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한국의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1876–1949)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정치인으로 자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1][2]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윤봉길 의거이후 중국 내륙으로 피난했던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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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金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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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1949년) |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 |
임기 | 1926년 12월 14일~1927년 8월 |
부통령 | 이인성 |
전임: 홍진(제8대) 후임: 이동녕(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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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0년 3월 13일~1947년 3월 3일 |
국가 부주석 | 김규식 |
전임: 이동녕(제17대) 후임: 이승만(제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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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로마자 표기 | Kim Ku |
출생일 | 1876년 8월 29일(1876-08-29)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해주목 |
사망일 | 1949년 6월 26일(1949-06-26)(72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조선(1876년-1897년) 대한제국(1897년-1910년) 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1948년) 대한민국 (1948년-1949년) |
본관 | 구 안동 |
정당 |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
부모 |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
배우자 | 최준례 |
종교 | 감리회 |
서훈 | ![]() |
![Thumb imag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5/%EA%B9%80%EA%B5%AC%ED%95%84%EC%B2%B4%28AMJ%29.jpg/640px-%EA%B9%80%EA%B5%AC%ED%95%84%EC%B2%B4%28AMJ%29.jpg)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생활을 하였며[3],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4][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사회에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되고 일제에 의해 국내 연결조직인 연통제가 와해되어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는 등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김구는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뤄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