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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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원(李翰元, ? ~ ?)은 조선의 공신(功臣)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字)는 휴문(休文)이다. 아버지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四等)에 책록(策錄)되어 전산군(全山君)에 봉군(封君)되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졸(卒)하고 양간(良簡)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追贈) 받은 이수남(李壽男)[1]이고 어머니는 봉렬대부(奉列大夫) 행(行) 교하현감(交河縣監)을 지내고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 3등(三等)에 녹훈(錄勳)된 박수림(朴秀林)[2][3]의 셋째 딸 고령박씨(高靈朴氏)이다.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4]의 외손녀 사위이며 중종(中宗)의 후궁인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이모부(姨母夫)이기도 하다.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홍경주(洪景舟)[5]와는 동서사이이다. 병조 참판(兵曹叅判)을 지낸 청파(靑坡) 이육(李陸)[6]이 이모부(姨母夫)이다.
이한원의 외사촌(外四寸) 동생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7]인데, 읍취헌은 박수림(朴秀林)의 손자이며 박담손(朴聃孫)[8]의 아들이다.
이한원 李翰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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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中宗)조의 공신
전성군(全城君) | |
신상정보 | |
출생일 | ? |
사망일 | ? |
가문 | 전의 이씨(全義李氏) |
부친 | 이수남 |
모친 | 정경부인(貞敬夫人) 고령박씨,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 교하현감(交河縣監) 박수림(朴秀林)의 딸 |
배우자 |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권금성(權金成)의 딸 |
자녀 | 이용강 , 이용유 , 이용경 , 이용륜 , 사위 조방종(趙邦宗:楊州人) , 사위 남궁 후(南宮厚:咸悅人) , 사위 윤심(尹深:茂松人) |
묘소 |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 |
1501년(연산군 07) 2월 24일 부사과(副司果)로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둔재(遯齋) 성세창(成世昌), 음애(陰崖) 이자(李耔) 등과 함께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급제(及第)하였고[9] 경력(經歷)[10]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1467∼1510, 順天人)[11], 성희안(成希顔:1461∼1513, 昌寧人)[12], 류순정(柳順汀:1459∼1512, 晉州人)[13] 등과 더불어 연산군을 폐위(廢位)시키고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安置)시키는 거사(擧事)를 단행하고, 성종(成宗)의 아들인 19세의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임금으로 추대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錄勳)되었다.
1506년(중종 01) 10월 19일 통정대부 행 회양도호부사 회양진관 병마첨절제사(通政大夫行淮陽都護府使淮陽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공신회맹(功臣會盟)에 참여하였다.[14] 그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15]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중종 13) 통정 대부(通政大夫)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재임하였다. 사후(死後)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封)해졌다.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한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이한원은 대간(臺諫)에게 여러 번 공박(攻駁:잘못을 몹시 따지고 공격함) 당하였다.
“ | 今淮陽府使李翰元, 專無來歷, 有何更事乎? 如此之類, 斷不可遣也 지금 지금 회양 부사(淮陽府使) 이한원(李翰元)은 내력이 전혀 없는데 무슨 경사(更事)가 있겠습니까? 이런 무리는 절대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
” |
— 《중종실록》 , 중종 2년(1507년) 8월 1일 (임신) |
“ | 臺諫啓: "楊州牧使李翰元、仁川府使柳軾, 貪鄙庸劣, 議論之出久矣, 而想於殿最, 必見貶下, 故不卽啓焉。 監司必聞公議, 而猶不貶下, 亦誤於等第。 翰元、柳軾, 不可一日在官。 請竝罷。" 又啓前事, 傳曰: "李希雍事, 大臣之議, 或曰可削, 或曰不可削之議多, 故從衆不改耳。 李翰元、柳軾等事, 監司與臺諫所聞各異而然也。 不可無故而遽罷其職。 餘不允。" 대간이 아뢰기를,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한원(李翰元)과 인천 부사(仁川府使) 유식(柳軾)[16]은 탐욕이 많고 용렬하므로 물론이 있은 지 오래되었으나, 전최(殿最) 때에 필시 하등으로 낮추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곧장 아뢰지 아니하였습니다. 감사도 필시 공의(公議)를 들었을 터인데 그를 낮추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등급(等級)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한원과 유식은 하루도 관직에 있을 수 없으니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고 전의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희옹(李希雍)[17] 의 일은, 대신(大臣)의 의논이 혹은 삭직(削職)함이 옳다고도 하나 삭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논이 많기 때문에 중론에 따라서 고치지 않은 것이다. 이한원과 유식 등의 일은, 감사와 대간의 들은 바가 각각 달라서 그런 것이다. 까닭없이 그들을 파직할 수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 |
— 《중종실록》 , 중종 13년(1518년) 6월 16일 (갑신) |
내력(來歷)이 전혀 없는데 무슨 경사(更事:경력)가 있겠는가? 라거나 탐욕이 많고 용렬하고 물론이 있은 지 오래되었다는 등의 갖가지 이유를 들어 논핵(論劾)하였다.
하지만 그가 여러 차례 과거(科擧)에 응시했으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가 공신(功臣)에 참여하였고, 성품(性稟)이 호방(豪放)하면서도 까다롭고 꼼꼼하며(苛察) 강직하고(剛勁) 말이 곧은(言直) 까닭으로 대간(臺諫)에게 논박(論駁) 당한 것이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충순위(忠順衛)로서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오른 권금성(權金成)[18][19]의 딸이다. 권금성(權金成)은 지강진현사(知康津縣事)와 지양산군사(知梁山郡事) 등을 지낸 권촌(權忖)의 손자이고 수의부위(修義副尉) 행(行) 사용(司勇) 권계우(權繼祐)의 아들이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의 사위이다.
이한원(李翰元)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용강(李用剛)은 울진현령(蔚珍縣令), 강릉판관(江陵判官), 익위사 좌사어(翊衛司左司禦)를 거쳐 통훈대부 행 충훈부도사(通訓大夫行忠勳府都事)에 이르렀고, 차남 이용유(李用柔)는 수의부위(修義副尉), 병절교위(秉節校尉) 등을 지냈으며, 삼남 이용경(李用經)은 효력부위(効力副尉), 사남은 이용륜(李用綸)이다. 이용유, 이용경, 이용륜은 후손이 없다. 첫째딸은 1544년(중종 3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낸 조방종(趙邦宗:楊州人)[20][21]에게 출가하였는데 이가 곧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른 정견공(貞堅公) 기대항(奇大恒)[22]의 장모이다. 기대항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종형(從兄:사촌형)이다. 둘째딸은 조산대부 행 예빈시 참봉(朝散大夫行禮賓寺叅奉) 남궁 후(南宮厚:咸悅人)[23]에게, 셋째딸은 충의위(忠義衛) 윤심(尹深:茂松人)[24]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조방종은 기대항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는데 기대항의 손자이자 기응세(奇應世)의 아들인 기자헌(奇自獻)[25]이 광해군(光海君)때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남궁 후(南宮厚:1504년 갑자생)는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용인 현령(龍仁縣令), 사도시 정(司䆃寺正), 인천 부사(仁川府使), 장악원 정(掌樂院正), 부평 부사(富平府使), 통훈대부 행 성균관사성(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을 역임한 남궁 지(南宮芷:1530년 경인생)[26] 등을 두었고, 윤심(尹深:1495년 을묘생)은 아들 윤언청(尹彦清:1520년 경진생)을 두었는데 윤언청의 아들이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등을 지내고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에 봉하여진 충정공(忠靖公) 윤형(尹泂)[27] [28]이다.
이한원의 묘소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합폄(合窆)하여 경기도 금천현 사성리(京畿道 衿川縣 巳省里)[29]에 조성(造成)하였으나 사후(死後) 4백 수십년(數十年)[30] 만에 도시개발 계획에 포함됨에 따라 1975년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江原道 洪川郡 瑞石面 豊岩里 81) 번지(番地)로 천장(遷葬)하였다.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홍치십사년신유이월일생원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榜』(1501년의 司馬榜目),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구공신회맹문(九功臣會盟文), 『관동읍지(關東邑誌)의 회양읍 선생안(淮陽邑 先生案)』, 묘갈(墓碣), 1680년 간행 선원록5-2985, 5-3056, 5-3284
※1501년(연산군 07) 사마방목(司馬榜目)인 『홍치십사년신유이월일생원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榜』에서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사실[31]을 살펴볼 수 있다.
※1548년에 건립(建立)된 묘갈(墓碣)이 전(傳)해지고 있는데 전면(前面)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嘉靖二十七年七月 日 奮義靖國功臣贈資憲大夫工曹判書全城君行通政大夫楊州牧使李公之墓 貞夫人安東權氏之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