수천만이 넘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302] 나라의 영토가 커지자 자연스럽게 국제 무역 역시 확대되었다. 지중해 무역로, 인도양 해상무역, 비단길 등이 대표적이 예이다.[303]
기원전 539년, 고대 근동에 있었던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등의 국가들이 이란 남부의 파르스에서 발흥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합병되었다. 그 창시자인 키루스 2세는 이전의 신아시리아와는 다르게 정복지에 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피지배민족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서아시아에서의 아케메네스조의 패권을 확고하게 했으며 캄비세스 사후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 시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최대로 늘었다.
이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 유역에서부터 서쪽으로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까지 그들의 패권을 뻗쳤으며,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행정 체계와 문화 수준을 갖춘 중앙집권적 제국이었다.
하지만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정복에 실패했고,[304] 이후 즉위한 통치자들은 대체로 대외 문제보다는 제국 내의 문제에 더 집중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제국 내부에서는 환관이 득세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전 통치자들이 구축해놓았던 행정 체계는 완전히 쓸모없어졌다. 마침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기원전 330년경 그리스에서 쳐들어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무너졌고, 그의 사후에는 페르시아 대부분이 셀레우코스 제국에게로 넘어갔다.[305]
그러나 타민족 그리스인들이 세운 헬레니즘 왕조였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이란 북동부에서 일어난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7년~기원후 224년)이 페르시아를 석권했다. 서기 2세기에는 파르티아 역시 아케메네스 제국의 부활을 제창한 사산 제국(기원후 224년~기원후 651년)에게 멸망당한다. 사산 제국은 서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 제국(395년 이후 동로마)과 맞설 수 있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였으나 서기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고 만다.
그리스는 에게해의 키클라데스 문명(기원전 3,100년~기원전 1,000년경) 및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기원전 2,700년~기원전 1,500년경)을 시작으로 유럽 최초의 선진 문명이 존재했었다.[306][307][308] 그 뒤를 이은 미케네 문명(기원전 1,600년~기원전 1,100년경)은 그리스 본토에서 궁전 국가, 도시 조직, 예술 작품, 그리고 독특한 문자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트로이아 전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다.[309][310] 그러나 이들은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가 막을 내릴 때 지중해 동부의 다른 여러 문명들과 함께 파괴되었다.[311] 이로 인해 그리스 암흑기라고 알려진 시대가 열렸는데 이 시기에는 별다른 문자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기원전 8세기경부터는 그리스에서 '폴리스'라 불리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출현하여 서쪽의 시칠리아에서부터 동쪽의 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전역으로 그리스 세계를 확장시켜나갔다.[312] 특히 아테네는 솔론의 개혁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권 수립 이래로 고대 그리스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부상했으며[313]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명했던 스파르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자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응하여 범그리스적 정서를 단결시킴으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후자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거듭되는 발전을 이루었다.[314] 기원전 5세기 내내, 고전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북쪽에서 강성해진 마케도니아가 이들을 정복하여 그리스 전역을 통일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다음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나아가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리하여 헬레니즘 시대가 개막되었다.[315] 알렉산드로스가 갑자기 급사하자 그 휘하의 장군들, 이른바 디아도코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각각 안티고노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을 개창하여 제국을 분할했다.[316] 이 세 왕국은 다른 소규모 헬레니즘 왕국들과 함께 그리스 문화 및 생활 양식을 아시아와 이집트에 전해주었다.[317] 헬레니즘 시대는 기원전 31년 마지막 헬레니즘 왕국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치하의 이집트가 로마에게 정복당할때까지 지속되었다.
고대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세워진 한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이 일구어낸 업적은 당대를 넘어 중세, 심지어는 근대까지 이어졌으며 오늘날 유럽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기원전 7세기의 로마는 일대의 지역 중심지로서 번영하던 도시 국가였으며 왕정 체제였다. 기원전 509년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 공화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루었다. 내부의 안정을 달성한 로마는 외부로 눈을 돌렸고, 약 150여 년간 포에니 전쟁과 같은 여러 정복 활동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이집트, 시리아 등을 정복함으로써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이 무렵에 활동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폼페이우스 등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로마 시대의 인물들이다.
“ | 고대사는 모두 로마사로 흘러들어 간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개울이 호수로 흘러들어 가듯이, 그리고 근대사는 다시금 로마사에서 흘러나온다. 로마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과감히 주장한다. | ” |
— 1854년,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2세의 사학 강의 중 |
일련의 내부 분쟁으로 인해 로마 공화국은 서기 1세기에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으로 변모했다. 유능한 황제들의 통치 하에서,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불리는 전례없는 평화와 번영, 안정의 시기를 구가하면서도 동시에 몇 세기에 걸쳐 그들의 문화를 국경 너머 여러 지역으로 퍼뜨렸다.[318] 그러나 3세기 중엽 이민족들의 침공 및 페르시아의 승리로 제국은 잠시 주춤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내부에서조차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면서 로마 제국은 결국 쇠퇴했다.[319] 특히 훈족의 공격과 게르만족의 유럽 침입은 무너져가던 제국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 뒤 히스파니아, 갈리아, 이탈리아 본토를 비롯해 제국의 서쪽 영토는 '서로마 제국'으로, 발칸 반도, 이집트, 아나톨리아를 비롯해 제국의 동쪽 영토는 '동로마 제국'으로 각각 분열되었는데,[320] 이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처음으로 확립된 통치 관행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321] 분열이 이어지던 서기 4세기에, 예수가 창시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노력 덕분에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몇 세기 간은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내고 경제가 발전하는 등 나름 전성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은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서기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무너졌고 그 영토에는 게르만인들이 세운 여러 나라들이 들어섰다.[322] 오늘날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보통 이때를 중세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기원전 16세기가 되면서 인도아리아인은 대대적으로 펀자브 지방에 침입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 시기에 나타난 간다라 무덤 문화는 신타슈타-안드로노보 문화의 아리아적 전통을 다수 포함하며, 이전 인더스 문명과의 급격한 단절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베다 문화의 근원이라고 여겨진다. 인도아리아인은 정착하는 과정에서 본래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인더스 문명 구성원들을 제압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인도아리아인들의 노예가 되거나 남쪽으로 쫒겨났다(드라비다인). 인도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침입한 뒤의 생활에 대해서는 그들 고유의 종교찬가이자 경전이며, 주요 문자 기록이었던 「베다」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베다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500년경)라고 부른다.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에 베다 문화는 동쪽의 비옥한 갠지스 평원으로 퍼져나갔다. 그 후 토착 인더스 후기 문화와 아리아 문화가 결합하여 탄생한 채색된 회색 도자기 문화(PGW)가 출현한다. 이 문화는 후기 베다 시대에 가장 강력한 왕국이자 최초의 국가였던 쿠루 왕국 및 그 동맹인 판찰라 왕국으로 비정된다. 이때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르나(카스트 제도), 즉 브라만(사제) - 크샤트리아 (귀족, 왕족) - 바이샤 (상인, 자영농) - 수드라 (농노)의 4계급이 형성되었다. 인도아리아인들은 이를 중심으로 농촌사회를 확립하고 고립적이며 폐쇄적인 경제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국가라 불릴만한 정치 집단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왕권이 확대되면서 기존에 정치를 주도했던 부족회의 및 원로회의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베다 시대 전기의 왕은 세습이나 선출로 정통성을 인정받았으나 베다 시대 후기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을 통해 우위를 점하고, 그 뒤에 브라만에 의해 통치자로서 즉위하는 성스러운 의식을 개최한 다음에야 왕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 의식을 통해서 왕은 모든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또한 누구의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신성한 존재임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베다 시대 후기부터 북인도 지역에서는 인도아리아인들이 세운 여러 국가들(자나파다)이 난립하였는데 그중 강대한 세력을 지닌 국가들이 주변 소국들을 합병하는 양상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총 16개의 나라가 살아남았으며 이리하여 십육대국 시대가 열렸다. 인도 서사시의 2대 작품으로 꼽히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 때문에 이 시대를 '인도 서사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400년 무렵에 십육대국은 바트사, 아반티, 코살라, 마가다의 4 나라로 통합되었다.[323] 이 무렵은 불교의 창시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살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기원전 320년,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갠지스 강 하류에 있는 마가다국 및 중부 인도 대부분을 점령하고, 나아가 305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통치하고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을 합병한 것은 인도사에서의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9]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 아소카는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펄쳐,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를 남쪽으로 크게 넓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자신의 치하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칼링가 정복 도중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깨닫고, 이후부터는 불교(상좌부 불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평화를 추구했다. 또한 그는 제국의 여러 행정 업무를 손보았을 뿐만 아니라, 돌기둥이나 바위 등에 자신의 칙령을 새겨 그 뜻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아소카 사후에 마우리아 제국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그 뒤로 즉위한 황제들은 정무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데칸 고원에서 사타바하나가 발흥하면서 중부 영토를 모조리 상실했다. 하지만 더 큰 위협은 중앙아시아에 건설된 그리스인 국가들이었다. 결국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마우리아 왕조의 북서부 영토를 점령했다. 이후 마우리아 제국은 얼마 못가 슝가 왕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마지막 왕이었던 브리하드라타는 슝가 왕조의 개창자인 푸시야미트라 슝가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마우리아 제국이 정복하지 못한 남인도 지역에는 촐라, 체라, 판디아 세 왕조가 존재했으며, 그보다 더 남쪽에서는 데바남피야 티사가 불교로 개종한 뒤 아누라다푸라에 수도를 두고 스리랑카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우리아 이후 인도 아대륙에는 여러 국가들이 난립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인 월지가 세운 쿠샨 제국이었다. 쿠샨 제국은 그리스인과 사카인(스키타이)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북인도를 침입하여 그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불교(대승불교)를 후원하였으며 로마 제국과 무역 활동을 전개했다. 쿠샨 제국은 서기 2세기에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흥한 사산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쿠샨 제국이 멸망하자, 서기 319년경에 마가다 지역으로부터 굽타 제국이 일어나 이후 1세기 동안 북인도 대부분을 정복하고 데칸고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굽타 제국은 이전 왕조들과 달리 불교 대신 힌두교를 후원하여 제국의 공식 국교로서 삼았다. 인도 문학 및 학문의 발전은 이 시대에 정점에 이르렀으며 많은 위인들이 굽타 제국 치하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인도 숫자의 발명, 삼각 함수의 고안, 무한대 및 0 개념의 확립 등이 있다.
서기 5세기에 굽타 제국은 약화되었고 북인도는 다시 타민족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치던 후나족이 쳐들어와 인도 북서부를 점령했다. 굽타 제국이 언제 멸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서기 6세기경부터 이 지역에서 굽타 제국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즈음에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뒤로 북인도는 이전과 같이 여러 국가들이 난립하는 혼란기로 돌입하게 된다.
기원전 16세기 즈음에 건국된 상나라는 문헌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 그 존재가 명확히 확인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이들은 황허 유역에 있던 대부분의 씨족 연합체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 발전한 선진적인 청동 문화와 전차 기술은 상나라 문명의 근간이었다. 안양 인근에 위치한 옛 상나라 수도 은허에서 성벽, 왕궁, 도서관, 무덤, 작업장 등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그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되어주었다. 이 무렵에 뼈에 글자를 새겨 정보를 기록하거나 점을 치는 등의 갑골문자가 발명되었는데,[324] 그 수는 대략 100,000개 이상으로 추정된다.[325]
기원전 10세기 즈음, 상나라는 서쪽 웨이허 지역에서 일어난 주나라에게 정복되었다. 이때 주나라 통치자들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최초로 '천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들의 수도는 황허 중상류의 호경이었다. 주나라는 특이하게 군주가 각 지역에 분봉왕 및 유력 제후들을 임명하여 통치하는 봉건제 국가였다.[326]
기원전 8세기 주나라가 서쪽의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무너지자, 유력 제후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중원의 패권을 쥐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t] 결국 주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한 제후들에 의해 수십~수백개의 국가들로 나뉘어졌으며 이리하여 중국사의 유명한 분열기인 춘추 시대가 개막되었다. '춘추'라는 명칭은 이 시대를 기록한 가장 유명한 역사서인 「춘추(春秋)」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327] 이때는 다양한 국가들이 출현하여 흥망성쇠를 거듭했으며 수차례의 전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328][329][330] 제자백가로 대표되는 고대 중국 철학이 번성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정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의 사상들이 창시된 시기이기도 했다.[331][332] 이때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정치 체제가 대부분 이행되었다. 그리고 춘추 시대 중기에는 철제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춘추 시대 초기에 대략 140여개에 달했던 국가들은 기원전 5세기 말이 되면 7개의 국가들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들이 서로 경쟁했던 시기를 전국 시대라고 부른다.[333] 이 시기에 이르러 주의 봉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제후들은 주나라 왕에 대한 명목상의 충성도 하지 않게 되었고, 주나라 왕의 직위는 기원전 256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된다.[334] 제후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단연 중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진(秦)이었다.[335][336] 마침내, 진나라 왕 영정이 기원전 213년에 다른 6국들을 모조리 정벌하여 병합하면서 중국의 분열기는 막을 내렸다.[337] 중국의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한 영정은 스스로를 진나라의 초대 황제, 즉 진시황제라고 칭했다.
진시황제는 이전 주나라와 다르게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하여 황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전국적인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했으며 수도를 함양으로 이전했다.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이 축조되고, 양자강 너머까지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표준화된 문자 체계 및 도량형 그리고 원형 화폐의 보급 등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 주었고, 가혹한 형벌 체제를 실시하여 그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기원전 206년에 그가 사망하자 곧바로 내전이 일어났다.[338] 하지만 오래지 않아 새 왕조였던 한(漢)이 중국을 재통일하고 4세기 가량을 통치했다.[339] 한나라 시대에 철기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식량 생산량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종이, 나침반 등 각종 물품들이 발명되었다. 이들의 주요 생산품 중 하나인 비단은 타림 분지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심지어는 저 멀리 로마에까지 수출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340]
“ | 話說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무릇 천하의 대세라 함은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나뉘어지게 된다. |
” |
— 소설 「삼국지연의」 中 |
한나라는 서기 1세기 후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왕실 친인척들과 대제후들이 부정부패를 일삼는 한편으로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는 황건적의 난으로 터져나왔고 이 즈음에 실질적인 권력은 지방 군벌들에게로 넘어갔다. 서기 208년경이 되면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채로 조조, 손권, 유비가 각각 중국 대륙을 삼분하는 형세를 보였으며, 220년이 되자 마지막 한나라 황제가 퇴위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했고 제국은 세 나라로 쪼개졌다. 이로부터 1세기 뒤에 북방 이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쳐들어와 북중국을 휩쓸었다. 중국은 589년까지 정치적인 분열을 거듭했다.[341][9]
중국과 인접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중국 문명과 여러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면서 성장해갔다. 한반도에서는 고조선이, 베트남에서는 어우락 및 남월 등이 잇달아 등장하였으나 기원전 2세기에 한 무제에 의해 모두 정복당했다. 이때 중국 문화가 그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향후 수 세기에 걸쳐 그 지역에 남아있게 되었다.[342] 뒤이어 한 무제는 한나라의 주적이었던 북방의 흉노마저 정벌함으로써 중국 패권을 완성시켰다.
수십년이 지난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가 쇠퇴하자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세 왕국들이 생겨나 중국의 잔재를 몰아냈다. 이후 그들은 서로 반목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서기 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한편 한반도 너머 일본에서는 기원전 500년 이전에 조몬 문화가, 기원전 200년에 야요이 문화가 등장했으며 서기 300년에는 야마토 평원에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왕국이 형성되었다.[343]
동남아시아에서, 야금술을 통해 구리와 청동을 주조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기원전 2,000년경에 존재했던 태국 북동부의 반 치앙 및 베트남 북동부의 풍응우옌 문화의 유적지들에서 잘 드러난다.[344]
동선 문화는 청동 주조 기술을 확립했으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는 훨씬 정교한 쟁기나 도끼, 낫, 화살, 창살, 장식품 등을 청동 및 철기로 만들 정도가 되었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70kg가 넘는, 크기가 작지 않으면서도 그 장식이나 세부 묘사들이 잘 묘사되어 있는 청동 드럼을 로스트 왁스 주조법으로 제작해내기도 했다. 이 고도로 정교한 금속 가공 기술은 같은 시기 중국이나 인도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독자적으로 발전해낸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작품들이 조직적이고, 중앙집권화된 계층사회 및 인구 증가의 결과물이라고 여긴다.[345][346]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에, 베트남 북동부 해안선을 따라 사후인 문화가 출현하여 번성했다.[347] 이들의 특징으로는 무덤이 포함된 도자기 매장지가 거의 전 유적지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안에는 크고 두께가 얇은 테라코타 병, 장식을 위해 제작된 화려한 색상의 그릇, 유리 공예품, 옥 귀걸이 및 금속 물체들이 다수 있었다.[348] 기원전 500년 즈음에는 '농업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군주국들이 동남아시아 본토와 그 주변 섬들에서 등장하여, 잉여 작물의 재배와 적당한 해안 무역을 기반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갔다.[349] 한편 말라야-인도네시아 지역에 있던 국가들은 대양 무역을 장악했으며, 에야와디 계곡 일대의 쀼 도시국가들 및 홍강 삼각주의 반랑 왕국, 메콩강 하류의 푸난 등의 국가들과 같은 문화를 공유했다.[350][351][352]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경 즈음 대만에서 시작된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이주는 아마도 인구 증가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는데, 그들은 곧 필리핀 군도 일대, 그 중에서도 북부의 루손섬에 정착하여 대략 23,000년 전부터 그곳에 거주했던 초기 오스트레일리아-멜라네시아인들과 혼혈되었다. 이후 1,000년 동안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더 남동쪽으로,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해의 수많은 섬들로 차레차례 퍼져나갔다.[353][354] 나중에 한 번 더 일어난 이주 물결로 인해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영향권은 수마트라 및 베트남 남부, 그리고 더 서쪽으로 확장되었고 이때 이주한 이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가운데 말레이어 화자와 참어 화자들의 조상이 되었다.[355]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기원전 1,500년 또는 그 이전에 북마리아나 제도를 거점으로 삼아 오지 오세아니아에 처음으로 도착한 인류가 되었다. 차모로인들은 이 무렵에 태평양 제도로 이주한 유일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으로서, 쌀 지배를 그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기원전 1,000년까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별도의 항해를 통해 팔라우와 야프로도 이주하였다.[355][353][354]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1,200년경 뉴기니 북부 해안의 섬들, 솔로몬 제도, 뉴기니 해안지대, 멜라네시아 군도에서 라피타 문화가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양 중간에 존재하는 섬들을 식민지로 삼아 항해 이주를 계속해나갔는데, 기원전 900~800년경에는 피지, 사모아, 통가에 도달했고 200년이 지나서는 쿡 제도와 타히티, 마르키즈 제도, 서기 900년에는 하와이, 서기 1,000년에는 라파누이, 서기 1,200년에는 뉴질랜드에까지 퍼져나갔다.[356][357][358] 몇 세기 동안,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들은 고립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더 이상 접촉이 어려워진 라파누이를 제외하고는 서로 간에 양방향 장거리 항해무역을 이어갔다.[358] 한편 핏케언, 커르머덱, 노퍽 등의 지역은 이전에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정착했지만 나중에 버려졌다. 이들이 주식으로 섭취했던 고구마의 확산에 근거하여, 오스트로네이사인들이 훨씬 더 멀리, 심지어는 남미까지 퍼져나가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역했을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359][360]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대략 3,000년 동안 대만과 필리핀에 걸쳐 존재했던 옥 무역로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한 초기 해상 무역망을 구축했다. 이 무역은 대만 원주민들과 필리핀 원주민들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나중에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태국 일부 지역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사후인-칼라나이 상호작용권)에도 형성되었다. 링링오 장신구는 이 무역 과정에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특히 주목할만한 고고학적 유물 중 하나이다.[362][363][364][365] 한편 해상 옥 무역로가 번영을 누리는 동안, 섬에 거주하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기원전 1,000~600년 사이에 스리랑카 및 남인도까지 그들만의 향신료 무역망을 뻗쳤다.[366][367][368]
심지어 카메룬과 우간다에서 발견된 바나나 식물석, 그리고 잔지바르의 신석기 시대 닭 뼈 유적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들은 기원전 500년이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오스트로네시아인들과 동아프리카인 사이에 장거리 접촉이 있었음을 암시한다.[369][370] 결국 칼리만탄과 술라웨시 그리고 마카사르 인근에 거주하던 몇몇 오스트로네시아 부족들이 동아프리카 및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했는데, 이것이 발생한 시기의 추정치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7세기 후반까지 광범위하다.[371][372][368][369][370]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인도양을 직접 건너기보다는, 남아시아와 동아프리카를 관통하는 해상 경로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355] 유전학적 증거에 따르면 오스트로네시아인들 일부는 아프리카의 더 깊숙한 곳과 아라비아 반도에도 퍼져나갔다.[373]
기원후 10세기 이전까지 동남아시아인들은 주로 그들만의 전통적인 선박만을 이용하여 항해했으나, 나중에 타밀인과 페르시아인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차츰 변화하게 되었다.[374][375] 어찌됐든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면 동남아시아의 옥과 향신료 해상 무역망은 남아시아, 중동, 동아프리카, 심지어 지중해까지 광범위한 지역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덕분에, 유럽~동아프리카의 상품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물품들과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375]
5세기 후반, 팔렘방에서 건국된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순다 해협 일대의 엠포리움 및 해상 무역망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 저 멀리 유럽과 중동에서부터 번성하는 당나라 시장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거래되는 향신료와 각종 불교 유물들을 수출함으로써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374](p. 12) 그들은 명실상부 이 지역의 해양제국이었다. 스리위자야가 남인도의 촐라 제국에게 무너지고 난 다음에는 믈라유, 크다, 타루마나가라, 마타람 등이 그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모두 동남아시아를 관통하는 무역로들, 특히 향신료 제도를 주축으로 한 향신료 무역과 인도~중국 간의 해상 무역망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376]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경, 오늘날 레바논 일대에 거주하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지중해 연안의 식민도시로서 설립되었다.[377] 이로부터 도시 국가였던 고대 카르타고가 건국되어,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히스파니아 전역에 걸쳐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각지에 동맹 세력을 구축했다.[378] 그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때,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였다.[377] 그러나 카르타고는 곧 일련의 분쟁에 휘말려야 했다; 이탈리아 중부에서 성장한 로마는 카르타고의 가장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이리하여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카르타고는 한니발 바르카의 활약으로 잠시 우세를 점하였지만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로마에 의해 멸망했다.[379]
기원전 3,100년경에 정복된 이래로 누비아는 줄곧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지만, 기원전 2,500년에 이르러 누비아인들은 케르마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국가를 세웠다.[380] 그뒤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누비아는 다시 한번 이집트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100년에 나파타를 수도로 한 쿠시 왕국이 생겨나 기원전 760년에 이집트를 역으로 정복했다. 누비아 파라오들은 신아시리아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약 한 세기 동안 이집트의 지배권을 유지했다.[381]
한편 그보다 조금 더 남쪽에서는 악숨 왕국이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에 걸쳐 있는 지리적 입지 덕분에 동아프리카로 향하는 해상 무역로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발전해오던 악숨 왕국은 서기 1세기부터 그 지역의 주요 강국으로 떠올랐고,[382] 마침내 서기 6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에티오피아 대부분과 홍해 연안, 예멘까지 팽창했다.[383] 특기할만한 점으로, 악숨 왕국의 아라비아 반도 침공시기는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탄생일과 겹친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녹 문화는 기원전 1,500년경 나이지리아 부근에서 등장하였으며 기원전 1세기 즈음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신비롭게 사라졌다. 이들의 사회 시스템은 당시 서남아프리카의 문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또한 이들은 실물 크기의 정교한 테라코타 조각품들을 제작하였으며 수준 높은 철기 제련법을 보유하고 있었다.[384]
젠네-제노는 오늘날 말리의 나이저 강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화 중심지이자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고고학 유적지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오늘날의 도시 젠네에서 대략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에는 장거리 무역과 아프리카 쌀의 재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시의 크기는 33헥타르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광범위한 조사 결과 그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도시는 기원전 250년부터 서기 900년까지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이슬람의 확산 및 젠네 모스크 건설로 인해 점차 버려져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전까지, 학자들은 다른 지역의 상인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서남아시아에는 선진적인 무역망과 복잡한 사회 시스템이 생겨나지 못했다고 여겼으나, 젠네-제노의 발견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젠네-제노와 비슷한 문화의 마을들이 기원전 900년경에 나이저 강 유역을 따라서 생겨났으며, 말리의 또다른 유적지인 디아에서도 발전했다.
다르 티칫과 오울라타는 기원전 2,000년경 오늘날 모리타니 일대에 있던 초기 도시 중심지들 가운데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 무렵에 사하라 사막의 옛 사바나 지역에는 대략 500개의 석기 정착지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기장을 재배하고 근처에 조그맣게 흐르는 개울에서 낚시를 하는 것으로 생활했다. 기원전 300년경, 이 지역이 더욱 건조해지면서 정착지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살아남은 정착지들은 이후 말리 제국의 형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 젠네는 이 시기에 정착한 사람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철기 생산의 흔적과 복잡한 양식의 무덤 등이 발견된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닝케족이 이러한 정착지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분석되었다. 이들은 소닝케족의 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반투족의 조상들은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나갔고 적어도 기원전 2,000년경까지 콩고 강을 지나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000년 이후에는 콩고 저지대에 농경 생활 방식이 확산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반투족들은 적도 남쪽의 남아프리카로도 그들의 발걸음을 옮겼다.[385] 선진적인 철 제련법과 야금술, 그리고 농경 기술이 그들과 함께 확산되어, 남아프리카에서는 기장, 기름야자, 수수, 얌 등이 재배되고 가축으로는 돼지나 양이 길러졌다. 이러한 기술들은 이 지역의 인구 증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기원 전후로 사막이나 울창한 삼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이 개간되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정착 공동체가 보편화되었다.[386] 나중에 기원후 15세기가 되면 대짐바브웨를 중심으로 주변에 유목 마을들을 거느린 강력한 반투 왕국들이 여럿 등장한다.[9]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선콜럼버스 시대(Pre-Columbian era)'의 아메리카에서는 서반구, 메소아메리카, 남미 서부에서 어느정도 중앙집권화된 고대 문명들이 출현했다.[387] 특히 안데스 산맥에서 발전한 고대 안데스 문명, 그리고 아마존 강 하구의 마라호아라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 평원지대에서도 농경 문화가 점차 확대되었다.[출처 필요][388]
고대 안데스 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 이 지역에서 어업을 주 생활로 하던 공동체가 발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정교한 해안 사회와 함께, 각지에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대형 기념물들이 건설되었다.[389] 이 지역의 사람들은 콩류, 면화, 땅콩, 고구마를 재배했으며 어업을 병행했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재배 가능 작물에 감자가 추가되었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차빈 컬트를 기반으로 한 차빈 문화가 등장하여 대형 사원과 예술품, 그리고 정교하게 짜여진 직물 등의 흔적을 남겼다. 금, 은, 구리는 보석으로서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소형 도구를 제작할 때 이를 같이 쓰기도 했다.[390]
차빈 문화는 기원전 250년경에 쇠퇴해 사라졌고, 기원전 200년을 전후로 하여 여러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개중 후아리, 푸카라, 티아와나코와 같은 도시들에는 10,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390] 서기 300년에는 모체 강을 따라 모체 문화가 등장했다. 모체인들은 그들의 사회 및 문화 전반을 새긴 토기를 남겼다. 한편 서기 100년경 이후부터는 안데스 산맥에 모체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들이 등장했다.[391] 특히 나스카 문화는 카후아치의 대규모 신전과 더불어 사막에 그려진 나스카 지상화로 유명하다.[392]
메소아메리카에서의 농경 생활은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되었는데 아보카도, 콩류, 고추, 박류, 스쿼시(squash) 등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기원전 7,000년경부터 재배되었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옥수수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토마토가 이 지역에 들어와 재배 가능한 작물로서 자리잡았다. 기원전 3,000년경이 되자 수많은 정착지들이 생겨났고 기원전 2,000년경에는 메소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에서 농경이 실천되고 있었다. 이때 일부 동물들이 가축화되었는데, 운송이나 노동에 적합한 대형 육상 동물이 아메리카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상은 칠면조나 개 등에만 국한되었다.[393]
기원전 1,200년경 산 로렌초로부터 메소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멕이 등장하였다. 올멕 문화의 중심지는 처음에는 산 로렌초였으나 기원전 800년경에 라 벤타로, 다시 기원전 400년경에는 트레스 사포테로 옮겨갔다. 이들을 포함하여 올멕 유적지의 공통적인 특징은, 석재로 지어진 무덤과 대형 사원 그리고 기타 신앙 관련 건축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올멕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고 고도화되어 있었는지를 증명해준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떠한 계급 사회를 형성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옥을 비롯한 다양한 올멕 유물들은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발견되며, 아마도 그들이 구축한 무역로를 통해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올멕 문자는 주로 그 지역 고유의 달력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후기 메소아메리카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394]
올멕은 기원전 400년경 알 수 없는 이유로 쇠퇴했다. 그 뒤 올멕의 잔재로부터 마야, 사포텍, 테오티우아칸이 등장하여 메소아메리카를 석권했다.[395] 사포텍 문명은 기원전 500년 즈음 오악사카 계곡의 몬테 알반에서 시작되었다. 몬테 알반은 서기 200년경에 대략 25,000명의 주민을 가진 대도시로 성장했으며 그 내부에는 대형 석조 사원과 광장 등이 있었다. 사포텍인들은 올멕인들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문자 체계 및 달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서기 900년경에 몬테 알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려졌다.[396] 테오티우아칸은 서기 200년 무렵부터 발전하였는데 전성기에는 무려 2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그 면적은 21km2에 달했다. 도시는 서기 700년경에 원인이 불분명한 화재로 인해 버려지기 전까지 계속 메소아메리카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397]
마야 문명은 서기 300년경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와 그 일대에서 등장했다. 고전기 600년 동안 사원, 피라미드, 궁전과 같은 마야 유적지가 80개가 넘게 건설되었다.[398] 마야 문명은 서로 전쟁을 벌이는 도시 국가들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티칼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각 도시 국가들은 경쟁을 계속하면서도 도시 간의 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했으며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올멕 문자에 기반한 마야 문자가 발명되었으며 달력이나 천문학적 지식 등이 여럿 기록되었다. 역사, 시, 그리고 기타 정보들은 아마도 책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스페인의 메소아메리카 정복 시기에 대부분이 사라졌다. 마야인들은 수학 계산에서 0의 개념을 사용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구대륙에서는 인도 수학자들이 발명). 마야 문명은 서기 800년경에 이 지역이 건조 기후로 이행하자 점차 쇠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첸이트사, 마야판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버려졌으며[399] 이들 역시 13~14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황폐화되었다.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1511년에 침략해올 당시에 마야 문명은 거의 몰락한 상태였다.
고대의 미국과 캐나다에서 조직화된 사회의 흔적은 종종 흙더미나 돌무더기를 쌓아올려 만든 건축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 중에서도 독특하게 여겨지는 것은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위치한 소위 '빈곤 지점 문화(Poverty Point culture)'로 100여개 이상의 무더기들이 조성되어 있다. 북미 전역을 관통하는 미시시피 강은 고대 북미 원주민들에게는 장거리 무역과 문화 발전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빈곤 지점 문화 이후, 초기 우드랜드 시대에 미국 남동부에서는 호프웰과 같은 복합적인 문화가 연이어 등장했다. 서기 500년경에 이 지역에 농경 생활이 생겨나기 전에는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수렵 채집 사회를 유지했다.
서기 3세기를 전후로, 유라시아 남반부에 줄지어 들어섰던 고대 제국들은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고 중앙 관료제를 지원하는 데 있어 공통된 문제에 직면했다.[400] 특히 로마와 한나라는 국가 자체가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국경 지대를 향해 가해지는 외부에서의 압력은 이전보다 더욱 심화되었다.[400] 중국에서는 서기 220년에 한나라가 멸망했지만, 실은 그보다 조금 더 전에 이미 커다란 내전에 휩싸이고 있었으며, 마침내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반세기가 넘는 기나긴 혼란에 빠졌다. 로마 제국은 흔히 3세기의 위기라고 알려진 시기에 점점 더 중앙집권제가 약화되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401]
이후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주요 문명권에 파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402][u] 304년 내몽골 지역의 흉노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남하했고, 10년도 채 안되어 황하에 이르렀으며 북중국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뒤 3세기 동안 북중국 지역은 주변 이민족들로부터의 연이은 침략에 시달렸다(오호십육국 시대). 많은 중국인들이 전란을 피해 양자강 너머 남중국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404]
비슷한 시기에 또 하나의 유목 민족인 훈족이 아시아 서남부를 휩쓸고 동유럽으로 쳐들어갔는데, 이것은 흑해 및 다뉴브 주변의 게르만족들에게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게르만족은 이들을 피해 발칸반도와 남유럽으로 내려와야 했고 곧 로마 제국과의 갈등이 일어났다. 378년, 서고트인들은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로마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뒤이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한편 다른 게르만족들은 라인 강을 건너 서유럽과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잠식했다. 로마 제국의 유일한 승리는 451년에 있었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호전적인 유목민인 아바르족이 서진해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발칸 반도를 점령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이 발칸 반도를 침공했고 롬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로 남진했다.
480년, 또 한 갈래의 훈족(백훈족)이 북인도를 침공해 굽타 제국을 약화시켰으며 나아가 484년에 사산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여 황제를 살해했다. 이들은 대략 한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페르시아와 북인도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브리튼 제도 앵글로색슨인 브리튼인 픽트인 스코트인 서유럽과 이베리아 프리슬란트인 프랑크인 수아송 왕국 부르군트 왕국 서고트 왕국 수에비 왕국 |
북유럽 데인인 중부 유럽 루길란드 앵글인, 색슨인, 유트인 알레만니아 튀링겐 이탈리아 반도 오도아케르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 |
발칸반도 게피드 왕국 동고트 왕국 율리우스 네포스 |
600년경이 되면 로마나 장안을 비롯하여 유라시아의 수많은 대도시들이 급격히 쇠퇴하는데, 그 과정은 '붕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구조가 낡은 구조를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지역에서 전통적인 지식과 기술은 퇴출당하고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인도와 북중국을 점령한 이민족들은, 자신의 통치 방식을 강제하면서도 지방의 실권자들에게는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도록 하는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유럽에서도 프랑스의 프랑크족, 스페인의 서고트족, 이탈리아의 동고트족 등 원시 게르만족 통치자들 역시 자신들의 체제를 강요하지 않고 다만 로마의 전통을 조금씩 바꾸었을 뿐이다. 476년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것은 서유럽이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작은 발걸음일 뿐이었다. 라틴어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살아남았고, 훗날 기독교 성직자와 이슬람 학자들은 고대 문화를 번역하여 미래 세대로 전해주었다.[9]
중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인들이 이전의 역사를 암흑기로 치부하여 이를 폄하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용어이며, 고대와 근대를 먼저 구분한 뒤에 그 사이의 시대를 뭉뚱그려서 지칭한 것이므로 꽤나 모호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때문에 중세는 그 특징을 확실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시대의 구분은 서구권에서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종속시키는 과정을 통해 보편적인 역사 구분으로서 확립되었으며, 특히 카를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론(원시 공산주의 시대-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자본주의-미래 공산주의 사회)과 사회진화론(그것이 계몽주의적인 형태이든, 제국주의적인 형태이든)이 호응을 얻음에 따라 서구식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개념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유럽권,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 혹은 그에 비견할 만한 집권 세력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가 다분하였으며, 유럽의 고대와 근대에 비견할 만한 시대가 정확하게 합의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력을 통해 강제적으로 서구식의 근대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중세 구분의 개념에 대해서는 탈근대 움직임이 태동하는 1970~1990년대까지도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오늘날에 들어 그러한 시대 구분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는데[405] 특히 동양사적인 시각으로 보았을때 그들의 역사 일부를 중세로 구분하는 것은 유럽 중심의 역사 구분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크다.[406][407][408][409] 일부 학자들은 중세의 대체 용어로 고전후 시대(Post-classical history), 고대후 시대(post-ancient era), 혹은 전근대 시대(Pre-Modern Era)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세는 근대 이전의 시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요한 호이징아는 오히려 르네상스를 《중세의 가을》로 표현한 바 있다.[410] 비유럽권에서는 중세를 어느 시기로 비정할 지를 두고 주장이 꽤 나오고 있는 편이다.
각 지역별 역사에서 중세는 대략 다음의 시기를 뜻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각 지역의 문명들이 세계의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되고, 이들 간의 무역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주요 종교들이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것이다.[v][418] 특히 아라비아 남부에서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서아시아에는 신정 체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종교제국이 세워졌고 얼마 있지 않아 엄청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황제 체제가 일본, 한국, 베트남과 같은 주변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 힘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양상이 보인다. 이때 불교나 성리학과 같은 종교·학문들이 같이 확산되었다.[419] 화약, 화기, 인쇄술 역시 이 무렵의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420][421]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세 온난기가 도래하면서, 식량 생산량과 함께 유라시아의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422] 그러나 13세기 중반부터 기온이 다시 낮아졌고 이와 동시에 파괴적인 전염병이 퍼지면서 유라시아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422]그 무렵에 급부상한 몽골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여 두 지역 사이에 전례없는 대여행의 시대를 열었다.[423] 비록 중간에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몽골 침공과 학살, 중세 흑사병 등의 위기가 닥치면서 부수적인 감소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이 기간 동안에 인구는 꾸준하게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424][425] 중세 시대의 시작이었던 500년경에 약 2억 1천만 명이었던 전세계 인구는, 중세 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1,500년경이 되면 약 4억 6천 1백만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하였다.[426]
초월적이고 영적인 존재나 초자연적 질서에 관한 관행·도덕·신념·믿음 등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나 문화 체계, 일반적으로 절대적 진리의 추구와 신에 대한 숭배 그리고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거나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는 기원전 1,000년기에 이미 등장해 있었다(불교). 그 후 1,000년 동안, 불교는 유대교에서 발전한 기독교 및 이슬람이라는 보편화된 다른 주요 종교들과 접촉했다. 이 세 종교는 중세가 끝날 때까지 구대륙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때때로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427]
유라시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권력을 강화하고 세계관을 명확히 하며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를 만드는 데 종교나 초자연에 대한 숭배가 사용되기도 했다. 메소아메리카의 우주론적 내러티브, 특히 마야 신화 및 아즈텍 신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407]
대승불교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이미 실크로드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었다.[429][430] 중국의 승려들이 번역 작업을 통해 불교를 들여온 것은 최소한 서기 1~2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카니슈카 대제 치하의 쿠샨 제국을 거쳐 타림 분지와 하서주랑을 관통하는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였을 것이다.[431][432] 그 과정에서 설일체유부와 적동섭부 등의 기타 불교 분파들 역시 동방 세계에 전해졌다.[256]
상좌부불교는 스리랑카 지역에서 처음 발전하여 얼마 있지 않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편 다른 불교 분파들 역시 북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256] 중앙아시아와 중국 불교 간의 직접적인 접촉은 3~7세기, 그리고 그 이후인 당나라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4세기부터 법현(395~414년) 및 현장(629~644년)과 같은 중국의 승려들은 '깨달음'을 얻고자 천축(天竺)이라고 알려진 북인도로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는데, 특히 후자의 여행기는 훗날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이 등장하는 「서유기」로 각색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에 널리 알려졌다. 3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북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육상 무역로는 흉노, 한나라, 쿠샨 제국, 에프탈, 돌궐, 당나라의 지배를 연달아 받았다.
인도 불교의 전통 중 하나인 탄트라와 또 다른 분파였던 밀교는 7세기에 중국에 도착했으며, 1세기 이후에는 티베트가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그들만의 새로운 불교인 티베트 불교를 만들어냈다.[433] 비록 이슬람과 힌두교의 확산으로 인해 불교는 본래 발상지였던 북인도 및 그 주변 지역에서는 세를 잃어버렸지만, 대신에 동아시아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믿는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몇몇 국가들에서는 국교로서 지정되기도 했다.
기독교는 예수가 사망한 뒤인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유다이아 속주에서 그리스적 영향을 받은 헬레니즘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대대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동부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신도들을 늘려나갔다(기독교의 확산). 그들의 교리가 점차 유대인이 아닌 민족들에게도 널리 퍼지면서, 기독교는 2세기경에 서서히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기독교의 세를 무시할 수 없게 되자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포함한 타종교에 대해 관용정책을 펼쳤으며, 나중에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쇠퇴하면서, 교회의 위상에는 타격이 가해졌지만 교황이라는 이름은 침략자들과의 외교 협상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다.[434] 그 무렵에 기독교 교회들은 다양한 부족들에게 장기간의 선교 활동과 복음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널리 전파했다. 강한 수도원 전통을 가진 이집트의 콥트 교회는 4세기부터 나일강 상류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누비아와 에티오피아인들을 개종시켰고,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교는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부터 동쪽으로는 중국에까지 퍼져나갔다. 북유럽에서는 아일랜드의 수도원 교회가 브르타뉴에 복음을 전파했다.[9] 최종적으로 기독교는 마자르인, 게르만인, 켈트인, 발트인과 일부 슬라브인들에게도 확산되었다.[434]
500년경이 되자 기독교는 동로마 제국(비잔틴)과 이탈리아 왕국(동고트 왕국)의 문화에 완전히 녹아들었고[435] 그와 함께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여 수도원 설립 및 운영에 대한 체계를 확립했다.[434] 수도주의가 인기를 끌면서 유럽 전역에서 기독교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434]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갈리아 지역에 세워진 수도원들은 초기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9세기에 일어난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7세기에 아랍 무슬림들이 시리아,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정복하여 이전에 그 지역에 있었던 기독교도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자 기독교권에 위기가 닥쳤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5곳의 주요 교구 중 3곳(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을 잃어버렸다. 기독교가 이렇게 무력하게 패배했던 이유는 동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436] 이슬람은 이제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반도로부터,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쳐들어왔다. 그러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선교의 방향을 북쪽의 슬라브족들에게로 돌렸다. 러시아 대공은 동방정교회를 선택했고, 988년 블라디미르 1세가 세례를 받았다. 한편 헝가리와 폴란드는 카톨릭을 선택했다. 또한 이 시기에 서쪽의 게르만인들 역시 기독교와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8세기 들어 카롤루스 왕조가 급격히 부상하자, 교황청은 그들이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을 더욱 기울였다.[437]
중세 시대는 교회 내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438][439][440][441]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회정치와 행정제도를 일신하여 후대에 전해주었다.[442] 한편 8세기 초에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에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서방 기독교 세계는 성상 옹호 주의를 채택했다. 10세기 초, 클뤼니 대수도원으로 대표되는 수도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수도주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443]
11세기 이후 서유럽권에서는 일부 오래된 성당 학교가 대학교가 되는 일이 흔했다(ex. 옥스포드 대학교, 파리 대학교, 볼로냐 대학교 등). 이전에는 수도사나 수녀가 운영하는 사원학교, 수도원 학교 등이 고등 교육을 담당했었다. 이러한 학교들이 설립되고 운영되었다는 증거는 적어도 서기 6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마도 중세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등장했을 것이다.[444][445][446][447] 이들은 성직자, 변호사, 관료, 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학술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교육 커리큘럼 역시 나름대로 잘 짜여져 있었다.[448]
중세 성기에 들어 유럽 전역에 '신도시'가 부상하면서, 수도원을 떠나 새로운 도시 지역에서 '성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신을 추종하기 위한 탁발수도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세운 프란치스코회,[449] 그리고 도미니코가 세운 도미니코회였다.[450] 두 수도회 모두 유럽의 대학 발전에 기여했다. 또 다른 새로운 수도회는 시토회였는데, 이들은 버려지거나 아직 개척되지 않은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기독교 확산을 주도했다. 이 시기에 교회 건축은 새로운 차원에 이르렀고,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 등으로 지어진 성당들이 여럿 등장했다.[451]
기독교 민족주의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번성했던 영토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거세지면서 등장했다.[452] 때마침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권을 수호하던 동로마 제국이 1075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게 크게 패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에 마지못해 서유럽 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여세를 몰아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다.[453] 하지만 십자군은 성지를 되찾는다는 기존의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으며, 오히려 제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면서 서방 기독교 세계와 동방 정교회 세계 간의 분열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454]
8세기 이후로 이슬람의 위협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갈등은 점차 첨예해져 갔다. 기독교 교회는 7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일련의 내부 갈등을 겪었고, 이로 인해 라틴계 서방 기독교와 그리스계 동방 정교회로 분열되었다(교회의 대분열). 양측은 행정적, 전례적, 교리적 문제ㅡ 특히 교황의 종교권력 독점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455][456] 동로마 제국과 동방정교회가 이슬람 세력 및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점차 쇠퇴하는 반면, 교황은 서유럽의 게르만-라틴 국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지고, 프랑크 왕들이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교황과 서방 기독교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1274년의 제2차 리옹 공의회와 1439년의 피렌체 공의회를 포함하여 양 기독교권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대체로 실패로 돌아갔고, 이 두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분열 상태에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다양한 소규모 동방 교회와는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570년 즈음에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상업 중심지였던 메카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도덕적인 타락과 우상 숭배에 시달리면서 은둔 및 영적인 사색을 추구하던 무함마드는 우연히 메카 인근의 자발 알 누르 산에 있는 히라 동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첫번째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 610년이며,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이슬람의 시작일을 610년 또는 그 무렵으로 잡는 편이다.
“ |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 알라 (하나님) 외의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
” |
— 이슬람의 신앙고백문인 샤하다 중 한 구절 |
무함마드는 자신이 받은 가르침ㅡ 다른 사람들에게 유일신에 대한 복종, 임박한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무함마드의 단순하고도 명료한 메시지는 다신교와 차별이 만연했던 아라비아 반도에서 소수의 추종자들을 사로잡았고, 반대로 유명 인사들로부터는 점점 더 반대를 받았다. 결국 무함마드는 서기 622년경에 이웃한 도시인 메디나로 이주해야 했다(헤지라). 그곳에서 무함마드는 신권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확립했다. 바드르 전투와 참호 전투에서 잇달아 진압군을 패퇴시킨 무함마드는 629년에 메카로 다시 돌아와서 그곳을 이슬람의 진원지로 삼았다.
610년에 이슬람이 창시된 이래로, 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들을 종교적인 기치 아래 하나로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된 힘을 외부로 집중시켜 폭발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놀라운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슬람 군대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소아시아로 밀어내고 당시 중동의 강대국이었던 사산 제국까지 멸망시켰다(초기 무슬림 정복). 이후 우마이야 칼리파국과 아바스 칼리파국이 세워지면서 이슬람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어, 서기 8세기 중반에는 서쪽으로 북아프리카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강 유역에까지 도달할 정도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파티마 칼리파국, 셀주크 제국, 아이유브 왕조 및 맘루크 술탄국 등의 이슬람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 중 하나였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고도로 페르시아화된 제국은 세계의 기술 및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슬람의 황금 시대는 수많은 문화의 중심지를 탄생시켰고, 중세 시기 동안 저명한 과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의사, 철학자를 배출했는데 이들의 업적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시기는 전통적으로 아바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의 치세(재위:786~809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 이슬람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에서 고전 지식들을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했고,[457][458] 나중에 이를 유럽으로 전해주면서 서양 문명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중세 시대에는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무역과 교류가 급속히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각 문화권의 상호작용 역시 활발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서유럽 - 동로마 - 초기 러시아 - 이슬람권 - 동아시아 문명 간에 구축된 무역로는 이들을 긴밀하게 연결해주었다.[459]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도입된 낙타는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경로ㅡ 사하라 종단 무역을 가능케 했다. 한편 이슬람 제국은 그리스, 로마, 인도의 많은 유산들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퍼뜨렸고, 다시 이것이 비이슬람권에 전파되면서 결과적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나머지 지역들도 발전을 시작했다. 이슬람 해상 무역은 인도양과 지중해를 관통하는 무역로들을 연결하여 전에 그 역할을 하고 있었던 동로마 제국을 대체했다.
한편 기독교 십자군들은 무슬림 스페인, 시칠리아, 레반트로 진출하면서 서유럽에 이슬람의 진보된 과학, 기술, 상품들을 들여왔다.[460] 마르코 폴로는 서유럽에 번영하는 동아시아 세계를 소개하여 그 지역과의 무역을 새롭게 개척했다.[461] 결과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은 무역 및 정복 과정에서 유럽인들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몽골 제국이 출현하면서 유라시아 전역이 전례 없는 규모로 연결되었으며, 이전에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상품, 문화, 사상 등의 대규모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때 흑사병과 같은 질병 역시 무역로를 따라 전파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자체적인 무역로가 존재했지만, 이곳에서는 지리적인 요인과 더불어 고도화되지 않은 기술 때문에 무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마야인들이 구축한 무역로가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연결되기는 했으나 남미와 북미의 복잡한 사회에 직접적으로 닿지는 못했고 이 지역들은 결국 구대륙인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아있었다.[462]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는 폴리네시아 섬들 중 일부가 서로 해상 무역을 했다.[463] 수세기가 지나 무역로가 잊혀지고 버려질때까지, 그들은 오직 아웃리거 카누와 전통적인 항해기술, 조류와 파도, 바람들, 날아다니는 새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만에 의지하여 하와이와 타히티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했다.[464] 한편 멜라네시아에서는 파푸아뉴기니 본토와 연안의 트로브리안드 군도 사이에 흑요석 무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은 1200년까지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고, 그 후에 각 섬들을 이어주던 해상 네트워크는 해체되었으며 그 지역들은 훨씬 더 소규모의 경제권으로 나뉘어졌다.[465]
실크로드는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무역로로서 국제 교류 및 상호작용에 큰 기여를 했다. 이 길을 따라서 수세기 동안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종교·기술의 전파가 일어났으며, 비단·금·향신료 등의 상품들이 거래되었고, 질병이 확산되었다.[466] 안드레 G. 프랭크, 윌리엄 H. 맥닐, 제리 H. 벤틀리, 마샬 호지슨 등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프리카-유라시아 세계가 문화적으로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었으며, 실크로드가 이들 문화권을 연결하는 기반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66] 그것은 중국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지중해의 로마 제국까지 이어졌다.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은 그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도맡아 했는데, 말, 양모, 옥 등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대금으로 비단과 도자기를 받은 뒤, 이것을 로마에 수출하여 와인 및 기타 상품들과 교환했다.[467]
실크로드는 철기 시대부터 고전후 시대 사이에 여러차례 쇠퇴했다가 다시 번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후한 시대의 중국에서 잠시 실크로드가 끊어졌다가, 서기 1세기경 장군 반초에 의해 다시 연결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468]
“ | 不入虎穴 安得虎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얻겠는가? |
” |
실크로드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라시아의 변화하는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받았다. 서기 7세기에 이슬람이 부상하면서 실크로드의 경로가 크게 바뀌었는데, 기독교 유럽이 수세기 동안 아시아와 단절될 정도로 무슬림 통치자들이 그들을 고립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실크로드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사건으로는 튀르크족의 출현,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분쟁,[469] 키예프 러시아의 성립, 아랍 이슬람 세계의 분열 등이 있었다.
실크로드는 몽골 제국의 통치 기간인 13세기에 다시 번성했는데, 몽골인들은 전례없는 규모의 정복을 통해 팍스 로마나에 버금가는 안정기(팍스 몽골리카)를 중앙아시아에 가져왔다.[470] 무슬림 역사학자 아불 가지는 이 무렵의 중앙아시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471][472]
“ |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일출의 땅에서 일몰의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 | ” |
실크로드가 연결되어 있는 한은 유럽과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사이에 이루어지는 무역과 교류에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471] 수공예품의 생산·화려하고 독특한 예술·그리고 이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장학금이 넘쳐났으며, 부유한 상인들이 무역로를 잇는 국제 도시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몽골 제국의 대통합과 그로 인해 형성된 팍스 몽골리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여행의 시대'를 열었다.[473] 이 시기에 이븐 바투타, 랍반 사우마, 마르코 폴로 등의 인물들은 북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여행하면서 미래의 모험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468] 한편 실크로드는 아프리카-유라시아 전역에 종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이슬람이 사막과 산맥을 건너 동아시아에 도달했으며,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w] 상업적인 여행 외에도, 아프리카-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존재했던 순례에 대한 존경심은 세계 역사학자 로버트 I. 무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세 유라시아를 만든 단일적인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례였다."[474][475]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가 지나자 실크로드는 서서히 쇠퇴했다.[470] 이것은 유럽인들이 새롭게 해상 무역로를 개척하면서, 아프리카 남단과 인도양을 거쳐 아시아와 직접 상품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470]
실크로드는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무역로이니만큼 전염병의 확산에 취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는 동아프리카에서 처음 발원하여 542년경 동로마 제국에서 대규모 발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지중해 인구의 4/1이 사망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무역로에서 퍼졌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476] 그리고 800년이 지나자 실크로드 무역로에서 다시 전염병이 창궐하여 악명을 떨쳤다(중세 흑사병). 이때의 전염병은 원래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나, 몽골 제국의 정복과 함께 실크로드가 활성화되면서 널리 퍼졌고, 1347년을 기점으로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477][478]
유라시아인들에게, 전염병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특히 유럽은 이 기간 동안 10년마다 주기적인 전염병 창궐을 경험했다. 상술했듯이 육상과 해상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통해서 파괴적인 범유행 전염병이 초기 발원지를 훨씬 뛰어넘어 확산될 수도 있었다.[479] 페스트 범유행의 기원과 더불어 동유럽-서아시아 사이의 잠재적인 확산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은 학문적으로 보았을 때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이다.[480] 페스트 이외에도 천연두를 비롯한 기타 질병들 역시 이 시기에 널리 퍼졌다.[481]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페스트균)에 의한 최초의 페스트 범유행은 541~549년의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이다. 이 전염병의 발원지는 키르기스스탄의 톈산산맥 일대인 것으로 추정되나[482] 그 기원은 아직 불확실하며, 일부 역사가들은 동아프리카를 지리적인 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83][x]
이집트 펠루시움에서 처음 보고되기 전에, 중국이나 기타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특징을 가진 질병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전염병은 유럽과 서아시아를 휩쓴 후에 동아시아에까지 퍼져나갔다.[y] 특히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 지역일수록 피해가 컸는데,[z] 때문에 도시 문명들은 인구가 크게 감소했으며 번영하던 제국들의 경제 및 사회구조는 심각하게 불안정해졌다.[485] 시골 지역 역시 심각한 인구 감소에 직면하기는 했지만 도시 지역만큼 피해가 심각하지는 않았으며 사회경제적으로 입은 영향은 적었다.[486] 또한 인도는 1600년 이전까지 페스트가 창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85]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 및 기타 자연재해의 트라우마는 유라시아에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일련의 변화를 일으킨 주요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신이 내린 치유의 기적'에 대해서 찬양했고, 중국의 유교 관리들은 '한나라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은 그들이 천명을 잃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전염병의 피해로 인해 쇠약해진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은 갑작스럽게 이 지역에서 부상한 아랍 무슬림들에게 패배했다.[484]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유라시아의 육로 무역 역시 이 전염병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로는 인도양 연안 무역으로 점차 대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750년경까지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나 그와 관련된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유라시아 곳곳에서 발생했고, 나중에 이것이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많은 국가들의 경제가 회복되었다.[487]
“ | 행운은 우리에게 거의 미소짓지 않고, 다가오더라도 꽃이 지듯 재빨리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만에 빠져 자신이 불멸이라 착각하는 것을 방지하고 스스로 자제하며 살게 하려는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 |
— 1348년, 동로마 제국의 한 작가 |
6세기가 지난 뒤에,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또다른 아종이 일어나 흑사병(Black death,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유라시아를 덮쳤다. 제2차 범유행은 14세기 중반에 이루어졌고 그중 첫번째 사례는 1346년에 보고되었다.[488] 전통적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흑사병이 중국 윈난성에서 시작되었고, 감염된 쥐와 벼룩을 데리고 온 몽골인들이 정복 활동을 개시하면서 이것이 서쪽으로 퍼져나갔다고 설명했다.[480] 하지만 이 이론에 대한 구첵적인 역사적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페스트 자체는 스텝 지역의 풍토병으로써 간주되기도 한다.[489] 오늘날 유럽과 이슬람권에서는 흑사병의 영향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와 함께 관련 역사학이 발전했지만, 이들은 서유라시아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흑사병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부족한 감이 있다.[490][491]
1933년에 창간된 의학사 회보에서는 14세기 아시아에서 알려진 전염병과 흑사병 사이에 잠재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해 보았다.[480] 한 예로, 흑사병이 발병하기 15년 전인 1334년에 인도 델리 술탄국의 데칸 고원에서 이름이 불분명한 전염병이 창궐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사례가 있는데, 다만 자세한 증상이 보고되지 않았고 기록 역시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흑사병의 전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원나라에서는 14세기 중반 허베이성에서 90%의 치사율을 자랑하는 역병이 맹위를 떨쳤다고 기록되어 있다.[480] 이것 역시 이전 사례와 마찬가지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역사학자들은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다.[480] 몇몇 학자들은 이 사례들이 흑사병이 아니라, 단순히 당시 동아시아에 만연해있던 발진티푸스, 천연두, 이질과 같은 다른 전염병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80][492] 확실히, 흑사병에 대한 서구의 반응에 비해서 같은 전염병을 언급하는 중국 기록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므로, 이것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주기적으로 나타났음을 시사한다. 역사학자들은 '중국 기원설에 따르면 흑사병이 몽골 제국의 분열과 함께 인구밀도가 희박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통했는데, 그렇다면 중국 본토에서 크림 반도의 카파까지 약 8000km가 넘는 거리를 거쳐왔다는 말이 되지만 이것은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고 말한다.[480]
“ | 오 복받은 후손들아, 너희는 이 끔찍한 비통을 겪지 않고 다만 우리가 남긴 증언들을 우화로 읽겠지. | ” |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그의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흑사병의 여파는 근대 초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유럽에서는 파괴적인 인구 감소로 인해 사회 계층구조에 지속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장원제가 붕괴했고, 임금을 주고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이 점차 선호되었으며, 아예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한 기계와 메커니즘의 발전에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다만 중세 유럽에서 거의 사라졌던 노예제도는 다시 돌아와 1400년대 이후에 포르투갈이 대양 탐험을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국가의 경제들이 특정 상품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하고 자신들의 영토에서 나지 않거나 부족한 자원들, 그리고 노예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의 적극적인 확장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서유럽권의 확장이 가장 많이 논의되지만, 의외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 역시 토지를 기반으로 한 확장주의 대세에 참여하여 자체적인 노예 무역을 했다.[493] 한 가설에 따르면 아라비아 숫자의 채택은 부분적으로는 흑사병에 의해서였을 수도 있다고 한다.[494]
'고전후 과학(post-classical science)'이라는 용어는 중세 유럽 과학과 중세 이슬람 과학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탄생했으며 오늘날에는 학계와 대학 과정에서 이따금씩 사용된다.[495] 과학 지식은 동유럽, 특히 아랍 무슬림들의 무역과 전쟁을 통해 서쪽으로 퍼져 나갔다. 이슬람 세계는 인도의 의학 지식도 받아들였다.[496]
서방 세계와 이슬람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전 그리스 지식을 수용하고 그 전통을 보전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이슬람 과학자들이 고전 고대의 업적을 보전한 것인가, 아니면 오로지 초기 그리스의 발전만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몇몇 존재한다.[497][498] 하지만 어찌됐건 이슬람권으로 넘어갔던 고전 유럽 과학은 십자군을 거치면서 다시 유럽의 기독교 왕국들에게로 돌아왔다.[499]
페르시아-중국 무역과 탈라스 전투의 결과로 중국의 기술 혁신이 이슬람 지식 세계에 진입했다.[500] 특히 천문학 및 제지 기술의 발전 등이 대표적이다.[501][502] 처음에는 이슬람 세계의 동방에서만 도입되었던 제지술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기 전까지 계속 이슬람 세계의 서방으로ㅡ 마침내 이슬람 치하 스페인까지 퍼져나갔다.[503] 몽골이 유럽에 중국산 화약 무기를 도입했는지, 아니면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화약 무기를 발명했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있다.[504][505] 몽골 제국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지식을 수집하여 대규모 사업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어 1303년에 중국의 원나라는 서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 전역을 포함하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 중국 지도와 이슬람 지도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유라시아 지도'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몇 세기가 지난 뒤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 지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492] 몽골 제국 시대에 활성화된 유라시아 무역로과 함께 동서양의 과학 기술이 서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대륙 내에서의 세계 문화권 간의 정보 전달은 일반적으로 문서 및 서류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506]
중세 아프리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부상한 아랍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영향을 모두 받았는데,[507] 특히 북아프리카, 수단, 동아프리카 해안 지대에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은 여러 지역에서는 불완전하거나 획일적이지 않았으며, 피지배층들에게는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508] 무슬림들이 아프리카로 이주하고 그곳을 정복하기 전에는 대륙의 대부분이 각자의 규모와 복잡성을 가진 다양한 사회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백성들을 여러 수단으로 통치하는 왕이나 원로 회의가 있었다. 또한 이들 민족 대부분은 영적이고 애니미즘적인 토착 종교를 숭배했다. 지리적으로 구분한다면,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이북의 북아프리카와 이남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나뉘어진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와 기타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몇 천년 동안 구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는 주로 반투어를 사용하는 반투계 민족들이 지배적이었다. 1100년경이 되면서부터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세계는 금의 생산 및 유통을 아프리카에 의존했다.[509]
약 650개가 넘는 도시가 고대 왕국인 악숨과 누비아를 넘어 처음으로 확장되었다. 아프리카 문명은 종교에 따라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510][511]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사하라 종단 무역이라는 대규모 무역 네트워크가 관통하는 지역이었다. 가나, 말리, 송가이 등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세운 독자적인 무역 이슬람 제국들은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512] 14세기 말리 제국의 통치자였던 만사 무사는 당대 최고의 부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513] 말리의 팀북투는 국제 과학의 중심지였으며, 샹코레 대학은 당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선진적인 교육 기관이었다. 한편 동아프리카는 몸바사와 같은 연안의 아랍-이슬람 도시와 함께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시장에 금, 구리, 상아를 수출하는 남아프리카의 그레이트 짐바브웨 등의 전통 도시들을 모두 포함하는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를 담당했다.[509]
서유럽의 정치 구조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 타민족들의 이동은 일반적으로는 '침입'이라고 묘사되나, 실은 단순하게 군사적으로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라 아예 민족 전체가 이주한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들이 서로마 엘리트층들과 협상을 시도해서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예 서로마 군대가 무너져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14] 5세기경의 서로마 황제는 스틸리코(408년), 아에티우스(454년), 아스파르(471년), 리키메르(472년), 군도바드(516년) 등 비로마 혈통 출신 장군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로마 황제가 단절되었을 때 이를 대신해 등장한 수많은 왕들 역시 이들과 비슷한 부류였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 기존 로마 엘리트층과 결혼 동맹을 추진하기도 했다.[515] 그 과정에서 로마 문화와 타민족의 문화가 서로 융합되었고, 이전 로마 시대보다는 비교적 정치적 문제에서 자유로운 시대가 열렸다.[516]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들을 보면, 침략자들과 로마의 것을 비교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전자의 것이 더 발전한 경우도 있었다.[517] 새롭게 세워진 왕국들의 학술 및 문자 문화의 대부분은 로마의 지적 유산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518] 하지만 타민족들은 세금 제도에 무지했고 따라서 그들이 만든 새로운 제도는 세수의 점진적인 손실을 불러일으켰다. 그들 중 일부는 더이상 세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지 않고, 대신에 토지나 다른 제도를 통해서 군대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했다. 즉, 대규모 세수 제도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이전 로마의 효율적이고 잘 짜여진 과세 시스템이 사라졌다.[519] 또한 이때는 각 왕국들 간에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로 인해 공급이 약화되고 사회가 탈도시화, 농촌화되면서 노예제도가 잠시나마 쇠퇴했다.[520][note 1]
5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새로운 민족들과 개인들이 로마 중앙집권 정부가 남긴 정치적 공백을 메웠다.[518] 고트족의 일파인 동고트족은 5세기 후반 테오도리크(526년)의 치하에서 로마령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적어도 그의 치세 말기까지는 현지인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강력한 왕국을 형성했다.[522] 부르군트족은 갈리아에 정착했고, 436년 훈족에 의해 초기 왕국이 파괴된 이후 440년대에 들어 새로운 왕국을 건국했다. 5세기 말~6세기 초에 이르면 그들의 왕국은 오늘날의 제네바에서 리옹까지 이르렀다.[523] 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프랑크족과 켈트계 잉글랜드인들이 작은 정치집단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었다.[524]
그러한 가운데서, 프랑크 지도자 클로비스 1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새롭게 메로빙거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을 건국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서고트 왕국과 수에비 왕국이, 북아프리카에서는 반달 왕국이 각각 새로운 정치 제도를 수립했다.[523] 그리고 6세기에 최종적으로 랑고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에 정착하여,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선출군주제 형식의 왕국을 세웠다. 6세기 후반에 이르자 이 왕국은 세습이 가능한 전제군주제로 바뀌었다.[525]
이때 유럽에는 새로운 민족들이 대거 이주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특히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수의 민족들이 들어왔다. 예를 들어, 갈리아에서 '침입자'들은 남서쪽보다 북동쪽 지역에 비교적 더 광범위하게 정착했다. 슬라브족은 중부 유럽 이외에도 동부 유럽과 발칸 반도에 정착했다. 이들이 그 지역에 정착하자 언어에 변화가 생겼다.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어 및 로망스어로 파생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대체로 수세기가 걸렸다. 그리스어는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로 남아 있었지만, 슬라브족이 동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슬라브어가 유입되었다.[526]
서유럽에서 새로운 왕국들이 생겨날 즈음에, 동유럽과 발칸반도 일대에 걸쳐 있던 동로마 제국은 7세기 초까지 이어진 경제 부흥을 이루어내면서 이전의 피해를 어느정도 회복했다. 그렇지만 제국의 평화는 대체로 큰 변동을 겪었다. 발칸 반도 너머에서는 수많은 야만족들이 지속적으로 침공해왔으며, 이란 고원의 사산 제국 역시 5세기의 대부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동로마와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로마법의 성문화가 완료되었는데 그 중 첫번째 작품은 438년에 완성된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이었고[527] 두번째 작품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치세(527~565년)에 편찬된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이었다.[528] 후자인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하고, 휘하의 벨리사리우스 및 나르세스로 하여금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게르만족으로부터 탈환하도록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529] 그의 훌륭했던 통치는 542년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로마 제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전과 같이 공세를 펼치기보다는 비교적 수세적인 전술로 일관했는데 때문에 이탈리아 정복은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530]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망했을 때, 동로마 제국은 이전 로마 제국의 재건이라는 목표를 반 이상 달성한 상태였다. 새롭게 얻은 영토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대부분, 그리고 스페인 남부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고토 수복 전쟁은 이전까지는 역사가들로부터 영토를 과도하게 확장하여 나중에 이슬람이 팽창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비판받았지만, 실제로 동로마 제국이 당면한 어려움은 이 전쟁을 위해 소모된 재정과 더불어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양면 전선, 그리고 군대를 육성하기 어려운 여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531]
슬라브인들이 발칸 반도에 점진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자 유스티니아누스의 후계자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540년대 후반까지 슬라브 부족들은 트라키아와 일리리아를 잠식했고 551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에서 동로마 군대를 패퇴시켰다. 그 뒤를 이어 아시아에서 아바르족이 넘어왔다. 그들은 560년대에 다뉴브강 이북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6세기 말이 되면 중부 유럽의 주요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동로마 황제들은 아바르의 침입을 피하고자 그들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대략적으로 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532]
설상가상으로 동로마 제국은 또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마우리키우스 사후 일어난 정치적 혼란을 틈타 페르시아가 대대적으로 제국을 침공한 것이었다. 사산 제국은 이라클리오스의 대반격이 성공하기 전까지 아나톨리아 동부, 레반트, 이집트 등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아갔다. 628년, 제국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533]
서유럽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의 오래되고 명문있는 엘리트 가문들 대부분은 사라졌으며 대신에 남은 가문들은 세속적인 일 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더욱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틴 문학과 지식에 대한 관심 및 가치관은 희미해졌고, 따라서 교육은 더이상 엘리트 지위를 표시해주는 것이 아닌 비교적 실용적인 '기술'로 전락했다.[534] 6세기 후반까지, 교회의 주요 종교 교육 수단은 책이 아니라 음악과 예술이 되었다.[535] 하지만 이 시기에도 지적인 발전은 이루어졌다. 고전 학문을 모방하려 애쓰거나, 구술로서 자신의 지식을 알리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해냈던 것이었다. 특히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489년), 카시오도루스(585년), 보이티우스(525년)의 글은 당대의 모습을 잘 묘사해주는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상당하다.[536]
귀족 문화는 문학적인 추구보다 홀에서 열리는 큰 연회에 집중되었고, 그들의 옷은 보석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영주나 왕들은 군대의 중추를 이루는 전사들을 후원했다.[note 2] 가문 간의 관계, 충성심, 용기, 명예 등이 점차 부각되었고 귀족들은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서로 반목하거나 협력하기 시작했다.[539] 여성들은 주로 통치자의 부인이자 후계자의 어머니로서 정치와 귀족 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 치하의 갈리아에서는 특히 이러한 면모가 더욱 두드러졌다. 한편 앵글로색슨 사회에서는 나이가 어린 통치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므로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비교적 적었지만, 그대신 수도원의 수녀원장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오직 당대의 이탈리아에서만 남성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40]
농민 사회는 아무래도 귀족들의 그것보다는 훨씬 덜 기록되고 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이 참고한 대부분의 정보는 고고학에 의존한 것인데, 이마저도 9세기 이전의 상세한 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학자들은 이를 보완하고자 상위 계층들의 법전이나 기록을 참고하기도 했다.[541] 이에 따르면, 이 시기의 토지 소유는 그다지 공평하지 못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나누어 가지기도 했으나 이러한 사례는 매우 소수였고, 대개는 영주 및 귀족들이 드넓은 대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면서 귀족 지주가 지배하는 농촌 사회와, 많은 자치권을 가진 농촌 사회가 구분되어 존재할 수 있었다.[542] 일부 농민들은 700개에 달하는 대규모 정착지를 형성하여 거주했고, 다른 일부는 소수의 가족들로 구성된 소규모 정착지에 살았으며, 또다른 몇몇은 시골에 흩어져 있는 고립된 농경지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 과정이 2개 이상 나타나는 지역들도 있었다.[543] 로마 후기와 달리, 자영농과 귀족의 법적 지위 사이에는 급격한 변동이나 단절 등이 없었으며 자영농 가문 중 일부는 군인이 되어 몇 세기에 걸쳐 귀족이 되기도 했다.[544]
중세 초기, 이탈리아의 도시 생활과 문화는 크게 변화했다. 몇몇 도시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로마는 인구가 수십만 명이었던 것이 6세기 말까지 대략 3만 명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일부 건물들은 기독교 교회로 개조되었고 허물어져가는 성벽은 유지보수를 통해 계속 사용되었다.[545] 당대 북유럽에서도 도시가 축소되었고, 시민 기념물이나 기타 공공 건축물들은 종종 새로운 건축 자재를 위해서 파괴되기도 했다. 한편 새로운 왕국의 설립은 때때로 그들이 수도로 선택한 도시의 급격한 성장을 이끌어냈다.[546]
유대인 박해는 이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그전까지 로마의 많은 도시들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지만,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기나긴 박해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통치자들은 어느정도는 유대인 탄압을 완화하거나 아예 없애주기도 했고, 때로는 그들이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하기도 했다.[547]
4~5세기에 걸친 타민족의 이주와 침략으로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는 혼란에 빠졌다. 아프리카의 상품들은 처음에는 내륙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7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나 나폴리와 같은 몇몇 도시에서만 발견될 정도가 되었다. 7세기 말, 무슬림 정복의 영향으로 서유럽에서는 아프리카산 상품이 더이상 발견되지 않았다.[548] 그리고 8세기 중반이 되자 프랑크족과 아랍인 간의 무역이 옛 로마 경제를 대체했다. 프랑크는 목재, 모피, 무기, 노예를 교환하고 아랍 세계로부터 비단, 향신료, 기타 작물, 귀금속 등을 수입했다.[549]
서쪽의 여러 게르만 국가들은 모두 로마와 동로마 양식을 모방한 동전을 만들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금이나 은으로 7세기 말까지 계속 동전을 주조했다. 기본 프랑크 은화는 데나리우스 또는 데니에라고 불렸고, 앵글로색슨 은화는 페니라고 불렸다. 이것들은 서기 7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남유럽권은 금/은화 대신에 구리 동전을 주로 사용했다. 여러 단위로 세분화된 동전들은 발행되지 않았다.[550]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가 동유럽과 서유럽을 통합하는 주요 요소였지만, 이슬람의 북아프리카 정복으로 인해 이 지역 간의 해상 교류가 단절되면서 양측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다. 동로마의 교회는 점점 더 서유럽의 교회와 언어, 관습, 전례 등에서 차이가 커져갔다. 동방 교회는 라틴어 댇신 그리스어를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8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성상파괴주의, 성직자의 결혼, 황제교황주의와 같은 문제들은 양 기독교 세계가 유사점보다 문화·종교적 차이가 더 커지도록 만들었고 신학적·정치적인 견해의 대립을 부추겼다.[551] 1054년,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수위권 및 서로의 우월성을 놓고 충돌했고, 마침내 서로 파문을 선포하면서 양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분열되었다.[552]
로마 제국의 교계제도는 서유럽에서 벌어진 이주와 파괴에서도 대부분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교황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는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750년 이전의 많은 교황들은 동로마 문제와 동방 신학 논쟁에만 대부분 신경을 쓰고 있었다.[note 3] 서유럽에서 교황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일한 지역은 597년 그레고리오 선교회가 파견되어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켰던 잉글랜드였다.[553]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서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먼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활동하다가 유럽으로 건너갔다. 콜룸바 히엔시스(597년)와 콜룸바누스와 같은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학생들을 받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세속적이며 종교적인 저작들을 여럿 저술했다.[554]
중세 초기에는 서유럽에서 수도원주의가 부상했다. 유럽 수도원주의의 형태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막 교부들로부터 시작된 전통 및 사상에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초기 유럽 수도원들은 4세기 파코미우스가 개척한, 이른바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영적인 삶의 공동체 경험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수도원의 이상은 5~6세기 사이에 대 안토니우스와 같은 성인들의 노력을 통해서 이집트에서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555]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6세기 서양 수도원주의에 관한 「베네딕도 규칙서」를 저술하여 수도원장이 운영하는 수도사 공동체의 행정적, 종교적 책임을 자세하게 설명했다.[556] 수도원들은 중세 초기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삶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몇몇 경우에는 강력한 대가문들의 토지 신탁, 새롭게 정복된 지역의 선전 및 왕권 강화, 선교와 성전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겸했다.[557] 또한 이들은 한 지역의 교육과 문해율 증가를 담당한 유일한 시설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고전 라틴어 문학 필사본들 가운데 상당수는 중세 초기의 수도원에서 저술된 것이다.[558][559]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통치자들은 정복 전쟁을 개시하여 자신들의 지배권을 라인 강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넓혔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그들의 전통인 분할 상속제 및 왕위 공동세습제는 왕국의 분열과 내란을 일으키는 주요 요소였다. 때문에 6세기와 7세기에 왕국은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로 나뉘어졌고 7세기가 되자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 간에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560] 한편으로 7세기 중반에 정복 활동이 끝나자, 이전까지 충성심의 보답으로 귀족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던 메로빙거 가문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자 권력은 어느 시점부터 몇몇 가문들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우스트라시아 출신의 궁재였던 피핀 1세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후 그의 가문은 궁재 및 섭정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권력을 세습해나갔다.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 마르텔은 바이에른·알레마니아·아키텐·프리지아를 차례대로 정복하고, 732년에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아랍군을 패퇴시키면서 서유럽의 이슬람화를 결정적으로 저지했다.[561][note 4] 그보다 북쪽의 잉글랜드에서는 여러 왕국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앵글로색슨 침략자들의 후손들은 각각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켄트, 에식스, 서식스를 세웠고(7왕국),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원주민이었던 픽트인과 켈트인의 지배하에 있었다.[563] 아일랜드는 일반적으로 부족 왕국으로 알려진, 훨씬 더 작고 분열된 정치체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는 150개에 달하는 왕국들이 생겨났다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564] 초기에는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했던 노섬브리아가 주도권을 잡았으나, 나중에 오파 왕의 치하에서 급격히 성장한 머시아가 맹주로서 군림했다. 전성기의 머시아는 남동부의 4개 왕국을 관할하여 영향권 아래 두었다.
피핀 3세는 753년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를 장악하고 새롭게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다.[note 5] 768년에 피핀이 사망할 당시, 그에게는 카롤루스와 카를로만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후 형제는 내전을 벌였는데, 후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전자는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 또는 샤를마뉴로 잘 알려진 그는 774년까지 갈리아 전역, 북이탈리아, 작센을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565] 774년 카롤루스는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교황에게 중부 영토를 기부했는데, 이는 교황령의 기반이 되었다.[566][note 6]
800년의 성탄절에 카롤루스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그가 이전 서로마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점과 더불어, 동로마 제국이 아직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를 칭했다는 점에서 중세 역사의 전환점 중 하나로 간주된다.[569] 그는 자신의 칭호가 동로마 황제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면서,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프랑크-동로마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570] 그의 '로마 제국'은 옛 서로마 제국,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규모 농지에 정착한 농민들이었다. 또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 네트워크를 운영했던 옛 로마 제국과 달리, 해양 무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지중해가 아닌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 사이에 존재했다.[569] 그리고 황제가 이동함에 따라 같이 옮겨다니는 순회 궁정, 그리고 백작으로 구성된 약 300명의 제국 관료들이 각 지역들을 감독했다. 성직자와 지역 주교들이 관료로서 활동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순회 검사관이나 행정관 임무를 담당했던 왕국 순찰사들이 관료 역할을 맡았다.[571]
아헨에 있었던 카롤루스의 궁정은, 소위 카롤루스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문예 부흥의 중심지였다. 예술, 건축, 법학, 전례 및 경전 연구의 발전과 함께 문해율이 증가했다. 잉글랜드 수도사 앨퀸은 아헨으로 초대되어 노섬브리아 수도원의 교육을 담당했다. 궁정 업무실에서는 카롤링거체라는 새로운 서체가 개발되어 문자의 발전에 기여했다.[note 7] 카롤루스는 교회 전례의 변화에 관심을 가져 이를 후원하고, 자신의 영토에서 로마식 교회 예배 및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전례 음악의 사용을 장려했다. 이 시기의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종교 및 세속적인 주제에 대한 작품들을 수정, 모방 및 배포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주제와 교과서에 관한 새로운 작품들이 여럿 만들어졌다.[573] 이 시대의 언어학 연구자들은 로마 제국의 고전 라틴어를 교회와 정부의 필요에 맞게 보다 유연한 형태로 수정했다. 이는 나중에 중세 라틴어라고 불리게 되었다.[574]
카롤루스 역시 806년 프랑크 전통에 따라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일찌감치 두 아들이 죽어버리고 경건왕 루도비쿠스(루도비쿠스 1세) 단 한명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실행되지는 못했다. 루도비쿠스 1세의 26년에 걸친 통치 기간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제국에 수많은 분열이 일어난 시기였다. 829년 이후, 제국의 여러 지역들을 장악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들은 수많은 내전을 치뤄야 했다. 결국 루도비쿠스 1세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황제로 삼고 그에게 이탈리아 영토를 수여했다.[note 8] 그리고 나머지 지역은 독일왕 루트비히(루도비쿠스 2세)와 막내 아들인 대머리왕 카를(카를 2세)에게 각각 분할상속하였다. 루트비히는 라인강 너머의 바이에른, 작센, 튀링겐, 알레마니아 등을 장악했고 카를은 아키타니아, 셉티마니아, 가스코뉴, 네우스트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나중에 황제의 손자였던 아키텐의 피핀 2세는 반란을 일으켰고, 루트비히는 이를 틈타 동부 지역 전체를 합병하려 했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이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사망했다.[576]
그가 사망하자 3년 동안 형제들은 내전을 벌였다. 이후 843년에 체결된 베르됭 조약으로 형제들은 영토를 다음과 같이 분할하였다.
이들 사후에 집권한 통치자들은, 프랑크 왕국 전체보다는 자신의 소유한 영토의 특정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9] 그들은 왕국을 계속해서 분할상속했고, 내전이 반복되었으며, 결국에 카롤루스 가문의 내부 결속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577][note 9] 987년에 서프랑크 왕국은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개창하며 프랑스 왕국으로 대체되었다.[note 10][note 11] 동프랑크 왕국은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루도비쿠스 4세)가 사망하면서 카롤루스 혈통이 단절되었고,[580] 카롤루스 왕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콘라트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581]
이제 서유럽에서의 프랑크 헤게모니는 무너졌다. 분열된 제국은 외부 세력들의 위협에 대단히 무력해졌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은 가까이는 유럽 연안에서 멀게는 지중해 연안의 마을들을 습격했고, 심지어는 브리튼과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에까지 진출했다.[note 12] 헝가리의 마자르족은 955년에 레히펠트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584] 사라센(이슬람)은 서지중해의 섬들을 점령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쳐들어왔다.[585] 이들의 침입으로 서유럽은 왕권이 무너지고 정치적 분열의 시대가 열렸다. 카롤링거 제국에서는, 프랑크 왕들이 방위는 지방 귀족들에게 맡긴 채 자신은 바이킹들에게 항복하는 일이 많았다. 지방 귀족들은 그 틈을 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쌓아 나갔다. 잉글랜드는 단호하게 저항해 잠시나마 덴마크 바이킹을 물리쳤지만, 1세기 뒤에 스칸디나비아에서 다시 침입해오자 더이상 피할 수 없었다.[9]
서유럽에서는 카롤루스 대제, 잉글랜드에서는 오파 왕에 의해 이룩된 상대적인 평화는 9세기 들어 바이킹, 마자르인, 사라센의 세 침입자들에게 무너졌다. 이들과 맞서 싸우는 지역 통치자들은 더이상 중앙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근거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9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는 알프레드 대왕이 바이킹의 침입에 대항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나중에 바이킹과 합의하여 노섬브리아, 머시아, 이스트 앵글리아 일부 지역에 덴마크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586] 그리고 10세기 중반이 되자, 알프레드의 후계자들은 노섬브리아를 탈환하고 잉글랜드 남부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다.[587] 한편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키나드 1세가 픽트인과 스코틀랜드인을 통합하여 알바 왕국을 세웠다.[588]
10세기 초에 동프랑크 왕국에서 권력을 잡은 오토 왕조는 최대의 위협이었던 마자르인을 몰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 노력은 오토 1세가 955년 마자르인을 무찌르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962년에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589] 972년에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인정받았는데 이는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동로마 공주 테오파노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590] 이를 계기로 독일은 외적의 침입을 이겨낸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되었으며, 이후 약 300년 동안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나중에 독일 통치자들은 서프랑크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에 신성로마제국의 명칭을 사용하고 이탈리아와 이전 중프랑크 영토를 차지했다.[9] 그보다 더 남쪽의 이탈리아는 10세기 후반까지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으나 오토 3세 치세에 들어 안정기를 맞이하였다.[591] 한편 서프랑크 왕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혼란에 빠져있었고, 명목상으로는 왕이 통치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의 대부분은 지역 영주들에게 넘어가 있던 상태였다.[592]
9세기와 10세기에,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기독교 선교 활동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권력과 영토를 확보한 왕국들이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기원후 1000년이 되면 이 지역의 왕들은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몇몇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지역은 아일랜드, 잉글랜드, 노르망디, 러시아, 아이슬란드 등이었다. 스웨덴 상인과 침략자들은 러시아 대초원의 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고, 860년과 907년에는 각각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도 했다.[593] 이슬람 군대에게 점령당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인들은 처음에는 북쪽의 작은 지역에서 시작했으나,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서서히 남진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레온 왕국 등을 세웠다.[594]
한편, 동로마 제국은 바실리오스 1세(867~886년)와 그의 후계자들인 레온 6세(886~912년), 콘스탄티누스 7세(913~959년)의 치하에서 경제적으로 부흥했다. 상업이 활성화되고 대규모의 사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금이 마련되자, 황제들은 모든 지방을 통합하는 중앙집권적인 행정부를 설립하는 데 착수했다. 또한 군대도 대대적으로 재편되어, 요안니스 1세(969~976년)와 바실리오스 2세(976~1025년)는 제국의 국경을 모든 전선에 걸쳐 확장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제국 궁정은 소위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로 알려진 고전 학문 부흥의 중심지였다. 키리오테스와 같은 작가들은 새로운 찬송가, 시, 기타 문학 작품들을 집필했다.[595] 동서에 걸친 성직자들의 선교 노력으로 모라비아, 불가리아, 보헤미아, 폴란드, 마자르, 러시아가 기독교로 개종했다.[596] 특히 680년에 건국된 불가리아는 전성기에는 부다페스트에서 흑해 연안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강에서 아드리아해까지 이르렀으나[597] 1018년에 마지막 불가리아 귀족들이 동로마 제국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했다.[598]
“ |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창공, 즉 보편적 교회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광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두 광채란 교황권과 왕권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직권입니다. 그러나 낮을 지배하는 태양이 밤을 관장하는 달보다 더 위대하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듯이, 교황이 왕보다 더 위대하고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습니다. | ” |
— 인노첸시오 3세 |
중세 성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럽 국가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통치자들은 각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지속적으로 통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냈다.[599] 헝가리(마자르)나 폴란드와 같은 새로운 왕국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중부 유럽의 주요 국가가 되었다.[600] 특히 전자는 9세기에 일련의 침략을 계속했으나 10세기에 아르파드의 지도 아래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에 정착했다.[601] 한편, 오랫동안 세속적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던 교황은 처음으로 기독교 세계 전역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13세기 초 인노첸시오 3세의 재임 기간 동안 정점에 도달했다.[602] 유럽 내에서 수도사들은 광범위한 교구 성직자망을 만들어 변두리 지역을 기독교화했으며 이단들과 싸웠다. 발트 지역과 핀란드 지역의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려는 북방십자군의 노력으로, 그곳에 기독교 왕국들과 무력 수도집단이 진출하면서 수많은 원주민들이 기독교 유럽 문화에 강제로 동화되었다.[603] 1387년, 유럽의 마지막 이단 국가였던 리투아니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부족 공국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황과도 서임권을 두고 대립했다.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했다가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고 교황권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다.[604] 그의 후계자들도 교황과 반항적인 독일 귀족들에 맞서 계속 투쟁했다. 하인리히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이후, 잠시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졌으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집권하면서 다시 안정되었다.[605] 그는 롬바르디아 평원의 부유한 이탈리아 도시들을 굴복시키려 시도하는 한편으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집중했다.[606]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1194년에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가 되었다. 모계 혈통을 통해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한 하인리히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 계속해서 반목했다. 그의 궁정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었는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이단 혐의로 교황청에 기소되기도 했다.[607] 그렇지만, 이들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또한 외부에서도 점차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13세 중반 파괴적인 몽골 침공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몽골은 먼저 키예프 루스의 공국들을 무너뜨린 후 1241년, 1259년, 1287년의 세 차례에 걸쳐 동유럽을 휩쓸었다.[608]
카페 왕조의 노력 덕분에 프랑스의 군주제는 11세기와 12세기에 일 드 프랑스 지역을 근거지로 성장했고,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전까지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을 통제하려 시도했다.[609] 한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1066년 영국 해협을 건너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도 여러 수단을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영토 대부분에 걸친 왕국을 건설했다.[610][611] 다른 노르만족들은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에 정착했다. 1059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훗날 시칠리아 왕국이 될 공국의 기반을 닦았다.[612] 앙주 왕조의 헨리 2세와 그의 아들 리처드 1세 '라이온하트' 치하에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남부의 드넓은 지역을 장악했다.[613][note 13][615][615] 그러나 리처드 사후에 즉위한 그의 동생 존은 1204년 노르망디와 프랑스 북부의 나머지 영토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빼앗겼다.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1215년에 영국에서는 자유인의 권리와 특권을 명시해놓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 제정되었다.[616] 존의 아들인 헨리 3세 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에게 더 많은 권력이 돌아갔고 그에 따라 왕권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617] 이와 반대로, 프랑스 왕권은 12세기 후반과 13세기 대부분에 걸쳐 귀족들로부터 대부분의 권력을 빼앗아오고 더 많은 영토를 왕실령으로 편입하면서 점차 증가했다.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강대국 반열에 올라섰으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618][note 14]
이베리아에서는 반도 북서부에 있던 기독교 국가들이 남쪽의 이슬람 세력들에 맞서 투쟁하고 있었다. 이를 레콩키스타(재정복)이라고 부른다.[620] 1150년경에 기독교 왕국들은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5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621] 이베리아 남부는 처음에는 코르도바 우마이야조 치하에서 계속 통제력을 유지했으나, 1031년에 타이파라고 불리는 여러 토후국들로 나뉘어졌고[620] 이들은 12~13세기에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흥한 무라비트 왕조와 무와히드 칼리파국이 이 지역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다시 확립할 때까지 기독교도들과 힘겹게 싸워야 했다.[622] 이슬람 세력의 쇠퇴와 함께 레콩키스타도 탄력을 받았고 마침내 1248년에는 이베리아 남단의 주요 이슬람 거점이었던 세비야가 함락되었다.[623]
11세기 초, 셀주크 튀르크가 아바스 칼리파의 비호 아래 중동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1071년에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는 약탈을 일삼는 튀르크인을 요격하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오히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자신도 포로로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그 뒤로 셀주크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소아시아의 인구·경제 중심지들을 장악했고, 룸 술탄국을 세워 동방 기독교 세계를 위협했다.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 아래 동로마 제국은 이전에 입은 피해의 상당 부분을 복구할 수 있었지만, 소아시아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고 대체로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해야 했다. 한편 셀주크 튀르크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으며,[625] 발칸 반도에서는 불가리아가 재건되어 동로마 제국에게 반항했다.[626]
십자군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동방의 기독교도들을 도와야 한다며 제1차 십자군을 선포했다. 교황청은 십자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저지른 죄를 사하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에 자원했다. 1099년, 유럽 전역의 각계각층에서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방으로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을 점령했다.[627] 십자군들은 성지로 가는 도중에 현지에 있던 유대인들을 대거 학살하기도 했다.[547] 특히 쾰른, 마인츠, 보름스의 유대인 공동체들과 센강~라인강 사이의 유대 도시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628] 십자군 전쟁의 부산물로서, 수도주의와 성전주의를 결합한 성전기사단 및 구호기사단 등의 기독교 단체가 생겨났다.
십자군의 성지 정복 이후, 레반트에는 그들이 세운 십자군 국가가 생겨났다.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십자군 국가들은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특히 1187년에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유럽 국가들은 제3차 십자군을 조직하여 이에 맞섰다.[627][629][630] 그러나 이후의 십자군은 당초의 목적과는 비교적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은 성지가 아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그곳에 라틴 제국을 세워 동로마 제국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631] 동로마 제국은 1261년에 다시 도시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이전의 성세는 온데간데 없었고 이후로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632] 1291년까지 모든 십자군 국가들이 본토가 점령당하거나 강제로 축출당하였지만, 키프로스 왕국만은 이후 몇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633]
교황들은 레반트 이외에도 스페인, 남프랑스, 발트해 연안 등 다른 지역에서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는 것을 장려했다.[627] 스페인의 십자군 전쟁은 특히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던 재정복 전쟁(레콩키스타)와 합쳐졌다. 성전기사단 및 구호기사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여기에 참여했고, 스페인 본토에서 이와 비슷한 기사단 조직들이 설립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2세기 초에 설립된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산티아고 기사단이다.[634] 북유럽은 11세기가 지날때까지 기독교의 영향을 대체로 받지 않았으나,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북방십자군의 일환으로 또다른 전장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 또다른 수도주의 기사단체였던 검의 형제기사단이 창설되었다. 또다른 기사단체인 튜턴 기사단은 본래는 십자군 국가에서 창설되었지만, 1225년 이후부터는 활동장소를 발트해 지역으로 옮겼고 1309년에는 아예 본부를 프로이센의 말보르크성으로 이전했다.[635]
14세기의 첫 해는 기근으로 시작되었다. 유럽은 1315년에 닥친 대기근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636] 그 원인은 온난했던 기후가 갑작스럽게 하강하면서 농작물들이 다 얼어죽었기 때문이었다.[637] 수확량은 떨어지고 대부분의 경작지가 황폐화되었다. 한편 그 이전인 1313~1314년과 그 이후인 1317~1321년은 정반대로 엄청난 폭우로 인해 농작물 재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638] 14세기 전반에 걸친 연평균 기온의 하락은 광범위한 경제 침체를 초래했고[639] 유럽 각국의 전제군주제 약화와 인구 및 생산성의 하락을 야기했다.
1347년부터 치사율이 높은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맹위를 떨쳤다.[640][note 15] 이 시기에 사망자는 대략 3,500만 명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는데, 특히 도시 지역이 타격이 컸다.[note 16][note 17][note 18] 시골이나 황량한 지역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비교적 드문드문 거주했기 때문에 피해가 덜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모든 서유럽 국가들이 흑사병으로 재정 지출을 늘리면서 경제 위기는 한층 더 심각했다. 이러한 사정은 1250년 호엔슈타우펜 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분열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적으로 불안이 증가하자, 일부 지역에서는 민중 반란이 터져나왔다.[643]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 이탈리아 피렌체와 플랑드르의 헨트 및 브뤼허에서 일어난 반란 등이 대표적이다.[644] 성공한 봉기는 거의 없었지만 그로 인해 국가의 힘은 더욱 약해졌다. 한편 흑사병은 14세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종종 출몰하여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640]
14세기가 끝나갈 무렵, 영국, 프랑스, 이베리아의 아라곤·카스티야·포르투갈 등 유럽 각지에서 강력한 기독교 국민 국가들이 출현했다. 이전의 위험은 왕국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을 한층 더 강화시켜주었다. 많은 통치자들은 왕권을 공고히 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왕실령 영토를 늘렸으며, 가끔씩은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얻었다.[645][note 19] 이 시기에 잉글랜드 의회나 삼부회와 같은 대표 기관들은 과세를 담당하면서 권력을 얻었다.[647]
프랑스 통치자들은 14세기 내내 귀족들의 영지를 빼앗고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시도했다.[648] 그렇지만 그들은 남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왕들의 영지를 얻으려다가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고, 결국 이것이 양국 간의 전면적인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 전쟁이 발발했다.[649][650] 전쟁 초기에, 에드워드 3세(1327~1377년)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흑태자[note 20]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는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고 칼레를 점령했으며 프랑스 대부분을 장악했다.[note 21] 프랑스는 이 패배로 인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지만,[653] 전쟁 후반에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전세를 극적으로 뒤집었으며 1453년까지 남프랑스의 영국 영토를 모두 점령했다.[654] 그렇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반에 이르는 인구가 사라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이와 반대로, 전쟁에서 패배한 잉글랜드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고 많은 반항적이던 지역에 통치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랑스와의 갈등은 이전 잉글랜드에서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 문화를 버리고 독자적인 잉글랜드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655] 백년 전쟁 초기에는 잉글랜드의 장궁이 대활약했으며,[656]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는 유럽 최초로 대포가 사용되었다.[657]
독일에서는 황제를 선출제로 뽑는 오랜 전통으로 인해 세습적이고 강력한 왕조가 등장할만한 배경이 마련되지 않았다.[658] 특히 13세기에는 유력 제후들과 교황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왕위가 공석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1273년에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면서 끝이 났다. 한편, 그보다 더 동쪽에서는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가 강성해졌다.[659] 그리고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재정복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660] 특히 포르투갈은 다른 기독교 왕국들이 왕위 계승 및 기타 문제들로 혼란을 겪는 틈을 타, 15세기 동안 대외적으로 팽창하고 해외 영토를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661][662] 백년 전쟁에서 패한 후에 잉글랜드는 장미 전쟁으로 알려진 내전을 한 차례 겪었다.[662] 전쟁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꺾으면서 막을 내렸다.[663]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는 동군연합이었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하나로 묶어 칼마르 동맹을 출범시켰고, 발트해에서는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무역을 담당하던 연안 도시국가들이 한자 동맹을 창설하여 연합했다.[664] 스코틀랜드는 1328년에 로버트 1세가 교황의 인정을 받으면서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665]
팔레올로고스 황제들은 1261년에 서유럽인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라틴 제국을 제외한 이전 제국 영토의 나머지 부분마저 되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발칸 반도와 흑해, 에게해 연안의 작은 지역들, 그리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지역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발칸 반도의 옛 동로마 영토는 새로이 발흥한 세르비아 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 베네치아가 모조리 점령한 뒤였으며, 또한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술탄국의 멸망 이후 등장한 튀르크계 토후국들이 계속해서 국경을 넘어 동로마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오스만 1세가 건국한 오스만 공국은 14세기 내내 동로마와 맞서면서 계속해서 팽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에 이르렀고, 1366년까지 불가리아를 속국으로 삼은 후에 1389년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에게 승리하면서 발칸 반도의 패자로 떠올랐다. 서유럽인들은 날로 증가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1396년에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666] 마침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면서 길고 길었던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667]
비아랍인 차별 정책을 펼치던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아바스 칼리파국은,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대부분의 이들에게 비교적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용정책으로 인해 아바스 칼리파들은 아랍인, 페르시아인, 튀르크인들의 권력 투쟁에 시달려야 했다.[668] 그리고 종교적인 관용정책은 대제국을 운영하는 데에 드는 세수를 계속 감소시켰다.[669]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통합성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는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 독자적인 정권이 세워졌고, 아바스 칼리파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인정해야주어야 했다. 가장 먼저 칼리파 체제로부터 이탈한 이슬람 정권은 호라산에 세워진 타히르 토후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사파르 토후국, 사만 토후국, 가즈나 왕조 등이 차례차례 들어섰다.[670]
근대라는 시대 구분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는 17세기 이후 일어난 구체제의 붕괴와 산업혁명을 통해 형성된 민족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의 형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흐름이다.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의 형성과 민주주의의 발전 등이 근대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671] 그러나 근대라는 용어가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제3세계에 대하여 이러한 서양의 근대 특성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각 시기의 정권이 얼마나 이러한 기준에 도달하였는지"를 보는 것이고, 그 결과 근대의 각 요소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분리하여 민주주의를 경제성장의 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보다 경제성장을 우선시 하는 것이 "근대화"라는 몰역사적 근대 인식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기도 한다.[672] 이에 따라 식민지 역시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연관된 세계로 파악하여 식민지 근대를 이룬다는 시각이 있다.[673]
이 시기에 유럽 강대국들과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역들은 나머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식민지화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또한 새로운 현재적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하고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674][675]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모더니즘 광풍이 서유럽과 북미를 넘어 전세계를 휩쓸었고 몇몇 지역에서는 서구에 반대하는 운동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개인주의, 자본주의, 도시화, 기술 및 정치적 진보의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 전통적인 종교 및 윤리의 쇠퇴는 유례없는 전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에 대한 많은 반대가 있었다. 낙천주의와 끊임없는 진전에 대한 믿음은 가장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여 비판받았고,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탈식민지론이 대두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근대의 기준과 달리 중세 이후 역사를 구분하기 위해 근세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를 근세로 본다.[676] 일본의 경우 16세기 이후 19세기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를 근세로 보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및 에도 시대에 해당한다.[677]
15세기 이후 영국의 산업발전과 고전경제학의 성립, 그리고 산업혁명은 서양의 근대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와 더불어 대항해 시대이후 서양의 지리 인식 확장과 아메리카 식민지 및 인도의 유럽 경제 편입은 이후 제국주의 팽창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구체제가 붕괴되고 국민국가가 출현하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명예 혁명이후 유럽에서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678]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의 발달로 역사상 유래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게 된 유럽의 각국은 세계 각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갔으며 19세기 무렵에는 세계의 대부분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국가들)이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같은 이른바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다.[679] 서구의 동아시아로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있어 종교는 빠질 수 없는 한 축이다. 특히 프랑스는 유독 선교사의 보호와 선교 자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프랑스 국내에서는 가톨릭의 영향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식민지나 포교지에서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가톨릭 선교를 지원 · 보호정책을 취하였다.[680] 그리고 이 식민 해외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던 서유럽 열강 7개 나라 속에서 자금적 패권을 행사했던 배후에는 로스차일드 가문 같은 유럽의 유대계 재벌 가문이 포함되어 있다.
“ | 만일 불타는 꿈속에서 / 그가 실려가는 마차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 ……/ 독가스 찬 폐 속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 …… /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 그 오래된 거짓말 말일세 /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 ” |
— 윌프레드 오언, 《고귀한 영예》, 인류이야기 현대편 1에서 재인용[681] |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범슬라브주의, 범게르만주의와 같은 민족주의가 작용하여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번졌다. 1차 대전은 전 지구상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난 세계대전이었으며 총력전, 참호전, 대량 학살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 때의 전쟁으로 탱크, 독가스 등의 신무기들이 발명되었으며, 이전까지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었고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682]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연방이 세워졌다. 이 후 소비에트 연방은 20세기 말 붕괴될 때까지 서양의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하는 양대 세력 중 하나로 존재하였다.[682][683]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가 일어난 검은 목요일이후 자본주의 세계는 유래 없는 공황을 맞이하였다. 미국에서는 대 공황에 대한 대처로 케인즈주의와 함께 관세를 최대 48%까지 올리는 스무트-홀리 관세 법안이 통과되었다.[684] 이로써 자유 방임 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를 대체하여 케인즈의 이론에 따른 뉴딜 정책과 같은 수정 자본주의가 대두되었다.[685] 또한 이 사건으로 세계의 경제는 잠시 후퇴하였으며, 독일과 일본은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 점점 제국주의로 흐르면서 다시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붕괴된 세계 경제는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사상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독일 나치의 지지율과 실업률 사이에는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었다. 독일 나치의 총통 히틀러는 군대를 늘려 실업률을 떨어뜨렸다.[686] 또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물자가 풍부한 영국, 미국 등의 식민지를 빼았으려고 하는 추축국을 결성하고 미국, 소비에트 연방, 영국 등이 식민지를 지키려는 연합국을 구성하면서 세계는 두 편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이유로 연합국이 추축국에 전쟁을 선언해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일본 제국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 위해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대전에 합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는 베를린 함락, 태평양에서는 원자 폭탄의 투하와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 추축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패망하였고 세계는 유엔을 결성했다.[687]
현대는 현재의 정치 체제하의 시대와, 현재의 국제 사회 체제하의 시대를 가리키는 역사 개념이다. 2011년 현재 "현대"의 시작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5월 8일 독일의 항복, 9월 2일 일본의 항복), 1989년 냉전 종식 (동유럽 혁명)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하였다. 이들 국가중 상당수는 냉전 시기 비동맹주의를 고수하였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과 떨어진 다른 세계라는 의미의 제3세계로 불렸다.[688] 제3세계라는 용어는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한 오늘날에도 남북문제와 같은 경제 관계에서 여전히 관용적으로 사용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전지구적인 전쟁의 위험을 줄이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유엔을 결성했다. 최초 회원국은 51개 국이었으며 현재 193개 국이 가입되어 있다.[689] 한편으로 종전 후 수십년 동안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점령했던 식민지들은 때로는 독립권 부여나 자체 투쟁으로, 때로는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여 하나의 국가로 변모하였다.[690] 그러나 이렇게 새로이 독립한 국가들은 신식민주의, 사회정치적 혼란기, 빈곤과 문맹 등의 난관을 마주해야 했다.[691]
서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위기감 등을 계기로 일종의 정치경제 공동체인 유럽 연합 (EU)을 결성해 나갔으며, 냉전이 끝난 이후에는 동쪽의 구소련 위성국가들도 편압하게 되었다.[692][693][694] 그러나 헌법 제정에 앞서 연합규약을 두었던 미합중국과는 달리, 유럽연합은 그에 맞먹는 정치경제적 공동조직이 미성숙한 덕에 유효성이 보다 떨어진다는 걸림돌을 안고 가야 했다. 한편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도 아세안이나 아프리카 연합과 같은 대륙별 연합체 결성에 잠정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냉전 과정에서 또다른 세계대전을 저지하기 위하여, 혹은 그에 대비하기 위하여 기술 발전에 속도가 붙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정립되어 전시에 긴급상황을 지원하였던 제트기, 로켓, 컴퓨터 등이, 전쟁 이후의 기술발전으로 제트 여객기를 통한 항공여행, 인공위성과 GPS 등의 수많은 응용기술, 컴퓨터를 잇는 인터넷의 발명과 그것으로 촉발된 정보화 시대로 거듭나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이어져왔던, 인류가 자초한 핵무기 위협은 21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핵무기를 새롭게 개발하여 배치하고자 하는 나라들과 그렇게 하지 않도록 막으려는 기존 보유국들 간에 신경전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핵무기를 지닌 국가들 사이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점차 줄여나가자는 서약을 이행하는 데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핵무기가 그것의 사용 대상에게는 물론 보유국에게도 똑같이 위험천만한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695][696]
한편으로 21세기에는 날로 고조되는 경제적 세계화와 통합, 그리고 그 결과로 상호연결된 경제에 딸린 위험성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주된 특징이며,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통한 통신 확대로 경제, 정치, 개인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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