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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1527–1572)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기대승(奇大升, 1527년 12월 21일(음력 11월 18일)~1572년 12월 15일(음력 11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기묘명현인 기준(奇遵)의 조카이자[1] 선산부사 조찬한의 처조부이다.[2]
전라도 광주목 광산면 소고룡리 출신으로,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 수준의 제고에 기여했다. 광주광역시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1527년(중종 22) 광주 광산구 소고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아버지 경기전 참봉 기진(奇進)과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문하평장사 기순우의 후예로 조부는 응교 기찬이고, 증조부는 풍저창부사 기축이며, 고조부는 정무공 판중추부원사 기건이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이 그의 계부(季父)이며, 원나라 혜종의 황후 기황후는[3] 그의 11대조 기필선의 둘째형 기윤숙의 4세손이다.
1534년(중종 29) 8살에 생모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성인과 같았다.
1537년(중종 32) 11세에 향숙에 나아가 김공집(金公緝) 밑에서 《대학장구》를 배우고 '연구'(聯句)를 지었다. 수학 및 육갑과 오행성쇠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1541년(중종 36) 15세에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 밑에 나아가 130구에 이르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4]
1546년(명종 원년) 가을 향시 진사과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명종 6) 동당 향시(東堂 鄕試)의 시험에서 장원을 하였다.[5] 봄에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이 별세하자 조문하였다.[6] 1555년(명종 10) 부친 물재공이 사망하자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7년 주자대전을 발췌해 주자문록 3권을 편찬했다.
1558년(명종 13) 7월에 과거 시험을 보러 서울에 가던 도중 장성의 하서 김인후와 태인의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 태극도설을 논하였다. 8월에 서울에서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았다.
1558년(명종 13) 10월 32세에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를 제수 받았다. 그 달에 서울에 와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뵙고 의견을 나누었다.
그해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 전에 논의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7] 이후 하서 김인후를 배알하고 분별하기 어려움을 들어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그의 주장이 옳다 하고 하루 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1559년(명종 14) 1월 퇴계 이황의 발송 서를 받아보고, 3월에는 퇴계에게 저설 및 답서를 올려 사칠이기설을 논변했다. 8월에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출처와 거취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고, 『성정설』을 주장하였다. 10월에 퇴계의 답서 및 변설을 받아 보았다. 그해 겨울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나아가 매양 이기를 강론하는데,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해서 깊이 의심하여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세밀하게 분석하여 변론을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60년(명종 15) 3월 세상을 버린 하서 김인후 영전에 글을 지어 전을 올렸다.[8] 5월에는 서신으로 추만 정지운과 천명도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는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부터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에게 드렸으며, 퇴계와 「사칠호발」에 대해 강론할 때 이를 밝히니 수만 언에 이르렀다.
1559년(명종 13) 3월부터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 가운데 1566년까지 8년간의 걸쳐 이루어진 사칠이기논쟁의 서신이 유명하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 부터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결론에서 형식적으로 퇴계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562년(명종 17)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임명되었다. 예문관 대교로 자리를 옮겼는데 겸직은 잔과 같았다.
1563년(명종 18) 3월 승정원 주서에 4월 예문관 봉교, 5월 부사정에 임명되었다. 8월 16일 신진사류[9]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 및 외척이었던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 하에 삭직되고 문외 출송을 당하였으나, 종형 기대항(복재 기준 아들)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9월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었다. 9월 예문관 봉교와 이전의 관직을 임명 받았다. 10월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11월 홍문관 수찬 겸 경영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
1564년 병으로 수찬에서 체직되고 전적 겸 지제교로를 임명 받았다. 6월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에 임명되었다. 12월 셩균관 전적을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에
1565년(명종 20) 병조좌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이후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낙향하여 12월에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광주 북방에 있는 진국원(鎭國院)으로 옮겼는데 찾아가서 뵙고 인심도심설에 대하여 논하였다.
1566년 통덕랑에 임명되고 예조정랑 지제교를 배수하였다. 통선랑에 임명되고 홍문관 교리와 이전의 관직을 임명 받았다. 사간원 헌납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의정부 사인으로 승진하다.
1567년(명종 22)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예, 의정부 사인,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5월 홍문관 응교와 이전의 벼슬을 임명 받고, 원접사 종사관에 충용되어 관서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조산대부를 임명받고 사헌부 집의와 이전의 벼슬을 임명받았다.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사헌부 집의로 입시하여 기묘년 이후의 시비를 가릴 것을 청하고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이언적 등에 대한 추존을 건의하다.[10] 11월 석강에서 예기를 강하고, 사친에게 치제하는 것이 잘못임을 아뢰다.
1568년(선조 1) 홍문관 직제학 겸 교서관 판교응 임명받고, 이어서 승전원 동부승지 겸 경영참찬관을 임명받았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병으로 승지를 그만두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 되었다가 사직하고,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1569년(선조 2) 4월 좌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임명되고, 8월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위훈을 논할 때, "을사의 녹훈이 위훈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9월에 대사성에서 물러났다.
1570년(선조 3) 2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마산 남쪽 아래에 서실 낙암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제자가 되어 따르는 학자들이 많았다.[11] 12월 8일 퇴계 이황이 별세하자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였다.
1571년(선조 4) 1월 안동 도산에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4월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9월에 이조참의에 제수 되었다.
1572년(선조 5) 2월 종계변무 주청사의 소명을 받고 조정에 나가는 도중 대사성에 제수 되고 종계변무 주문을 썼다. 9월 대사간에 제수 되었으나 병으로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
1572년(선조 5) 사직하고 10월 3일 귀향으로 돌아오던 중 15일에 정읍 태인에 도착하니 병이 극심하여 관사에 머물렀다. 25일 병이 위독해 지자 사돈 매당(梅塘) 김점(金坫)이 황급히 찾아와 할 말을 물었다. 28일에 관사에서 죽을 수 없다 하며 사돈집으로 가기를 재촉하니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다. 선조가 병세가 위중함을 듣고 특별히 어의(御醫)와 약을 내려보내 병을 구완케 하고 어찰(御札)을 보내어 위문하도록 하였다.[12] 11월 초하루 정읍 태인에서 4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듬해 2월 8일에 나주 북쪽 오산리 통현산 너부실 언저리에(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산 135 묘좌 유향) 안장하였다.
제자로는 정운룡 · 정즐 · 유은 · 최시망 · 이덕홍(이굉중) · 김경생 · 이운홍 · 윤진 · 박규 · 곽호 · 이함형 · 이유원 · 박대봉 · 정휴 등이 있다. 최경회 · 고경명 · 정철 등도 찾아와 사사(師事)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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