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언론인)
대한민국의 언론인 (1891–1955)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족고려대(民族高麗大)를 구상한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자 중 한명으로 저명하다. 제16대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의 큰아버지이다.
김성수 金性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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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 | |
임기 | 1951년 5월 17일~1952년 6월 28일 |
대통령 | 이승만 |
전임: 이시영(1대) 후임: 함태영(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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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 장면(국무총리) 허정(국무총리 서리) 이윤영(국무총리 서리) 장택상(국무총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1년 10월 11일(1891-10-11)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55년 2월 18일(1955-02-18)(63세) 오후 5시 25분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32 번지에서 심근염, 뇌일혈,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 |
본관 | 울산 |
학력 |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
경력 | 경성방직 사장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겸 고문 |
정당 | 민주국민당 |
부모 | 김경중(생부) 장흥 고씨(생모) 김기중(양부) 전주 이씨(양모) 공주 김씨 첩실(양서모) |
배우자 | 고광석(사별), 이아주(재혼) |
자녀 | 김상만, 김상석, 김상종, 김상흠, 김남, 김상기 |
종교 | 유교(성리학)→개신교(장로회)→천주교(세례명: 바오로) |
웹사이트 | 인촌기념회 |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1]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2],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