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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朴誾, 1479년 ~ 1504년 7월 26일(음력 6월 15일[1]))은 연산군 때의 문신이자 정치인, 시인이다. 본관은 고령,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2] 읍취헌은 그가 서울 남산 기슭에 살았을 때 지은 당호(堂號)이기도 하다.[3] 김종직, 최부(崔溥)의 문인이다. 좌리공신 전산군 양간공(佐理功臣 全山君 良簡公) 이수남(李壽男)이 고모부(姑母夫)이고, 정국공신(靖國功臣) 전성군(全城君) 이한원(李翰元)은 고종 사촌(姑從四寸) 형이 된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성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4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가 되어서는 널리 명성을 얻어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의 사위가 되었다.[3]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인 최부(崔溥)에게서 수학했는데, 직접 김종직을 찾아가서 사사하기도 했다 한다. 동문인 이행, 남곤 등과 가깝게 지냈다.
1495년(연산군 1년)에 진사가 되고,[3] 이듬해인 1496년(연산군 2년)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했다.[3] 성품이 곧아 옳은 소리를 잘 했다. 1498년(연산군 4년)에 유자광과 성준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501년(연산군 7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나,[4] 파직되어[5] 이후 실의에 빠져 시와 술만을 즐기며 지냈다.[3]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가[6] 서울로 다시 압송되어[3] 음력 6월 15일에 효수되었다.[7]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詐忠自安 新進侮長官(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7]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 의금부에게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해 곤장을 치게 하고 그들을 유배 보냈으며,[8]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9]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다.[10]
중국 강서파의 시풍을 수용하여 일가를 이뤘기에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맹주로 일컬어진다. 이행, 홍언충, 정희량과 더불어 시가사절(詩歌四傑)로 불렸다.[11] 친구 이행이 그의 시를 모아 펴낸 《읍취헌유고》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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