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1877년 2월 9일)는 고종 치셋 시절에 돈령부 지사 · 경기도 수원부 유수 등을 지낸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규학(朴珪鶴), 자는 환경(桓卿, 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 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박규수 朴珪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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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의 영정 | |
조선의 돈령부지사 | |
임기 | 1865년 8월 ~ 1866년 2월 |
군주 | 고종 이형 |
섭정 | 흥선대원군 이하응 영의정 조두순 |
조선의 경기도 수원부 유수 | |
임기 | 1876년 2월 ~ 1876년 12월 |
군주 | 고종 이형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07년 10월 27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북부 양덕방 계생동계 |
사망일 | 1877년 2월 9일 (71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수원군에서 노환으로 병사 |
국적 | 조선 |
학력 | 헌종(憲宗) 14년(1848)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5위 (42세 때) |
경력 | 홍문관 대제학 의정부 우의정 |
정당 | 노론계 낙론 예하 북학파 후예 성향 개화파 |
본관 | 반남(潘南) |
부모 | 박종채(부) 전주 류씨 부인(모) |
형제자매 | 박선수(친아우) |
배우자 | 연안 이씨 부인 |
자녀 | 박제응 |
친인척 | 연암 박지원(친조부) 이준수(장인) |
웹사이트 | 박규수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상훈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
박규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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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표기: | 박규수 |
한자 표기: | 朴珪壽 |
개정 로마자 표기: | Bak Gyusu |
매큔-라이샤워 표기: | Pak Kyusu |
예일 표기: | Pak Kyuswu |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의 아들이다.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을 계승하는 이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1]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848년(헌종 14년) 42세 때 증광시에 합격해 출사했다. 당시 세도 정치 하에서 비주류였던 북학파 출신으로 요직과 거리가 멀었지만 1862년(철종 13년) 진주민란을 수습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하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했다.[2]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의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까지 줄기차게 개화를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 및 척사파들과 계속 갈등을 빚고 실각했다. 1877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종묘 고종실에 배향된 종묘배향공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