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남
조선의 무신 (1555-1597)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복남(李福男, 1555년[1] 음력 8월 28일~1597년 9월 26일(음력 8월 16일)[2])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군인이며, 본관은 우계(羽溪)로 자(字)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무과 급제후 선전관에 초임된 뒤 절충장군 전라도병마절도사(折衝將軍 全羅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이복남 李福男 | |
별명 | 자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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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555년 음력 8월 28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명주군 |
사망일 | 1597년 9월 26일(음력 8월 16일, 42세) |
사망지 | 조선 전라북도 남원군 서봉면 남원성 |
국적 | 조선 |
학력 | 1588년(선조 21년) 식년무과 병과 18위 급제 |
부모 | 이준헌, 전주이씨 이명복 |
배우자 | 청주한씨, 한곤의 딸 |
자녀 | 이경여, 이경수, 이경보, 최시환의 처 |
친척 | 이전(할아버지), 이인남(동생), 이덕남(동생), 이광식(증조부), 이용(종조부), 이감(종조부), 이승헌(이복 삼촌), 이성헌(5촌 당숙), 이희헌(5촌 당숙), 이명남(6촌 재종제), 한곤(장인), 한덕원(처남), 이구침(외조부) |
종교 | 유교(성리학) |
복무 | 조선 육군 |
복무기간 | 1588년 ~ 1597년 9월 26일(음력 8월 16일) |
최종계급 | 절충장군 수전라도병마절도사 |
지휘 | 전라도병영 |
주요 참전 | 나주 전투, 웅치 전투, 웅현 전투, 남원성 전투/임진왜란, 정유재란 |
기타 이력 | 1588년(선조 22) 식년무과 병과 급제, 사후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가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
서훈 |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 |
1588년(선조 21년) 무과 식년시(武科 式年試)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 별장을 거쳐 1592년(선조 25) 나주 판관(羅州判官)이 되고, 그해 4월 나주판관 재직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자, 겸 도복병장에 임명되어 전주 웅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의 공으로 그해 12월 당상관에 승진했다. 팔량신성을 수비하다가 1593년(선조 26) 전라조방장, 전라방어사(全羅防禦使)를 거쳐 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이 되었다. 그해 7월 병으로 체직되었으나 바로 복직, 전라방어사에 임명되고, 1593년 10월 훈련 도정(訓鍊都正), 12월 다시 충청조방장에 재임명되었다. 1594년 8월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듬해 1월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듬해 3월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1597년(선조 30년) 1월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 그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8월 해안가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으러 순천으로 내려갔다가, 남원성이 포위되자 말머리를 돌려, 그해 8월 9일 7백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갔다. 남원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5만 군사를 대적하다가 패하고,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교룡산성별장(蛟龍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바로 증(贈)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증직(贈職)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으며, 뒤에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追贈)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남원 칠충신사에 제향(祭享)하고 칠충신사는 후에 광해군 때에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 1711년(숙종 37년) 숙종 때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3] 그의 동생 이덕남은 임진왜란 초기 김화현감으로 전사했고, 동생 이인남은 남도우후로, 숙부 이경헌, 이승헌은 신립 장군의 부관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강원도 강릉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