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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아카드어: 𒀸𒋩)는 중동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하던 제국이다.[1] 앗수르 또는 앗시리아라고도 한다. 기원전 2450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다시 말해 대략 전·중기 청동기 시대에서 시작해 후기 철기 시대까지 존속했다.[2][3] 시기에 따라 크게 초기 아시리아(2500–2025 BC), 구아시리아 제국(2025–1378 BC), 중아시리아 제국(1392–934 BC), 신아시리아 제국(911–605 BC)으로 나뉜다. 주로 셈어를 사용하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라크·시리아·터키·이란에 옛 영토가 남아 있다.
본래 '아시리아'라는 단어는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며, BC 2000년 경에 세워진 고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아수르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나중에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체, 이집트, 아나톨리아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아시리아 본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체(남부는 바빌로니아)에 해당하며, 니네베를 수도로 삼았다.
아시리아인의 고향은 티그리스강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산악 지방이며 "아슈르의 산(Mountains of Ashu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시리아의 왕들은 세 차례에 걸쳐 역사상 의미 있는 대제국을 형성했는데, 각각 고대 아시리아 제국, 중기 아시리아 제국, 신아시리아 제국(제국 또는 기)으로 분류한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기원전 934년~기원전 609년[4] 또는 기원전 911년~기원전 612년[5]의 신아시리아 제국이다.
아시리아의 중심 도시 아슈르를 위시한 일부 도시들은 기원전 2600년 경에 수메르인들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6세기 말 메소포타미아의 유력 수메르 도시국가 라가시의 에안나툼은 "쏘는 수바르투"를 언급하는데, 이 때 수바르투는 아시리아에 대한 수메르어 명칭이다. 기원전 25세기에는 수메르 도시국가 아다브의 루갈안네문두의 기록에 수바르투가 공물을 바쳤다고 적는다.
초기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6] 아시리아 왕 목록(AKL)은 투디야가 최초의 왕이었다고 전한다. 조르주 루는 투디야를 기원전 2450년경의 인물로 간주한다. 에블라에서 실제로 투디야와 에블라 사이에 맺은 조약이 발굴됨에 따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아시리아 왕 목록에 따르면 투디야의 뒤를 이은 것은 아다무인데, 이는 셈어계 이름인 '아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7] 이후 왕들에 대한 기록은 아시리아 왕 목록을 제외하면 아모리족 왕 함무라비의 가계에 한 번 등장할 뿐인데, 이름들만 베껴온 것으로 본다.
아시리아 왕 목록에서는 처음 17대 왕까지 천막에서 거주했다고 적는다. 이들은 처음에는 반유목민과 같은 생활사를 가지다가, 기원전 21세기 중반쯤에 이르러서는 아슈르에 도시국가를 세울 정도로 도시화되었다.[8]
아카드 제국이 존재하는 기원전 2334~2154년 동안 아시리아는 다른 메소포타미아 내 아카드어족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아카드 제국 밑에 도시국가로서 지배받았다. 사르곤 대왕은 아시리아를 아카드 제국의 북쪽 변방으로 삼았는데, 처음에 수메르어로 "수바르투"라 기록되던 아시리아는 곧 수메르인들이 아카드에 흡수되며 아카드어로 "아즈히눔"이라 기록된다.[9][10][11]
제국이 소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등으로 확장할 때 아시리아와 아슈르는 제국의 종교적 중심지로 거듭난다.[12] 아시리아는 기원전 2350년경 히타이트의 기록에도 등장하여 당시 소아시아와의 교역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리아를 비롯한 아카드 제국의 교역은 쐐기 문자를 소아시아와 레반트 지역에 전파하는데 기여하였다. 사르곤 대왕 치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아시리아에서 아카드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나타나지만, 곧 진압된다.[12]
아카드 제국은 경제적 쇠퇴와 내전으로 내홍을 겪다가 기원전 2154년에 구티족의 침입을 계기로 멸망한다. 구티족이 메소포타미아 남부만 다스렸으므로 아시리아는 이로부터 기원전 2112년까지 독립적 도시국가 상태를 유지한다.
아시리아의 대부분은 기원전 2112년에 설립된 수메르계 왕조인 우르 제3왕조에 소속된다. 수메르인의 지배는 아슈르까지 미쳤으나 니네베가 위치한 북방에는 이르지 못한다. 아슈르는 기원전 2050년까지는 우르 제3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이후로는 제국의 가신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어느 정도 자치권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13][14]
아시리아 제국은 크게 고대, 초기, 중기, 그리고 신(新)아시리아제국의 4기로 분류한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은 이들 중 가장 먼저 존재했던 시기이다.
자치적인 정주 민족의 도시국가로서 아시리아의 첫째 통치자는 기원전 2080년경의 우쉬피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슈르에 동명의 신 아슈르를 위한 신전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이후 술릴리, 키이키아, 아키이아가 그 뒤를 이었는데 키키야가 아슈르에 건물 몇 개를 세웠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다. 우르의 지배자로 알려진 아마르신도 아시리아를 다스린 적이 있다고 본다.[16]
기원전 2025년 경, 푸주르아슈르 1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우쉬피아의 자손인지 아니면 새 왕조의 창시자인지는 불분명하다. 우쉬피아와 마찬가지로 아슈르에 건축사업을 벌였으며, 그 후손들은 '아슈르의 총독'이라는 의미의 '이시악 아슈르'라 불린다. 이 시기부터 아시리아는 카룸이라는 이름의 교역기지를 아나톨리아의 후르리인과 히타이트인의 땅에 확장하기 시작한다.[17] 푸주르아슈르의 후임자는 기원전 2000년경의 샬룸아훔이다. 샬룸아훔은 당대의 사료에서 확인 가능한최초의 왕이다.[18] 그 뒤를 이은 일루슈마는 남쪽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을 정벌한다. 또한 동쪽의 엘람과 서쪽의 아모리로부터 동족을 수호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앗수르에 이슈타르의 옛 신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또 다른 강력한 왕인 에리슘 1세(1973–1934 BC)가 즉위했다. 에리숨 1세는 아시리아 최초의 법전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20] 또한 아나톨리아에서 아시리아 교역기지 카룸을 크게 확장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총 21개의 기지가 새로 세워졌다. 카룸은 주석, 직물, 라피스 라줄리, 철, 안티몬, 구리, 청동, 양모, 곡물 등을 가지고 가 금과 은으로 맞바꾸었다. 에리숨은 또한 수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아시리아에서 아슈르, 이슈타르, 아다드에 신전을 짓는 등 주요 건축 작업을 수행했다.[21]
이러한 정책들은 이쿠눔(1933~1921 BC), 사르곤 1세 (1920~1881 BC), 푸주르아슈르 2세 (1880~1873 BC)의 치세에서도 지속되었다.[22] 나람수엔(1830 - 1815 BC)은 후에 왕이 되는 샴시아닷 1세의 찬탈 시도를 물리쳤지만, 나람수엔의 아들 에리슘 2세대에 찬탈되어 1809년 푸주르아슈르 1세가 세운 왕조가 막을 내렸다.
샴시아닷 1세(1808 ~ 1776 BC)는 본인을 우쉬피아 아시리아의 후손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했으나, 이미 테르카의 통치자였고, 후대에도 외국 아모리족 침략자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북반부, 아나톨리아 동부와 남부, 레반트의 대부분을 제국에 편입시켜 고대 아시리아 제국을 크게 확장시켰고, 지중해 동부 해안까지 서쪽으로 진군했다.[23]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쉬메-다간 1세(1775~1763 BC)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레반트에서 마리와 에쉬눈나에 이르는 땅을 잃었다. 당대까지 보잘것없는 도시 국가였던 바빌론을 제국으로 발전시킨 함무라비와 결혼 동맹도 맺었다.
중기 아시리아의 부상은 미탄니에 의해 정복을 당했던 아시리아가 히타이트 왕 슈필루리우마에 의해 미탄니 왕국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시작되었다.
아슈르우발리트 1세(BC 1363~1328)의 통치하에 다시 한 번 독립을 달성하였고, 이 때부터 중기 아시리아의 초기 왕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통합할 수 있었다. 전사 왕 아다드니라리 1세 ( BC 1305 ~ 1274년 재위), 샬마네세르 1세 (BC 1273~1244년 재위 ), 투쿨티니누르타 1세 ( BC 1243~1207 년 재위)의 통치 시대에 아시리아는 중요한 지역 강국이 되겠다는 열망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이 왕들은 사방으로 원정을 벌였고 상당한 영토를 편입했다.샬마네세르 1세때에 미탄니 왕국의 마지막 잔당이 공식적으로 아시리아에 합병되었다.
중기 아시리아 왕 중 가장 성공적인 왕은 투쿨티-니누르타 1세로, 그는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최대 규모로 확장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군사적 업적은 BC 1237년경 니흐리야 전투 에서의 승리로 , 이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히타이트의 영향력이 끝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BC 1225~1216년경 바빌로니아를 일시적으로 정복하기도 했다 .
투쿨티-니누르타는 또한 수도를 아수르에서 멀리 옮기려고 시도한 최초의 아시리아 왕으로, 새로운 도시인 카르-투쿨티-니누르타를 수도로 삼았으나 그의 죽음 이후 수도는 아수르로 환원되었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의 암살 ( BC ) 이후 왕조 간 갈등이 이어졌고 아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의 후계자들은 아시리아의 세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점점 아시리아 중심부로만 국한되었다
아슈르단 1세 ( BC 1178~1133년 재위 ), 아슈르레시이시 1세 ( BC 1132~1115년 재위) , 티글랏필레세르 1세 ( BC 1114~1076년 재위) 등 이 쇠퇴기에 활약한 왕들 중 일부는 쇠퇴를 극복하고 다수의 정복 활동을 하기도 했었지만 정치는 불안정했으며 금세 다시 안정감을 잃었다.
에리바아다드 2세 ( BC 1056년~1054년) 시대부터 아시리아의 쇠퇴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고 중기 아시리아 시대는 저물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힘이 약화되었음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중심부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보호받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게 유지되었습니다.또한 아시리아가 이 세기 동안 쇠퇴한 유일한 국가는 아니었고 아시리아 인근의 다른 나라들도 상당히 분열된 상태였기 때문에 후에 활력을 되찾은 아시리아 군대가 제국의 대부분을 재건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북동부 와 북서부에서 원정을 벌인 아슈르단 2세 ( BC 934~912년 재위)의 통치 하에서 아시리아의 쇠퇴는 마침내 역전되었고 이 후 등장한 열정적인 후계자들 아래에서 더 큰 부흥을 이루었다.
BC 745~727 년경 티글랏-필레세르 3세의 통치 하에 신아시리아 제국은 통합되고 중앙집권화되었으며 상당한 힘을 갖게되었다.
수십 년에 걸친 정복을 통해 초기 신아시리아 왕들은 중부 아시리아 제국의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 BC 883-859년 재위) 치세에 신아시리아 제국은 근동에서 지배적인 정치 세력이 되었다.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9번째 원정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진군하였고 정복의 결과로 다양한 왕국에서 조공을 받았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통치 기간 동안 주목할 점은 아시리아 수도를 옮기려는 두 번째 시도였다.아슈르나시르팔은 아시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고대의 폐허가 된 님루드 마을을 복원했고 BC 879년에 그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지정했다. 아수르는 더 이상 정치적 수도는 아니었지만 아시리아의 의례 및 종교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아들 샬마네세르 3세 ( BC 859~824년 재위) 역시 광범위한 정복 전쟁을 벌이며 제국을 사방으로 확장했다.
샬마네세르 3세가 죽은 후, 신아시리아 제국은 "귀족들의 시대"라 불리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왕이 아니라 강력한 관리와 장군들이 정치 권력을 주로 휘두르곤 했다.
이 침체기는 티글랏-필레세르 3세 ( BC 745~727년 재위) 의 등장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는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토를 통합하고 중앙 집권화했으며 군사 작전과 정복을 통해 아시리아 영토를 두 배 이상 확장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정복은 이집트 국경까지이르는 레반트 지역의 속국화와 BC 729년의 바빌로니아 정복이었다.
신아시리아 제국은 사르곤 2세 ( BC 722~705년 재위) 가 세운 사르곤 왕조 때 그 영토와 세력의 정점에 도달했다.사르곤 2세와 그의 아들 센나케립 ( BC 705~681년 재위)의 통치 하에 제국은 더욱 확장되었고 그 위치 공고해졌다.두 왕 모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사르곤 2세는 BC 706년에 수도를 새로운 도시인 두르샤루킨 으로 옮겼고 그 이듬해 센나케립은 수도를 니네베로 옮겨 야심 차게 확장했다.
기원전 671년 에 사르하돈 ( BC 681~669년 재위)의 통치 하에 마침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시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영토를 확보했다.
아슈르바니팔 ( BC 669~631년 재위) 이 죽은 후 신아시리아 제국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빌로니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남쪽의 바빌로니아를 달래기 위한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르곤 왕조 시대 내내 반란이 잦았다. BC 626년 나보폴라사르가 이끈 바빌로니아의 반란과 BC 615/614년 키아크사레스가 이끈 메디아의 침략이 합쳐져 연합세력이 된 메디아-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하게 되었다 . 아수르는 기원전 614년에 약탈당했고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에 함락되었다.
마지막 아시리아 통치자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서쪽 하란 에서 아시리아 군대를 집결시키려 했지만 기원전 609년에 패배하여 고대 아시리아 왕조와 국가로서의 아시리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하에서 잠시 번영을 누리기도 했으나 사산제국의 침략으로 다시 한 번 아수르는 파괴되었다.
이후 많은 아시리아인들이 기독교화 되기도 했다.
정치적 권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인들은 14세기에 일칸국과 티무르 제국 의 종교적 억압과 학살로 인해 지역적 민족적 종교적 소수 민족으로 전락할 때까지 북부 메소포타미아 인구의 상당 부분을 계속 차지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의 민족주의가 점점 더 커지면서 아시리아인에 대한 추가적인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Sayfo ( 아시리아인 대량 학살)로 인해 무려 250,000명의 아시리아인이 사망했다.이후 아시리아인들의 자치와 독립을 위한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고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추가적인 학살과 박해로 인해 대부분의 아시리아인들은 타국으로 이주하게 되고 흩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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