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조선 후기, 대한제국의 정치인, 계몽 사상가, 독립 운동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유길준(兪吉濬, 1856년 11월 21일~1914년 9월 30일)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유길준 兪吉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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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만년의 유길준) | |
조선국 내무협판 (朝鮮國 內務協辦) | |
임기 | 1895년 12월 17일 ~ 1896년 2월 11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섭정 | 총리대신 김홍집 |
이름 | |
별명 |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56년 11월 21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북촌 계동 |
사망일 | 1914년 9월 30일(1914-09-30)(57세)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신장염과 과로, 스트레스의 합병증으로 병사 |
학력 | 미국 보스턴 대학교 1학년 중퇴 |
경력 | 문신, 정치가, 철학자, 개화 사상가 |
정당 | 온건개화파 잔존 후예 |
부모 | 유진수(부) 한산 이씨 부인(모) |
형제자매 | 유회준(형), 유성준(아우) |
배우자 | 초배 경주 김씨 계배 충주 이씨 |
자녀 | 유만겸(장남), 유억겸(차남) |
친인척 | 유각경(조카딸) 유옥겸(조카) 이경직(외할아버지) 윤덕영(사돈) 윤택영(사돈) |
종교 | 유교(성리학) |
유길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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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표기: | 유길준 |
한자 표기: | 兪吉濬 |
개정 로마자 표기: | Yu Gilju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Yu Kilchun |
예일 표기: | Yu Kilcwun |
근대 한국 최초 일본과 미국 유학생이며, 개화파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 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 체포되었고, 전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 조사시찰단과 1883년 미국 보빙사 파견시 수행원 이었으며, 그곳에 잔류하여 조선 최초 유학생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귀국 하였지만 1885년 말부터 7년간 가택연금을 당한다. 이후 김홍집 내각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참여하여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한일 합방 야욕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 활동하고, 흥사단 조직과 1909년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 의학, 교육 등 신문명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는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했다.[1]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2]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 문하생이었다. 한성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