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론나루와 왕국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폴론나루와 왕국(싱할라어: පොළොන්නරුව රාජධානිය)은 1055년 스리랑카섬의 폴론나루와를 수도로 삼아 건국된 싱할라계 왕국으로, 1070년부터 1232년까지 스리랑카섬과 다른 지역들을 지배하던 나라였다.[note 1] 파라크라마바후 대왕의 치세 동안 폴론나루와 왕국은 해외로 확장하기 시작하였다.[3]
폴론나루와 왕국 | ||||
---|---|---|---|---|
පොළොන්නරුව රාජධානිය | ||||
| ||||
| ||||
수도 | 비자야라자푸라 | |||
정치 | ||||
정치체제 | 싱할라 군주제 | |||
라자 1055년 ~ 1110년 1153년 ~ 1186년 1187년 ~ 1196년 1215년 ~ 1232년 | 비자야바후 1세(초대) 파라크라마바후 1세 니샨카 말라 칼링가 마가(말대) | |||
지리 | ||||
위치 | 스리랑카 | |||
인문 | ||||
공통어 | 싱할라어 산스크리트어[1] 크메르어 | |||
민족 | 싱할라인 | |||
종교 | ||||
국교 | 상좌부 불교 | |||
기타 종교 | 힌두교[2] | |||
기타 | ||||
현재 국가 | 스리랑카 인도 미얀마 |
폴론나루와 왕국은 판디아 내전에 간섭하여 남인도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 전쟁 동안 판디아 나두는 폴론나루와와 판디아 왕조의 비라 판디안의 군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촐라 제국의 번속국인 톤디와 파시도 폴론나루와와 비라 판디안 군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4] 라메슈와람은 1182년까지 싱할라인과 비라 판디안 동맹의 통치하에 있었다.[5] 이 지방에서는 카하파나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남인도를 점령하는 동안 건설 작업이 수행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와 같은 왕들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주로 폴론나루와 왕의 판디아와 칼링가 혈통 간의 파벌 다툼에 휩싸이면서 영토 및 정치적 불안정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이로 인해 왕실 군부는 자신이 선호하는 세력을 지지할 기회를 얻었고 아야스만타나 로키사라와 같은 장군들이 왕좌를 장악하고 꼭두각시 통치자를 임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릴라바티 여왕의 파란만장한 통치는 여러 장군을 거치며 세 번이나 집권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북쪽의 판디아와 촐라의 반복적인 개입과 침략이 이루어지면서 왕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212년, 판디아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경쟁자인 파라크라마 판디안이 수도를 점령했다. 불과 3년 후, 오디샤 동강가 왕조의 혈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칼링가 마가가 2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왕국을 침공하여 전임 통치자를 사로잡았다. 마하밤사에 묘사된 대로 폴론나루와는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으며, 이 지역의 광범위한 황폐화는 남쪽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촉발하여 1500년에 걸친 라자라타 유역의 문명을 종식시켰다.
마가가 수도를 점령한 후, 이전 왕국의 여러 군벌과 귀족을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결집했고, 이들은 여러 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북쪽의 적과 맞서 싸웠다. 결국 담바데니야 요새의 통치자 비자야바후 3세가 등장하여 라이벌 군주들의 세력과 마가의 영향력을 제압하고 1232년 담바데니야 왕국을 세우며 스리랑카 역사에서 과도기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