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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성종 때의 지리서이다.
성종 때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2년)가 수입되자 왕이 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에 그것을 참고하여 세종 때의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 사람들은 성종 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1486년)에 증산(增刪)·수정하여 35권을 다시 완성해 간행하였다. 그 후 연산군 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전 55권 55책.
조선조 전기에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조정은 각지의 정보를 반드시 제대로 파악해야 해서 각지의 연혁·토지·호구·성씨·인물·물산·문화유적 정보를 총람할 지리지 편찬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종 시대에 이르러 본격화한 지리지 편찬은 《세종실록》지리지 부분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세종조에 편찬된 지리지로서는 유일하게 「경상도지리지」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전하고 세조 때에 양성지가 주도하여 시작한 《팔도지리지》편찬이 성종 9년(1478년)에 완료되었으나 이것은「경상도속찬지리지」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은 이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서거정의 《동문선》에 수록된 시문을 합한 형태로 편찬됐다. 처음에는 훈구 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다가 후에 김종직·최부를 위시해 사림 세력도 편찬에 합류한 점에서 《동국여지승람》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협력해 간행한 지리지라는 의의가 있다. 중종이 즉위하고서 이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라고 명령하자 이행, 윤은보, 홍언필이 중심이 되어 중종 25년(1530년)에 '새로 증보했다'는 뜻의 '신증(新增)'을 붙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하게 되었다.
전 55권 25책으로 각 도의 지리를 수록하였는데 첫머리에 이행이 쓴 진전문(進箋文)과 서거정 등의 서문, 김종직 등의 발문과 더불어 구본《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실었다. 이어 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제목을 붙인 조선 전도와 함께 전국을 경도·한성부(현재의 서울)·개성부(현재의 개성특별시, 개풍군)·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함경도·평안도로 나누고 각 부와 도에 속한 지역 329개의 연혁과 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관방·봉수·누정·학교·역원·불우(佛宇)·묘사(廟社)·능침(陵寢)·고적·명환·인물의 사적(事蹟)과 시인(詩人)의 제영(題詠) 등을 실었다.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로 지도를 넣었는데 대량으로 보급하려고 목판을 이용해 인쇄됐다. 지도는 모두 동서의 폭이 넓고 남북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며, 북부 지역이 남부 지역보다 매우 작게 그려져 있어 변경 인식이 남부 지역 인식보다 낮았다는 사정을 보여준다. 《세종실록》지리지와 같은 기왕의 지리지와 크게 다른 점은 토지, 호구, 군사의 항목이 없는 대신 인물이나 제영의 비중을 늘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리학 이념이 조선 사회에 점차 유포되면서 이에 충실했던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전파하고 관리나 학자들이 쓴 시문을 알려 문화국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려는 속셈이라고 혹자는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편찬에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사림들이 개입하면서 이 점은 더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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