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희수
조선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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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수(沈喜壽, 1548년 ~ 1622년)는 조선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또는 수뢰루인(水雷累人),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냈다. 폐모론에 반대하다 물러난 뒤 조정에 나오지 않고 은거하였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다. 조선 중기의 명기 일타홍(一朶紅)과의 일화로 유명하다.[1]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에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 사가독서), 홍문관수찬, 사간, 장령, 응교, 부응교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상관에 올라 병조참지가 되었다.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영접하였다.[2] 우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참찬관을 겸하며 도승지를 계속 하다가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어 명나라 총독 고양겸(顧養謙)의 접반사가 되었다.[3] 공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리 양호(楊鎬)의 접반사가 되었다.[4] 예문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이 되고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좌찬성이 되었다.[5]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가 되어 다시 명나라 경리 양호(楊鎬)의 접반사가 되었다.[6] 또한, 새로 임명된 명나라 경리 만세덕(萬世德)의 접반사가 되었다.[7] 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다시 좌찬성에 이르렀고, 이후 지돈녕부사, 대제학을 하다가 우찬성, 이조판서, 대제학, 좌찬성을 거쳐 이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동지경연사를 겸하다 판의금부사와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당시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추숭하려 하자 강력하게 반대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등과 함께 정승으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주로 우의정으로서, 임해군을 처단하는 데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계축옥사 때 영창대군을 처리하는 데 반대 의견을 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를 무고하고 옥사를 국문하였던 여러 신하들을 녹훈할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강제 책록되었다.[8] 영돈녕부사가 되어 허균과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지만, 이후 폐모론이 일어나자 반대를 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낙향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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