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 왕국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탈리아 왕국(라틴어: Regnum Italiae 레그눔 이탈리아이[*], 이탈리아어: Regno d'Italia 레뇨 디탈리아[*])은 독일, 보헤미아, 부르군트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외였다. 11세기까지 파비아가 수도였다.
이탈리아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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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num Italia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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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경 이탈리아 왕국 | ||||
수도 | 파비아 | |||
정치 | ||||
정치체제 | 선거군주제 | |||
국왕 962년–973년 1519년–1556년 | 오토 1세 (초대) 카를 5세 (말대) | |||
인문 | ||||
공통어 | 라틴어 | |||
데모님 | 이탈리아인 | |||
종교 | ||||
국교 | 로마 가톨릭교회 | |||
기타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
773년 프랑크의 군주 샤를마뉴는 로마 공국과 남부의 일부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랑고바르드 왕국을 침략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었다. 774년 6월, 랑고바르드 왕국이 멸망하고 프랑크가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남부 지역은 베네벤토 공국 속에서 랑고바르드족의 지배하에 남게되었다.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의 군주"라는 칭호를 얻었고 800년에 "로마의 황제"에 올랐다. 카롤링거 왕조 출신들은 887년 비만왕 카를이 폐위될 때까지 이탈리아를 통치했으며, 그후에는 894–96년이라는 짧은 기간 잠깐 되찾았을 뿐이였다. 961년까지 이탈리아의 통치는 왕국 내부와 외부 출신의 일부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경쟁했었다.
961년 과거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의 미망인이였던 아델라이데와 결혼했던 독일의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침략하였고 12월 25일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군주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로마로 향하여 962년 2월 7일 황제로 즉위했다. 이 통합의 시점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군주였으며, 일부 황제들이 그들의 후계자를 이탈리아 통치에 임명하고 가끔 이탈리아 주교들과 귀족들이 독일의 왕에 반하는 그들의 왕을 선출시키기도 했다. 이탈리아 군주의 잦은 부재는 중세 성기에 중앙 집권화의 빠른 실종을 이끌었으나, 그럼에도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잔류했었고 황제들은 발전해가던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게 그들의 뜻을 자주 강요했다. 각각 반-황제파와 친황제파인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 전쟁의 결과는 12-14세기 이탈리아 정치의 특징이다. 롬바르디아 동맹은 이 상황의 가장 유명한 예시이지만, 독립 운동을 선포하지는 않았으며, 황제의 권리에 힘으로 광범위한 도전을 해왔다.
15세기 동안 도시 국가들의 힘은 크게 무너졌다. 1423년부터 1454년까지의 롬바르디아 전쟁은 이탈리아 내 경쟁 국가들을 더욱 줄어들게 하였다. 다음 40년은 이탈리아에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웠으나 1494년 프랑스의 침입을 받았다. 그결과로 인한 대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국가들 대부분이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간 1559년까지 지속됐다. 합스부르크의 스페인 일족-동명의 가문의 또다른 일족은 신성 로마 황제들을 배출-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4년)까지 이탈리아 제국령의 대부분을 통치를 계속하였다. 1495–1512년의 제국 개혁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알프스 남부의 비관구 지역에 해당하게 되었다. 법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는 명목상 군주이자 지배자로서 이탈리아를 관심에 두었으나, 이탈리아 왕국의 "정권"는 황제가 그를 대신하기 위해 임명한 전권 대사들에 좀 더 있었고 그들은 그가 소유한 이탈리아 영지를 다스렸다. 이탈리아에서의 제국 통치는 여러 의존국들이 세워진 1792–97년에 프랑스 혁명 전쟁과 함께 막을 내렸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에 패배한 후,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에 의해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