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드 샤 마스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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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드 샤 마스우드(다리어: احمد شاه مسعود, 1953년 9월 2일 ~ 2001년 9월 9일)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주의 운동가, 군인, 군벌, 정치군사 지도자이다. 1979년에서 1989년까지 소련의 침공에 대한 저항운동을, 그 이후 사망할 때까지 탈레반에 대한 항쟁을 벌이며 뛰어난 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흐마드 샤 마스우드 احمد شاه مسعو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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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국방장관 | |
임기 | 1992년 6월 ~ 2001년 9월 9일 |
전임 | 무함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
후임 | 무함마드 파힘 |
대통령 | 부르하누딘 라바니 |
총리 | 압둘 사부르 파리드 코히스타니 (1992년)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1993년-1994년) 아르살라 라흐마니 다울라트 (권한대행) 아흐마드 샤 아흐마드자이 (1995년-1996년)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1996년-1997년) 압둘 라힘 가포르자이 (1997년) |
이름 | |
별명 | 판지시르의 사자 (페르시아어: شیر پنجشیر)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53년 9월 2일(1953-09-02) |
출생지 | 아프가니스탄 왕국 판지시르주 바자라크 |
사망일 | 2001년 9월 9일(2001-09-09)(48세) |
사망지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타하르주 |
정당 | 자미아티 이슬라미 |
자녀 | 아흐마드 마스우드 |
종교 | 수니 이슬람교 |
군사 경력 | |
복무 | 무자히딘 아프간군 북부동맹 |
복무기간 | 1978년–2001년 |
최종계급 | 사령관 |
지휘 | 타지크인 군벌 아프간 국방부 북부동맹 |
주요 참전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상훈 | 아프가니스탄 국민영웅 |
마스우드는 북부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계곡 출신의 타지크인으로, 수니파 무슬림이다. 1970년대 카불 종합공업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그 와중에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 반공주의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으나, 이후 파벌 분화 때 라바니와 함께 온건파가 되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반군 지도자로 활약하여 "판지시르의 사자"(شیر پنجشیر)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2년, 나지불라의 소련 괴뢰정권이 붕괴하고 국제연합이 아프가니스탄에 과도 정부를 세우려고 했을 때 마스우드는 이에 반대했고 결국 계획을 파토시켰다.[1] 공산정권 이후 세워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부에서 평화 및 권력분담 합의인 페샤와르 합의가 이루어지자 마스우드는 국방성 장관에 임명되었다. 내전기에 마스우드의 군대는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압둘 라술 사야프, 압둘 알리 마자리, 압둘 라시드 도스툼 등 여러 군벌들로부터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싸웠고, 최종적으로는 탈레반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시가 파괴되고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최소 6만 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으며, 그보다 많은 수가 불구가 되었고, 공공재, 정부기관, 카불 박물관이 약탈당했다.[2][3]
1996년 탈레반이 흥기하기 시작하자 탈레반의 원리주의적 이슬람 해석을 거부한 마스우드는[4] 재무장하여 북쪽으로 후퇴, 가는 길에 살랑 터널을 파괴하고 타지키스탄의 쿨롭으로 도망하여 탈레반에게 항거하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속칭 "북부동맹"의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고향인 판지시르를 거점으로 탈레반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마스우드는 2000년 아프간 여성기본권 선언문에 서명하고 여성의 근로와 교육을 보장하였으며 부르카의 의무적 착용을 폐했다.[5] 이듬해인 2001년 9월 9일 마스우드는 탈레반의 사주를 받은 알 카에다 요원들의 자폭 테러로 암살당했다. 마스우드가 죽고 이틀 뒤 9·11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마스우드가 지휘하던 북부동맹 군대와 연합해 탈레반을 쳤다.
마스우드 사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의 명령으로 그에게 "국민영웅"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마스우드의 제삿날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스우드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6]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아미르 사히브에 샤히드(امیر صاحب شهید Amir Sāhib-e Shahīd)라고 높여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