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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와 유럽 국가들의 안보 동맹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북대서양 조약 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 또는 북대서양 동맹(나토; 영어: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노스애틀랜틱 트리티 오거나이제이션[*], NATO 네이토 /ˈneɪtoʊ/[*]; 프랑스어: Organisation du traité de l'Atlantique nord 오르가니자시옹 뒤 트레테 드 라틀랑티크노르[*], OTAN 오탕[*])은 세계 주요 국제기구 중 하나로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 32개의 회원국들 간의 정치 및 군사 동맹이다. 회원국들은 안보 및 방위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토는 유럽과 북미 양 대륙 간의 정치 및 안보 협력을 위한 독특한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3]
정치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촉진하고 회원국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신뢰를 쌓으며 장기적으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방위 및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한다.[4] 군사적으로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면 무력 대응에 나서게 된다. 이는 북대서양 조약 제5조 또는 유엔 위임에 따라, 단독 혹은 다른 국가, 국제 기구와 협력하여 수행된다.[5]
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제5조에 명시된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집단 방위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6]
나토의 '전략 개념'은 이 군사 동맹의 핵심 문서다. 나토의 가치와 목적, 임무를 재확인한다. 나토는 전략 개념에 대해 "동맹이 직면한 안보 문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나토의 정치 및 군사적 과제를 제시한다"고 설명한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마셜 플랜과 기타 수단을 통해 제공된 원조는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화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협력하기 전에 서로의 안보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다. 유럽 국가들은 안보와 방위 협력을 위해 경제적, 정치적 진보를 병행하여 발전해야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몇몇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은 1948년 브뤼셀 조약 기구(서부 연합)를 창설하고, 1954년 서유럽 연합이 되는 등 더 큰 군사 협력과 집단 방어를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해 모였다.[8] 결국 진정한 대서양 횡단 안보 협정만이 소련의 침략을 저지하는 동시에 유럽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고 정치적 통합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많은 논의와 논쟁 끝에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이 체결되었다.[9][10][11] 조약의 핵심조항, 제5조에 대해 동맹국들은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과 각 동맹국은 공격에 대응하여 "무력의 사용을 포함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제2조와 제3조는 공격 위협에 즉각 대응하지 않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3조는 동맹국 간 군사대비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고, 제2조는 동맹국이 비군사적 협력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어느 정도 허용하게 했다. 북대서양 조약의 체결로 동맹국이 생겨났지만, 그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군사 구조는 이때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는 1949년 소련의 핵무기 실험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소련의 의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대격변을 맞이하였다. 나토는 곧 파리 로켄쿠르 본부(1951년-1967년)에서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와 통합 지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SHAPE의 초대 사령관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군은 파리에 상설 민간 사무국을 설립하고, 헤이스팅스 이스메이를 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12]
지속적인 원조와 안보 보호 혜택으로 서유럽의 정세는 점차 회복되었고 전후 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유럽의 정치 통합은 이제 막 첫 번째 고비를 넘은 것이었다. 1952년에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1955년에는 서독이 동맹에 가입했다.[13] 서독의 나토 가입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을 맺었다. 이후 유럽은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긴장이 고조되었다.[14] 이 시기에 나토는 소련이 공격하면 핵무기로 대응한다는 "대량 보복"이라는 전략적 교리를 채택했다. 이 교리의 의도는 어떤 공격이 아무리 작더라도 완전한 핵 교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동시에, "대량 보복"은 동맹국들이 대규모 재래식 군대의 규모를 감소하고 경제 성장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동맹은 또한 군사적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할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동맹의 창립 이후, 특히 소규모 동맹국들은 더 큰 비군사적 협력을 주장해왔고, 1956년 가을 수에즈 위기는 일부 회원국들을 분열시키는 등 정치적 협의의 결함을 드러냈다. 게다가, 나토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과학적 협력 도중 1956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위성을 발사하자 동맹국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세 현인'이라고 불렸던 노르웨이, 이탈리아, 캐나다의 외무장관이 북대서양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는 동맹 내에서 보다 강력한 협의와 과학적 협력을 권고했고, 이 보고서의 결론은 특히 북대서양 조약 기구 과학 프로그램[15]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6]
1960년, 냉전의 긴장은 점차 완화되는 듯 싶었으나 소련의 수상 니키타 흐루쇼프와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등장으로 다시 점화되었다. 존 F.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부터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확대했다. 이러한 불운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10년 후, 주로 방위를 기반으로 하던 조직이 데탕트(détente)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10년 동안, 나토와 SHAPE는 예기치 않게 본부를 이전하게 되었다.[17] 1966년 3월, 프랑스는 나토의 통합군사령부 구조에서 철수할 의사를 밝혔고,[18] 프랑스 영토 내 모든 동맹군 사령부의 철수를 요구했다. 1967년 3월 벨기에 꺄스또에 새로운 SHAPE 본부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10월 나토 본부가 브뤼셀로 이전했다. 다만 프랑스는 나토에 남아 있었고, 적대시에도 동맹국들과 함께 할 의향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프랑스는 이후 평화 유지 작전 동안 동맹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자 중 하나임을 입증했다. 유연성은 항상 나토의 성공의 핵심이었고, 프랑스가 나토의 통합 군사 지휘 체계에서 탈퇴한 것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달리 나토가 회원국들 간의 다른 관점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68년 8월,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체코의 민주화를 좌절시켰다.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침공과 1953년 동독 봉기에서의 군사 탄압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강압적인 태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이 정책의 끝은 장기적인 개혁을 선택하려는 소련의 지도자가 등장한 이후였다.
데탕트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었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동유럽과 서유럽의 더 긴밀한 관계를 통해 유럽의 안정을 장려하고자 하였다. 반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유연적 대응' 전략은 평화 또는 핵전쟁에 대한 '대량 보복'을 대체하는 데 추구하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채택된 '유연적 대응'은 분쟁 발생 시 사전에 군사적 대응을 함으로써 핵 교환을 차단하는 것으로 나토의 전통적인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이 시기에 벨기에 외무장관 피에르 하멜이 1967년 12월 북대서양이사회에 제출한 '동맹의 미래 과제'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나토가 바르샤바 조약국 간의 대화와 긴장 완화를 촉진하는 정치적 노선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나토의 역할은 단순히 현상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해 나가는 것이 되었다.
피에르 하멜의 보고서는 1973년 유럽에서 열린 안보 협력 회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년 후, 회의는 헬싱키 최종법의 협상을 이끌었다. 이 협약은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을 포함한 서명국들이 사상, 종교, 신앙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의 기본적 자유를 존중하도록 했다. 소련 정부는 내부적으로 이 조항들을 경시하여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이내 소련은 자신들이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이념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6]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RSD-10 파이오니어가 유럽에 배치되면서 데탕트 작전은 중단되었다. 소련의 배치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은 "듀얼 트랙" 전략을 내세워 소련과 협상을 지속하면서도 견제를 할 수 있도록 서유럽에 퍼싱 2호와 지상발사 순항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19] 하나 이와 반대로 동맹국들은 군비통제협정을 체결하기를 희망했다.
소련과 합의에 실패한 나토는 1983년 배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내부 불협화음을 겪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수상에 오른 후, 미국과 소련은 1987년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을 체결하여 모든 핵 및 지상 발사 탄도 미사일과 중간 사거리를 가진 순항 미사일을 제거하였고 이는 이제 냉전이 끝나가고 있다는 초기 징후로 간주됐다. 1982년 신생 민주주의 스페인이 나토에 가입했는데 이는 1955년 이후 나토의 첫 신규 회원국이었다.[20]
198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국제 관측통들은 소련 공산주의가 서방과의 정보 및 전략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믿었다. 반체제 인사들은 공산주의 정권의 이념적 지지를 철회했는데, 이는 헬싱키 최종법에 명시된 소련 자체의 표면적인 인권 원칙을 고수하는 데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1980년대 후반,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이전에 억압받았던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와 협상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자, 동유럽과 소련에 민주화의 영향이 점점 커져만 갔다.[21]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평화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고, 동맹국들은 대담해진 시위대가 동유럽 공산주의 정부를 전복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통일된 독일은 중립적일 것인가? 구소련 공화국에서 핵무기는 어떻게 처리 될 것인가? 민족주의가 다시 한번 유럽 정치를 저주할 것인가? 나토가 더 이상 필요로 하는가? 나토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은 실존적이었다.[22]
나토는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안에도 기존의 의무는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공격적인 민족주의의 발흥을 저지하고, 유럽의 민주화와 정치적 통합을 장려할 집단 안보의 기반을 제공할 뿐이었다. 이제 나토에게 '유럽'은 동쪽 확장이라는 목적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와 안보의 통합이 시작되기 전에 유럽 정치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사전에 차단되어야 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유럽은 통일된 독일을 핵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 독일이 재통일되고 이 파괴적인 딜레마는 반복되지 않았다.
1949년과 마찬가지로 1991년에는 나토는 보다 큰 범유럽 안보 구조의 초석이 될 예정이었다. 1991년 12월, 동맹국은 북대서양 협력 이사회를 설립하고 1997년 유럽-대서양 파트너십 이사회로 명칭을 바꾸었다.[23] 이 포럼은 동맹국이 중앙유럽, 동유럽, 중앙아시아 이웃 국가들과 함께 공동 협의를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파트너국들은 나토와의 관계를 안정화, 민주주의, 유럽 통합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의 근간으로 보았다. 1994년, 나토는 6개의 비회원국과 지중해 대화를 시작했고, 이내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모리타니,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가 2000년에 가입했다. 지중해 대화는 더 나은 상호 이해를 통해 지중해의 안보와 안정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협력은 곧 시험대에 올랐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주의와 갈등의 발흥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처음에 동맹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했다. 나중에 이 분쟁은 침략과 민족청소라고 불릴 정도로 폭력적이고 반인류적인 전쟁으로 간주되었고, 동맹은 결국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나토는 범죄를 끝내기 위한 유엔의 해군 금수 조치와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곧 비행금지구역의 시행은 유엔 결의안을 위반하는 중무기에 대한 공습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동맹은 1995년 9월 9일 간의 공중 작전을 수행했고, 이 작전은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해 12월, 나토는 데이턴 평화협정의 이행을 돕고 자생적인 평화를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유엔이 위임한 6만 명의 다국적군을 배치했다. 2004년, 나토는 이 역할을 유럽 연합에 인계했다.
이 과정은 1999년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중요한 이정표에 도달했는데, 폴란드, 체코, 헝가리가 정치 및 군사 개혁 프로그램을 완료한 후 동맹의 정식 회원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토는 확장을 통해 유럽의 민주주의와 안정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4][25][26][27] 그러나 새로운 회원국이 나토에 가입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위기가 터진 상태였다. 1998년 말, 코소보에서 알바니아 분리주의자들과 세르비아 군경의 무력 충돌로 3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위기 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동맹은 78일 동안 공습을 감행했고,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진입하여 이 지역의 민족청소를 중단하는 것을 목표로 38,000번의 출격을 감행했다.[28] 1999년 6월 4일, 나토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군의 철수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한 후 공중 작전을 중단했다. 오늘 날, 코소보군(KFOR)은 그들의 민족적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의 안전한 환경과 이동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을 돕기 위해 코소보에 여전히 배치되어 있다.[16]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의 나토의 경험은 유럽 평화를 강제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무색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나토는 존재만으로도 소련을 단념 시키기에 충분했던 조직이었다. 발칸반도의 개입으로 동맹은 보다 유연하고 반응적인 조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핵 보복에 대한 냉전의 교리는 사라졌고, 그 대신 모든 평화적 수단이 실패한 후, 나토는 북대서양 영역에서 충돌을 멈추기 위한 외교적 및 인도주의적 노력과 함께 군사력을 측정하고 신중하게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나토는 동맹의 목적과 우선순위를 설명하는 새로운 전략 개념을 채택했다.[29] 1991년, 소련이 쇠퇴하자, 동맹은 처음으로 전략 개념을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99년에 이어진 컨셉은 냉전이 끝난 이후 "유럽-대서양의 평화와 안보가 압박, 민족 갈등, 경제 위기, 정치 질서 붕괴,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등을 포함해서 복잡하고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명시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 무역 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테러 공격은 지구 먼 곳의 정치적 무질서가 국내에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동맹국에 보여주었다. 나토는 역사상 처음으로 집단방위조항(제5조)을 발동하였다.[30][31] 이 경우 알 카에다 테러 단체는 아프가니스탄을 산업화된 세계에 분열을 조성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했고, 납치된 항공기를 대량살상무기로 급조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2003년 11월 이스탄불 폭탄 테러,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열차 테러 참사, 2005년 7월 7일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 공격 등 이후 발생한 테러는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민간인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9·11 테러의 여파로 2001년 가을, 나토 동맹국들을 포함한 국가 연합이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자유 작전의 목표는 알카에다의 작전 기지를 파괴하고 가능한 한 많은 알카에다 간부들을 투옥하는 것이었다. 2001년 12월, 탈레반 정권이 전복된 후, 유엔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386호에 따라 카불의 안정과 자생적인 평화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카불 안팎에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배치를 승인했다. 2003년 8월, 나토는 ISAF의 지휘와 조정을 인계받았다.
나토는 계속해서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북대서양-러시아 위원회는 개별 나토 회원국과 러시아가 공동 관심사의 안보 문제에 대해 동등한 파트너로 일할 수 있도록 2002년에 설립되었다. 2004년, 동맹은 더 넓은 중동 지역의 국가들에 실질적인 양자 안보 협력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이스탄불 협력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2004년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2009년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 북마케도니아가 동맹을 가입했다.[32][16]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동맹국들은 나토의 군사력이 평화와 안보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봐 왔다. 이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적어도 평화를 '만드는 것'만큼 어려워졌다. '안보'의 개념은 불안정성과 민족국가 실패에 의해 야기된 살인적인 극단주의로부터의 개인의 자유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예로 2011년 유엔 명령 하에 나토가 자국 정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비아 내전이 있었다.[33] 당시 리비아 보안군이 민주화 시위대에 가한 무력 진압은 국제사회가 단결할 정도로 잔혹했다.
성공적인 평화 유지에는 안보의 기준선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대화에도 기반을 제공해 줬다. 하나 이 임무는 나토의 역량을 넘어섰고, 동맹국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토는 일관된 국제적 대응의 일부라면 상당한 지원을 할 수 있었겠지만 민간 재건에 대해 나토는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2010년에 합의된 새로운 전략 개념에서, 동맹은 '모든 위기 단계 – 과거, 현재, 미래'를 다루는데 전념했는데, 이는 안보에 대한 더 큰 역할을 암시하는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포괄적 접근'의 핵심 개념이 됐다.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은 군사, 외교, 분쟁 후 안정화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복잡한 해결책을 요구한다. 국제 행위자들의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동맹만이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제공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동맹은 지중해, 중동, 심지어 태평양 지역 국가들과 안보 파트너십을 발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관 설립, 통치 방식 개선, 산업 개발, 사법 개혁 등을 관할하는 국제 기구와 비정부 기구에도 손을 내밀었다. 프리슈티나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든, 지중해의 안보를 확보하든, 아프리카 연합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든, 나토는 계속해서 시민사회의 재건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국제 기구들과의 협력을 늘려왔다.[34]
그러나 평화구축이 21세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불법 합병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부정당하고 명분 없는 공격은 나토의 핵심인 집단방위원칙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35] 이것은 시리아 내전에서 ISIL의 부상과 테러리즘으로 많은 대륙에서 재앙과 같은 현실이 되었던 것과 연결된다.[36] 한편, 민족과 종교 분쟁, 인구 감소, 경제 침체와 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들로부터 이주민들이 분쟁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으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37][38] 사이버 공격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점점 더 파괴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와 수많은 수단을 통해, 자유주의 사회의 반대자들은 가짜뉴스와 선전을 퍼뜨리면서 나토가 항상 보호하고 촉진하고자 했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39] 전반적으로 현재 안보 상황은 나토가 대응하기에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9년 나토 창설 이래, 동맹의 유연성은 조약에 내재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요구 사항에 유연적으로 대응'하라고 설명하고 있다. 1950년대에 동맹은 집단 방위 체제로서 순전히 회원국들의 집단 방위 및 자유민주주의 가치 수호를 목표로 했다. 반면에 1960년 나토는 데탕트를 위해 정치적 도구가 되기도 했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동맹은 집단 안보 체제로서 새로운 파트너국과 동맹국의 통합으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안보를 위한 도구가 됐다.[40] 21세기에 나토는 점점 더 많은 새로운 위협에 직면해 있다. 대서양 횡단 평화와 자유의 초석으로서, 나토는 이러한 도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41]
냉전 기간 동안 나토에 의해 수행된 군사 작전은 없었다. 냉전 종식 후, 쿠웨이트 침공으로 1990년 앵커가드 작전과 1991년 에이스가드 작전이 시행되었다 .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공중조기경보기가 파견되었고, 이후 신속대응부대가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42]
냉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가 해체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4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개입은 1992년에 시작되었다. 1992년 6월, 나토 외무장관들은 유럽 안보 협력 회의(이후 유럽 안보 협력 기구로 개명)에 따라 평화 유지 작전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달 후인 1992년 7월, 나토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13호와 제757호의 무기금수조치와 유고슬라비아의 제재 조치를 위해 아드리아 해에서의 작전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1992년 10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81호에 따라 나토의 AWACS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면서 작전을 모니터링했다. 그리고 11월에 나토와 서유럽 연합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87호에 따라 부과된 제재와 금수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연말까지 나토는 유엔의 권한 아래 평화 유지 작전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43]
유엔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상공의 비행금지구역의 시행을 승인한 후, 나토는 1993년 4월에 비행 거부 작전을 개시했다. 1994년 2월 28일, 나토의 첫 번째 군사 교전에서 비행 금지 구역을 침범한 4대의 전투기가 나토 항공기에 의해 격추되었다.[44]
나토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지상에서 유엔보호군(UNPROFOR)에 근접 공중지원을 하고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대를 보호하기 위해 공습을 단행했다. 적 전차, 탄약고, 방공 레이더와 같은 목표물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다.[44][45]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 이후, 8, 9월에 나토의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대한 공중 작전은 평화 협정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줬다.[46] 이 작전은 12일 동안 지속되었고, 이는 전쟁 양상의 변화를 불러왔다.[47][48] 이는 또한 평화 협정을 협상하는 것이 전쟁을 계속하는 것보다 더 이득이 있다는 것을 보스니아 세르비아 지도부이 깨닫는 데 도움이 됐다.
1995년 12월 14일,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협상을 마친 후,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기본 협정이 조인되었다.[46] 데이턴 평화 협정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체로서 하나의 민주적이고 다민족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43]
실행군(IFOR)은 동맹의 첫 번째 주요 위기 대응 작전이었다.[49] 데이턴 평화 협정의 군사적 측면을 이행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나토가 UNPROFOR로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의 군사 작전에 대한 책임을 넘겨받았다. IFOR의 목표는 1996년 9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선거로 사실상 완료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여전히 불안정하고 민간 부문에서 달성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토는 1996년 12월부터 새로운 안정화 부대(SFOR)를 배치하는 데 합의했다.[43]
2004년 6월 이스탄불 정상회담에서 나토 정상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주변 지역의 안보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연말까지 SFOR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50]
SFOR의 임무는 2004년 12월 2일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 대신, 알테아 작전으로 알려진 유럽 연합 주도의 군대가 배치됐다. 동맹은 2+4 조약(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에 따라 유럽 연합 임무에 대한 계획, 군수 보급 및 지휘 지원을 제공했다.[43]
사라예보 본부는 2004년에 설립되었고, 본부의 주요 역할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국방 구조 개혁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나토의 평화를 위한 동반자국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참여하기 위한 요구사항을 충족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했다.[51]
사라예보 본부는 대테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지원, 전쟁범죄로 기소된 사람들의 구금, 유럽 연합과의 정보 공유와 같은 특정한 임무를 수행했다. 사라예보 본부는 유럽 연합의 작업을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52][43]
나토는 1999년 6월부터 코소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코소보에서 평화 지원 작전을 주도해 왔다.[53]
코소보군(KFOR)은 1999년 6월 12일 78일간의 공중전 끝에 코소보에 배치되었다.[54] 이 공중 작전은 1999년 3월 당시 전개되고 있던 인도주의적 재앙을 멈추기 위해 개시되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이 진행되었기에 프랑스에서 반발이 있었다.[55]
KFOR은 1999년 6월 10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244호가 채택되고, 나토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간의 군사 기술 협정에 의해 배치되었다. 6월 12일 나토가 이끄는 코소보군(KFOR)의 첫 번째 부대가 코소보에 진입했다. 6월 20일, 세르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KFOR은 처음에 나토의 회원국과 비회원국 출신의 약 5만 명의 남녀로 구성되었다. 2002년 초까지 KFOR은 약 39,000명으로 감소했다. 개선된 안보 환경 덕분에 나토는 2003년 6월까지 KFOR의 병력을 26,000명으로 감소했고 2003년 말까지 17,500명으로 감소했다. 오늘날, KFOR은 약 3,7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KFOR은 코소보의 모든 사람들의 안보와 이동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56]
시간이 흐르면서 안보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나토는 KFOR의 병력의 임무를 축소하고 유연한 병력으로 점차 조정해 왔다. KFOR 병력에 대한 모든 조정은 북대서양이사회의 의결에 따라 결정된다. KFOR은 안정적, 민주적, 다민족적인 코소보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 유럽 연합, 나토 그리고 다른 국제적 협력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57][58]
코로나19가 유행하자 코소보의 기관들은 빠르게 대응하여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았다. 코소보군사령부(COMKFOR)는 KFOR의 핵심 임무의 지속을 보장하면서 코로나19로부터 KFOR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59] KFOR은 코소보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57] 특히 KFOR은 유럽연합법치임무단(EULEX)에게 코로나19 검사를 위한 의료 시설 공유와 물품 지원을 했다.[60][61]
몇 년간 안보 환경은 꾸준히 개선되었고, 2009년 6월 11일부터 12일까지 나토 방위장관들은 KFOR 주둔군의 목적을 '전쟁 억제'로 조정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2월 3일부터 4일까지 이스탄불에서 열린 비공식 회의에서 나토 방위장관들은 KFOR이 전쟁 억제라는 '1번 게이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병력을 10,200명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토는 2010년 10월 29일 북대서양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총 5,000명의 병력까지 감소시키는 '2번 게이트'를 시행할 준비를 했고, 2011년 2월 28일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62][63]
향후 코소보에서 KFOR의 병력을 더 줄이기 위해서는 북대서양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동맹국들은 병력 감소를 하기 위해서는 현장이 잘 유지되고 향후에도 긍정적일 것이라는 조건이 뒤받쳐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왔다.
이와는 별개로 코소보의 안보 환경이 개선되면서 나토는 KFOR의 보호를 받는 종교 및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를 코소보 경찰에게 책임을 이관할 수 있게 되었다. 2013년 말까지 KFOR는 가지메스탄 기념비, 아르칸젤 유적지, 그라카니차, 조키스테, 부디사브치, 고리오크, 데빅 수도원, 페크 총대주교 수도원에 대해 특별 지위를 부여했다. 현재 데카니 수도원만이 KFOR의 보호를 받고 있다.[60]
나토는 KFOR에 할당된 업무 외에도 코소보의 안보 조직과 함께 능력 개발 이니셔티브를 수행했다. 이 활동은 코소보 정부의 민간 주도 기구 설립을 감독하기 위해 2016년에 창설된 북대서양 조약 기구 자문단(NALT)에 의해 운영된다.
NALT는 나토 국제 참모국에게 직접 보고하는 절차를 가진다. 현재, NALT는 13개의 회원국과 파트너국에서 온 약 45명의 군인과 민간인으로 구성돼 있다. NALT는 코소보의 안보 조직들에게 물류 조달, 재정, 군대, 리더십 개발과 같은 분야에서 실질적인 지원과 조언을 제공한다. NALT는 전략과 계획, 임무 작전, 지원과 같은 세 가지 목표에 따라 설계되었다.
NALT는 2016년 12월 북대서양이사회가 승인한 코소보와의 '향상된 상호작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향상된 상호작용은 공정한 환경, 사이버 환경, 공공 외교 및 과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64]
2013년 4월 19일, 베오그라드와 프리슈티나에서 유럽 연합의 주도 하에 1차 관계 정상화를 위한 통치 원칙 협정에 대해 논의했고, 2013년 5월 22일 시행 계획이 합의되었다.[65] 나토는 이 협정을 체결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고, 동맹국들은 이 협정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 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베오그라드와 프리슈티나에서 유럽 연합이 주최하는 정상 회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대화는 나토와 유럽 연합 사이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해결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대화는 서부 발칸 반도에서의 협력에 새로운 탄력을 넣어 주었다.[66] 2013년 6월, 유럽 이사회는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안정화 연합 협정(SAA)을 체결하였다.[67][68] SAA 협정은 2015년 10월 27일에 체결되었고 2016년 4월 1일에 발효되었다. 나토는 베오그라드-프리스티나 협정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으며, KFOR은 현재 관할 지역의 평화와 안전의 환경을 보장함으로써 협정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60]
지난 20년 동안, 동맹국과 파트너국들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위임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배치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에 대한 9/11 테러 공격 이후 아프가니스탄이 동맹국을 공격하는 일이 또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동맹국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 공격은 없었다.
2020년 2월, 미국과 탈레반은 2021년 5월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연합군을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2021년 4월, 나토 외무장관들은 몇 달 안에 모든 동맹군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69]
2021년 여름, 나토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아프가니스탄군의 붕괴에 따라 동맹국과 파트너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뒀다.[70][71][72]2021년 8월, 카불 공항 테러로 나토에서 일하는 약 2,000명의 아프가니스탄인과 그 가족을 포함한 120,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한순간에 집을 잃었다.[73] 이들 중 다수는 이미 동맹국과 파트너국에 재정착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토는 동맹국과 파트너국과 협력하여 주거 시설, 물자 원조 등 난민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74][75]
국제안보지원군(ISAF)은 아프가니스탄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요청과 유엔의 명령에 따라 창설되었다. 나토는 2003년 8월 부대의 지휘를 맡기로 합의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ISAF의 작전 범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도록 명령했다.
ISAF는 역사상 가장 큰 국제연합군 중 하나이며 나토에게 가장 길고도 험난했던 임무였다. 최대 병력은 13만 명 정도로 모두 동맹국과 파트너국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002년 창설된 아프가니스탄군은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국가경찰(ANP)은 범죄 수사, 교통 통제 등 치안과 반란 저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역량을 키워 왔다. 아프간 공군 또한 가용한 인력과 장비를 늘리면서 지속적으로 역량을 키워 왔다.[76][77]
2009년 11월에 개시된 나토 아프간 훈련지원 임무(NTM-A)는 소규모의 투자에 비해 상당한 성취를 단기간에 이루었다. ISAF-ANSF 파트너쉽 프로그램은 아프간 부대에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교관과 리더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고무적인 결과를 냈고, 멘토 역할을 수행하는 교관과 지휘관을 ISAF에서 ANSF로 점진적으로 교체할 예정이었다. 다방면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리더십, 수송, 인프라, 부패, 장비 및 무기 관리 등의 분야에서 많은 도전과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아프간군이 독자적으로 치안을 담당하기까지는 보다 오랜 시간과 자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지배구조 및 사법 개혁 노력의 실패로 아프간군 훈련 프로그램의 진전이 후퇴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아프가니스탄군의 독자적 임무 수행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지원이 불가피해 보였다.[78][79]
2011년 아프가니스탄군의 독자적 안보 책임으로의 점진적인 전환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은 2014년 12월 ISAF의 임무가 종료되고 아프가니스탄군이 자국에 대한 모든 안보 책임을 지게 되면서 예정대로 완료되었다.[80]
ISAF는 의료, 보건, 교육, 거버넌스, 농촌개발 분야에서 지방재건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프가니스탄은 10년 동안 ISAF의 임무를 통해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률을 보여줬다. 산모의 사망률은 낮아지고 기대수명은 증가했다. 대중 매체에서는 다시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부가 안정화 된 후, 2014년 대선을 포함해 2004년 이후 5차례 선거주기에 걸쳐 수백만 명이 투표권을 행사했다.[81]
2014년 12월, ISAF은 해체되었고 후속 훈련인 확고한 지원 임무로 대체되었다.[80][82]
2015년 1월 1일 시행된 확고한 지원 임무(RSM)는 아프가니스탄군에게 훈련과 자문, 지원을 제공하고, 반테러 작전과 전투 작전 및 입법 기관 설립을 돕는 것이었다.
2020년 8월, RSM은 36개의 동맹국과 파트너국에서 약 10,000명의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83]
2021년 4월 14일 나토는 5월 1일까지 RSM의 철수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철수가 끝나고 임무는 2021년 9월 초에 종료되었다.[69]
나토 이라크 임무(NMI)는 이라크가 테러 공격으로 안전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고 효과적인 안보 기구와 군대를 보유하도록 돕는 비전투 자문 및 역량 강화 임무이다. 임무는 2018년 7월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따라 개시됐으며, 임무 부대는 2018년 10월에 창설됐다.
NMI는 동맹과 이라크 간 큰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임무이며, 치안 개선, 군사 개혁과 동시에 동맹국과 파트너국들이 훈련과 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과 모범 사례를 제공한다.[84][85]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나토는 미국이 이끄는 이라크 다국적군(MNF-I)과 함께 이라크 안보군의 훈련, 멘토링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86] 이를 나토 이라크 훈련 임무(NTM-I)라고 하며, 이라크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치안 부대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NTM-I는 다양한 환경에서 교육, 조언 및 멘토링 지원을 하며 이라크 안보군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모든 나토 동맹국들은 재정적 기부나 장비 기부를 통해 훈련에 많은 지원했다. 나토는 이라크와의 장기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라크 정부와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87]
2015년 7월, 나토는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따라 방위와 안보 역량 강화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2016년 4월, 요르단에서 이라크인들을 위한 'train-the-trainer' 과정(특정 분야의 개인이 특정 주제에 대한 교육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훈련, 감독 및 감독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는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 실시하기 시작했다.[88] 그 후, 2016년 7월 바르샤바 정상회의에서 나토 정상들은 이라크 내 이라크 안보군과 군대에 나토 훈련과 역량 강화 활동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2017년 1월, 나토는 8명으로 구성된 핵심 부대를 바그다드에 배치하여 이라크에서의 나토 영구 주둔군으로 설정했다. 요르단에 주로 했던 훈련은 2017년 2월부터 이라크로 이관되었다. 이 핵심 부대는 2017년과 2018년 사이 이라크에 제공된 모든 나토의 지원을 조정했고, 2018년 NMI의 후속 설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89]
아덴만, 아프리카의 뿔, 인도양에서의 높은 해적 활동은 아프리카에서 국제적인 인도주의적 노력과 세계에서 가장 분주하고 중요한 해상 항로 중 하나인 수에즈 운하를 드나드는 관문의 안전을 지속적으로 위협해 왔다. 2008년과 2016년 사이에 나토의 활동은 해적들의 공격을 저지하여 선박을 보호하고 이 지역의 보안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90]
2008년, 유엔의 요청으로 나토는 아덴만, 아프리카의 뿔, 인도양에서 동맹 제공자 작전과 동맹 보호자 작전으로 해적 소탕을 위해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9년 8월부터 나토는 오션 쉴드 작전을 주도하여 해적들의 공격을 저지하고 교란하는 동시에 선박을 보호하고 이 지역의 전반적인 보안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토는 유럽 연합의 아탈란타 작전에서 미국이 이끄는 연합태스크포스 151을 포함하여 다른 국가들과 긴밀히 협력하였다. 지속적인 국제 사회의 노력으로 해적들의 활동은 점차 잠잠해졌고, 이내 해적들은 잠적을 감추었다. 해운업계들의 대처와 무장 보안팀의 협력은 이런 흐름에 한몫 했다.[91]
나토는 2016년 12월 15일 오션 실드 작전을 종료했다. 그러나 나토는 해적의 위협과 재귀를 인식하고 다른 국제 해적 소탕 전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해양 안보를 지켜 나가고 있다.[92]
2011년 2월, 카다피 정권이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은 데 이어 리비아 국민 보호를 위한 유엔의 국제사회 요구에 나토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2011년 3월, 나토군은 리비아의 공격으로부터 민간인과 민간인 거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금수조치를 시행하였다. 연합수호작전(OUP)은 2011년 10월 31일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93][94]
2011년 3월 22일, 나토는 리비아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시행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리비아에 대한 "무기 및 관련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라는 유엔의 요청에 응했다. 다음 날,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나토 함선은 리비아로 가는 무기와 병력들의 해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나토 해군은 리비아를 오가는 무기, 물자, 병력 등을 수송한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모두 수색했다.
나토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973호에 따라, 2011년 3월 24일 리비아 상공에 유엔이 지정한 비행금지구역을 시행하기로 합의했다.[95][96] 이 결의안은 인도적, 원조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항공편을 제외한 모든 민간 거주 지역을 공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리비아 영공으로의 모든 비행을 금지했다.
2011년 3월 31일, 나토는 리비아에서 모든 국제 군사 활동을 지휘하고 통제했다.[97] 나토의 공군과 해군은 민간인과 민간 거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 위기 동안, 나토는 유엔, 아랍 연맹 등 다른 국제 파트너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군사 행동을 취하기로 한 나토의 결정은 세 가지의 분명한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즉 확고한 법적 근거, 강력한 지역 지원, 입증할 수 있는 필요성에 기반했다.[98][99]
2011년 3월 말, OUP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100]
2011년 4월 14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의에서 나토의 외무장관들과 비나토 파트너들은 민간인과 민간인 거주 지역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때까지 OUP를 진행하기로 합의했고, 카다피 정권은 모든 군대와 준군사조직을 기지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카다피 정권은 리비아 국민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원조에 방해하지 않겠다고 합의했다.[101]
2011년 6월 8일, 나토 방위장관들은 브뤼셀에서 카다피 정권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기로 합의하면서 외무장관들이 제시한 목표를 재확인했다.[102]
8월 22일 트리폴리 해방 이후, 사무총장은 리비아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나토의 약속과 리비아 국민이 자유와 평화 속에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기를 바라며 자신들의 방향성을 재확인했다.[103]
9월 1일, 파리에서 열린 "리비아의 친구들" 회의에서 정상들은 이러한 약속을 재차 강조했다.
9월 16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09년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이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리비아의 민간인을 보호하는 나토의 권한을 다시 드러냈다. 또한 이 결의안은 유엔 리비아 지원 임무(UNSMIL)를 수립했다.[104]
나토의 공습으로 카다피 정권이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정도가 줄어들자,[105][106][107] 나토 방위장관들은 10월 6일 브뤼셀에서 OUP의 종료에 대해 논의했다. 장관들은 위협이 지속되는 한 리비아 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확인했지만, 조건이 허락하는 대로 임무를 종료할 것이었다. 나토 사무총장은 또한 유엔과 새로운 리비아 정부와 함께 작전 종료를 조율할 것을 약속했다.
2011년 10월 20일, 반군이 카다피 정권의 마지막 거점인 시르테를 점령하고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사망한 지 하루 만에 북대서양이사회는 월말에 OUP를 종료하기로 임의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 나토는 계속해서 상황을 감시했고, 항상 민간인에 대한 위협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108]
일주일 후, 북대서양이사회는 OUP를 종료하기로 한 결정을 다시 확인했다.[109] 2011년 10월 31일, 나토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는 작전이 시작된 지 222일 만에 마지막 출격을 마무리했다.[110] 다음 날, 나토 해군은 리비아 해역에서 철수하고 모항으로 돌아갔다.
리비아에서 나토의 역할은 끝났지만, 나토는 리비아 당국이 요청할 경우 국방 및 안보 개선과 부가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분야에서 리비아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있다.[111]
현재 나토는 32개 회원국이 가입해 있다. 이 가운데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 미국은 1949년에 나토를 창립한 초대 회원국들이다. 다른 회원국들은 1952년 그리스와 튀르키예, 1955년 독일, 1982년 스페인, 1999년 체코, 헝가리, 폴란드, 2004년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2009년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 2017년 몬테네그로, 2020년 북마케도니아, 2023년 핀란드, 2024년 스웨덴이 동맹에 가입했다.[32][16]
회원국 실행 프로그램(MAP)은 동맹 가입을 원하는 국가들의 개별적 요구에 맞춘 실질적 조언 및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MAP에 참여한다고 해서 동맹의 향후 가입에 대한 어떤 결정도 미리 판단할 수 없다.[113]
40개 비회원국들은 광범위한 정치 및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해 나토와 같이 협력을 꾀한다. 파트너국들은 동맹과의 대화와 실질적인 협력을 도모하며, 많은 국가들이 나토 주도의 작전과 임무에 기여한다. 나토는 또한 광범위한 국제 기구 네트워크와 협력하고 있다. 이때 파트너국은 회원국과 동일한 의사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114]
파트너십 상호운용성 이니셔티브(PII)는 지난 2014년 웨일스 정상회담에서 나토와 파트너가 수년간 쌓아온 깊은 연결이 유지되고 증진되도록 하기 위해 출범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파트너국은 나토 주도의 임무와 나토 대응군에 대한 향후 위기 관리에 참여할 수 있다.[115]
나토의 임무와 작전에 대한 파트너국들의 참여가 더 야심차고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 맞춤화된 관계가 필요했다. 결국 나토는 기회 향상 파트너를 기반으로 파트너국들의 참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했다.[115]
나토는 다양한 정책, 프로그램, 실행 프로그램 및 기타 협정을 통해 파트너국과의 협력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파트너십 도구와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많은 도구들이 상호운용성, 방위 및 안보 관련 개선 지원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각 파트너는 개별 목표 뿐만 아니라 나토와의 파트너십의 진행 속도, 범위, 강도 및 초점을 조절할 수 있다. 양자 파트너십 문서는 나토와 파트너 협력의 주요 목표를 명시하고 있다. 양자 파트너십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유형이 있다.[116]
개별 파트너십 협력 프로그램(IPCP)은 북대서양이사회와 파트너의 승인을 받아 나토와 긴밀히 협의하여 파트너국이 2년마다 작성하는 표준 문서이다. 모든 파트너국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파트너국과 나토의 이익과 목표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모듈식 구조이다.[116]
개별 파트너십 협력 프로그램(IPCP)을 대신하는 개별 파트너십 실행 프로그램(IPAP)은 파트너국에게 나토와의 협력을 증진시키고 파트너국 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년 단위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방위 및 안보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 문제에 대한 개선 등 큰 범위로 구성되어 있다. IPAP는 나토와 파트너국 간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각 참여국에 의해 수행된 개선 과정에 대해 동맹국들이 매년 보고를 받고 평가한다.[116]
연간 국가 프로그램(ANP)은 나토와 협의하여 매년 파트너가 수행하는 포괄적인 민주주의, 방위 및 안보에 초점을 맞춘 가장 까다로운 문서이다. ANP는 회원국 실행 프로그램(MAP)국들에게 열려 있으며, 북대서양-조지아 위원회는 조지아와 관련된 문서를 담당하고, 북대서양-우크라이나 위원회의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문서를 담당한다. IPCP나 IPAP와 달리, ANP는 국가가 소유하는 문서이며 북대서양이사회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개선 과정에 대한 평가는 매년 수행되며, 북대서양이사회에서 동맹국과 각 참여 파트너국이 논의를 한다.[116]
50개국으로 구성된 유럽-대서양 파트너십 이사회(EAPC)는 동맹국과 파트너국 간의 정치 및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한 대화와 협의를 위한 포럼이다. 나토는 유럽-대서양 지역의 파트너국들과 협력하고,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에 따라 나토와 개별 파트너국들 사이에 발전된 양자 관계를 위해 전반적인 정치적 틀을 제공한다.
지중해 대화(MD)는 지중해 지역의 안보를 중요시하고, 참가국과 나토 동맹국들 간의 좋은 관계와 이해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파트너십 포럼이다.[117]
이스탄불 협력 이니셔티브(ICI)는 보다 광범위한 중동 지역의 비회원국들에게 나토와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장기적인 글로벌 및 지역 안보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파트너십 포럼이다.[118]
나토는 공식적인 파트너십 외에도 이러한 구조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국가들과 협력한다. 이 파트너국들은 새로운 안보 문제를 포함한 상호 관심 분야에서 나토와 협력을 발전시키고, 일부는 군사적 혹은 다른 방식으로 나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119] 다음은 현재 NATO 글로벌 파트너 목록이다: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은 1994년에 설립되었으며 각 파트너 국가와 나토 간의 개별적인 양자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120] 해당 회원국은 독립국가연합의 현재 및 이전의 모든 회원국을 포함한다.[121] 유럽-대서양 파트너십 이사회(EAPC)는 1997년 5월 29일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50명의 참가국들 간의 정기적인 조정, 협의, 대화를 위한 포럼이다[122]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은 유럽-대서양 파트너십의 운영 부서로 간주된다.[120] 아프가니스탄과 다른 제3국들도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구조의 일부 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의사를 표했다.[123]
유럽 연합은 2002년 12월 16일 베를린 추가 협정에 따라 나토와 포괄적인 협정을 체결했다. 이 합의로 유럽 연합은 나토 스스로가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는 조건, 이른바 "우선매수청구권"을 조건으로 국제 위기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경우에 나토 자산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125] 예를 들어, 1982년 리스본 조약의 42조 7항은 "회원국이 그 영토에 대한 무력 침략의 피해자일 경우, 다른 회원국들은 그들의 권한에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한 원조와 책임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약은 전 세계적으로 지정된 영토에 적용되는 반면 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제6조에 따라 북회귀선 이북의 작전에 제한된다. 또한 평화를 위한 파트너십(PfP) 프로그램과 연계된 유럽 연합 회원국들을 위한 "이중 체제"를 제공한다.
나토는 수많은 비 나토 회원국과 협력하고 활동을 논의하고 있다. 지중해 대화 계획은 이스라엘 및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정하기 위해 1994년에 수립되었다. 이스탄불 협력 구상은 2004년에 지중해 대화와 같은 노선을 따라 중동을 위한 대화 포럼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네 국가들이 걸프 협력 회의를 통해서도 연관되어 있다.[126]2018년 6월, 카타르는 나토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127] 그러나 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제10조에 따라 유럽 국가만 추가로 가입할 수 있다고 말하며 가입을 거부했다.[128] 카타르와 나토는 앞서 2018년 1월 안보협정에 함께 서명한 바 있다.[129]
일본과의 정치적 대화는 1990년에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동맹은 이러한 협력 구상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은 국가들과의 접촉을 점차 늘려왔다.[130] 1998년 나토는 공식적인 관계 제도화를 허용하지 않지만 협력을 늘리려는 동맹국의 열망을 반영하는 일련의 일반 지침을 수립했다. 광범위한 논쟁 끝에 2000년 동맹국이 "연락 국가"라는 용어를 동의하였다. 2012년까지 동맹은 "전 세계 파트너" 또는 "글로벌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해적 퇴치 및 기술 교류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임을 넓혔다.[131][132] 연락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도 AUSCANNZUKUS 전략동맹의 회원국으로 연락 국가와 나토 회원국 간의 유사한 지역적 또는 양자적 협정 또한 협력에 도움을 주고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 한국과 긴밀히 협력함으로써 "중국의 부상"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133] 콜롬비아는 나토의 최신 파트너이며 콜롬비아는 나토가 파트너에게 제공하는 모든 협력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콜롬비아는 나토와 협력한 최초와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134]
나토의 가입은 "조약의 원칙을 더 발전시키고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유럽 국가"에게 열려 있
다. 나토는 또한 회원국 실행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데, 이는 가입 희망국들에게 실질적인 조언과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회원 가입을 준비하고 주요 요구 사항을 충족하도록 돕는다.[135]
나토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1개 후보국을 보유하고 있다. 동맹 가입 과정에서 후보국들은 서로를 지원하기 위해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03년에 아드리아 헌장에 서명을 했다.[136] 조지아 또한 후보국으로 지명되었고 2008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정상회담 동안 후보국 약속 받았지만,[137]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지아가 현재 회원국으로 가는 길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반대 입장을 표했다.[138]2018년 북마케도니아는 프레스파 협정에 의해 마케도니아 국호 분쟁으로 그리스에 의해 가입이 차단되었다.[139] 2019년 2월, 북마케도니아는 나토 회원국이 되기 위한 가입 의정서에 서명했고 2020년 3월 27일에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140][141]
우크라이나와 나토 및 유럽 간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으며, 이러한 관계 개선은 2014년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된 '유로마이단' 시위의 목표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내 동유럽의 8개국 중 하나로 개별 파트너십 실행 프로그램에 포함된다.[142] 개별 파트너십 실행 프로그램(IPAP)은 2002년에 시작되었으며, 나토와의 관계를 발전 시킬 정치적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국가들에 개방되어 있다. 2019년 2월 21일, 우크라이나 헌법이 개정되었고, 이는 유럽 연합과 나토 가입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경로에 대한 규범이 기본법, 3개 조항 및 과도 조항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143] 나토 정상들은 2021년 6월 브뤼셀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가 회원국 실행 프로그램(MAP)의 회원국이 될 것이며, 우크라이나가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의 미래와 외교 정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결정을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에서 반복했다.[144] 2021년 11월 3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나토의 우크라이나 주둔 확대, 특히 러시아 도시나 루마니아, 폴란드와 유사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타격할 수 있는 탄도 미사일의 배치는 러시아에게 "레드라인", 즉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145][146][147] 푸틴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나토가 동쪽으로 확장하거나 "러시아 영토와 가까운 곳에 우리를 위협하는 무기 체계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법적 보장을 요청했고,[148]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와 나토 동맹국 30개국만이 나토 가입 준비를 마쳤다. 러시아는 거부권이 없고, 발언권이 없으며, 러시아는 이웃 국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세력권을 설정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149][150]
러시아는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유럽 및 미국 협상가들 사이의 평화적 독일 통일을 허용한 비공식적인 이해와 모순된다고 보고 정치적으로 계속 반대했다.[151] 나토의 확장 노력은 종종 러시아를 포위하고 고립시키려는 냉전 시도의 연장으로 모스크바 지도자들에게 보여지지만,[152] 이는 서방에서도 비판을 받았다.[153] 2016년 6월 레바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8%가 발트 3국과 러시아와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에 나토군을 배치하는 것이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54] 반면 2017년 퓨 리서치 센터 보고서에서 조사된 폴란드인의 65%는 러시아를 "주요 위협"으로 지목했으며,[155] 모든 나토 회원국에서 평균적으로 31% 또한 "주요 위협"이라고 말했다. 2018년 조사된 폴란드인의 67%는 폴란드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선호했다.[156] 2016년 갤럽이 조사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제외한 비독립국가연합(CIS) 국가인 모든 국가는 나토를 위협이라기보다 우호적으로 보는 시선이 더 많았다.[157] 2006년 안보 연구 저널의 한 연구는 나토의 확대가 중부 및 동유럽의 민주적 통합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158]
또한 나토의 확장에 대해 중국도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다.[159]
1989년 유럽 혁명은 나토의 목적, 성격, 과제, 그리고 유럽에 대한 전략적 재평가로 이어졌다. 1990년 10월, 동독은 독일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990년 11월 소련과 파리에서 유럽 재래식 무력에 관한 조약(CFE)을 체결했다. 1991년 2월,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붕괴되고 그해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나토의 실질적인 주요 적대국들이 제거되면서 유럽 전체에 걸쳐 군사 감축이 요구되었다.[160]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은 군사비 지출과 장비들을 감소시키기 시작했다. 유럽 재래식 무력에 관한 조약(CFE)은 서명국들이 다음 16년 동안 52,000개의 재래식 무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합의했으며,[161]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나토 유럽 회원국들의 군사 지출이 28% 감소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162]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 예산의 감소를 우려하여 재정 형평성 약속을 개선하고 재정 지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2014년 웨일스 정상회의에서 방위 투자 서약을 제정하기 위해 만났다.[163][164][165] 회원국들은 2024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최소 2%를 방위에, 방위 예산의 20%를 방위 연구 개발에 배정하는 등 주요 장비에 대해 분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166]
이러한 방위비 투자에 대한 이행은 회원국의 법적 구속력의 부재, 유럽연합 재정법, 국내 공공지출 우선순위, 정치적 의지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167][168] 2020년 18개 나토 회원국은 주요 장비에 대한 20% 기여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2021년 8개 회원국은 방위비에 대해 국내총생산(GDP) 기여율 2% 목표를 달성했다.[169] 웨일즈 권고사항에 대한 준수 개선은 러시아 연방이 제기하는 회원국의 안보에 대한 위험이 증가함에 따라 촉진되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나토 회원국들의 강력한 규탄으로 이어졌고,[170] 나토 회원국 간 협의를 요구하는 북대서양 조약 제4조가 발동된 7차례 중 하나였다. 이전에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 당시 북대서양 조약 제4조가 발동된 적이 있다.[171] 2016년 바르샤바 정상회담에서 나토 회원국들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4개의 다국적 대대 규모의 전투단을 배치하는 증강대응군(EFP) 창설에 합의했다.[17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후로 나토의 여러 나라가 연합국의 동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지상군, 군함, 전투기를 보냈고, 여러 나라가 다시 북대서양 조약 제4조를 발동했다.[173][174][175]2022년 3월, 나토 정상들은 브뤼셀에서 G7, 유럽 연합 정상들이 참여한 임시 정상회담을 위해 만났다.[176] 나토 회원국들은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4개 전투단을 추가로 설립하기로 합의했으며,[172] 이때 나토 역사상 처음으로 나토 대응군이 가동됐다.[177]
2022년 6월, 나토는 러시아의 침공을 막기 위해 2500km 길이의 동부 측면을 따라 40,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에 배치되었으며, 이 5개국은 259,000명의 전 나토 군대를 소집했다. 불가리아 공군을 보충하기 위해 스페인은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보냈고, 네덜란드는 F-35 라이트닝 II 공격기 8대를 보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공격기도 곧 도착할 예정이다.[178]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나토 가입을 찬성하는 여론이 크게 흔들리면서 처음으로 나토 가입을 반대하는 국민보다 나토 가입을 지지하는 국민이 더 많았다. 2022년 3월 30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핀란드 국민의 61%가 나토 가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월 1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웨덴 국민의 약 51%가 나토 가입을 찬성한 반면 27%는 반대했다.[179][180] 4월 중순, 핀란드와 스웨덴 정부는 나토 가입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핀란드 정부는 이 사안에 대한 보안 보고서를 의뢰했다.[181][182]두 북유럽 국가가 가입을 하게 된다면 북극, 북유럽, 발트해 지역에서 나토의 역량이 크게 확대될 것이다.[183]
2022년 5월 15일, 핀란드 정부는 핀란드 의회의 허가를 조건(5월 17일 의회 투표 결과, 찬성표 188,반대표 8)으로 나토 가입을 신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84][185] 스웨덴 총리 마그달레나 안데르손도 5월 17일에 나토 가입을 신청할 것이라고 발표했고,[186] 핀란드와 스웨덴은 5월 18일에 정식으로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187] 그러나 튀르키예는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 가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튀르키예가 테러단체로 지정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과 인민수호부대(YPG)를 핀란드와 스웨덴이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22년 6월 28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튀르키예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가입 신청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188][189] 2022년 6월 28일 나토 정상회의의 결정을 공식 승인했으며, 2022년 7월 5일 30명의 나토 대사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가입 의정서에 서명했다.[190] 핀란드는 2023년 4월 4일을 기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이 되었으며,[191] 스웨덴은 2024년 3월 7일을 기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이 되었다.
나토의 모든 기관 및 조직은 민간 행정 또는 군사 행정 역할로 분류된다. 대부분 동맹 전체의 안보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민간 조직:
군사 조직:
나토의 조직 및 기관:
나토 의회(NATO PA)는 매년 2차례 열리는 나토의 전략적 목표를 폭넓게 정하는 기구다. 나토 의회(NATO PA)는 상임이사국 또는 나토 대사를 임명하는 회원국 정부의 의회 구조와 직접 상호 작용한다. 나토 의회는 북대서양 동맹 회원국 의원들과 13명의 준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나토와는 구별되는 구조이며, 나토 이사회의 안보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나토 회원국 대표들과 함께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나토는 31개 주권 국가로 구성된 동맹국이며 그들의 개별 주권은 동맹 참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토는 의회도 없고, 법도 없고, 집행도 없으며, 개별 시민을 처벌할 권한도 없다. 이러한 주권 부족의 결과로 나토 사령관의 권력과 권한은 제한된다. 나토 지휘관들은 합법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고위 장교에 대한 무례와 같은 범죄를 처벌할 수 없다.[203] 그래서 나토 지휘관들은 복종하기를 기대하지만 때로는 통일 군사 재판법(UCMJ)처럼 행동강령의 적용을 받는 관계자들에게 자신들의 목적이나 계획을 확고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예로 마이크 잭슨 장군과 웨슬리 클라크 장군 간 프리스티나 공항 사건으로 생긴 충돌이 있다.[204]
나토 사령부는 작전계획(OPLAN), 작전명령(OPORDER), 전술방향, 단편명령(FRAGO) 등의 형태로 부하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공동 교전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국제인도법은 항상 지켜져야 한다. 작전 자원은 국가 지휘하에 있지만 일시적으로 나토에 이관된다. 비록 이러한 국가 단위의 명령들은, 공식적인 권한 이양 과정을 통해, 나토 사령관의 작전 지휘와 통제 하에 놓이지만, 회원국들은 결코 그들의 국가적인 성격을 잃지 않는다.
국방참모총장(CDS)과 같은 고위 국가 대표들은 소위 '레드카드 보유자'로 간주된다. 레드카드는 나토 사령관이 신중히 고려해야 하는 국가별로 열거된 제한 사항을 말한다.
2020년 기준, 나토는 개별 회원국 정상들 간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동맹 내 대중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조사 대상 16개 회원국에 걸쳐 53%의 중위수가 조직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비율은 27%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토의 의견과 관련 문제는 조사 대상 국가마다 매우 다양하며, 특히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고 선언한 워싱턴 조약의 제5조의 의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회원국 중 나토에 대한 긍정평가는 폴란드 82%와 튀르키예 21%로 비교적 편차가 큰 편이며, 미국과 독일이 각각 52%와 57%로 중간 정도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조사 대상 중 비회원국인 스웨덴과 우크라이나가 동맹을 긍정적으로 보고(각각 63%와 53%) 있지만 러시아는 16%만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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