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영
대한제국의 정치인 (1873–1964)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함태영(咸台永, 1873년 12월 11일[1] ~ 1964년 10월 24일)은 대한제국의 법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952년 8월 15일부터 1956년 8월 14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경(子卿), 아호는 송암(松岩).
함태영 咸台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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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1949년) | |
조선의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 |
임기 | 1896년 3월 5일 ~ 1897년 10월 6일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대한제국의 한성재판소 판사 겸 검사 | |
임기 | 1898년 3월 2일 ~ 1899년 3월 5일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이형 |
대한민국의 제2대 심계원장 | |
임기 | 1949년 11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
전임 | 명제세 |
후임 | 노진설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
총리 | |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 | |
임기 |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
전임 | 김성수 |
후임 | 장면 |
대통령 | 이승만 |
총리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2년 10월 22일(1872-10-22) |
출생지 | 조선 함경도 무산군 무산읍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64년 10월 24일(1964-10-24)(92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가 396번지 (고혈압과 노환의 합병증으로 병사)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한성법관양성소 졸업 주오 대학 정치학과 1년 중퇴 평양신학교 졸업 |
경력 | 한국신학대학교 재단 이사장 독립촉성중앙회 최고위원 자유당 상임고문 |
정당 | 무소속 |
본관 | 강릉 |
부모 | 함우택(부), 원주 변씨 부인(모) |
배우자 | 밀양 손씨 부인(사별) 전주 최씨 부인(재혼) 고숙원(삼혼) |
자녀 | 아들 함병철, 함병승, 함병창, 함병서, 함병욱, 함병소, 함병춘, 딸 이름 미상 |
친인척 | 함인섭(손자), 함재봉(손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
함경북도 무산군 출생이다. 1895년(고종 32년) 4월 16일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법관양성소 재학 중인 1896년 3월 5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재직했다. 대한제국 때인 1898년 법관양성소[2]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에서 검사로 법관 근무를 시작했다. 한성재판소 판사 당시에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사건 수사 담당자였다. 그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체포된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관련자들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렸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부통령이 되기도 했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형사국 서기관과 법률기초위원, 1908년(융희 2) 10월 8일 대심원판사 등을 역임했지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 이후 집권층의 의도를 반영하지 않아 파면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1910년(융희 4년) 10월 2일 경술국지 이후 사퇴했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담에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작성했고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19년 3·1 운동 거사 직전 비밀연락에 참여하였으며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만세선언서 등을 운반,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2년만에 가석방되었다. 이후 목회자, 선교 단체, 교육사업 등에 활동하다 1945년 광복 뒤, 이승만의 권고로 인하여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정부 수립 후 법무부장관에 추천되었으나 낙마하였다. 그러나 이후 1949년 제2대 심계원장과 심계관, 1951년 한신대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1951년 5월 16일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2년의 정부통령 선거 때 제3대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통령 퇴임 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을 지냈고 1960년에는 이승만 환국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