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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 재위기간에 있었던 대기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대기근이다.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으며,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당시 조선 인구 1200~1400만 명 중 약 최소 15만에서 최대 85만 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 |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 ” |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을 살펴보면 1670년 한 해동안 온갖 자연재해가 집중해서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671년에 조정에서 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죽어갔음을 알 수 있다. 경신 대기근은 소빙기로 인한 17세기의 범세계적 기상이변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20여년 뒤 숙종 재위기인 1695년의 을병대기근 때 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이 때 사람들은 농사기구인 소를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도살했으며, 심하면 사람고기까지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는 처벌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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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해무리가 졌는데 안쪽이 붉은 색이고 바깥쪽이 푸른 색이었다.[1][2] 이틀 뒤인 1월 3일에는 지난 해(1669년) 12월 29일에 평안도에 흰 무지개가 뜨고 삼중 햇무리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온다.[3][4] 1월 11일에 또 달무리가 생겨 목성과 달을 동시에 둘렀으며,[5] 다음달인 2월 9일에 달무리가 지고,[6] 2월 12일에는 해무리가 졌으며,[7] 2월 14일에 또다시 해무리가 졌다.[8] 1월 13일에는 지난 9일에 황해도에 우레가 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9][10] 이런 흔치 않은 현상을 ‘불길한 징조’로 여긴 것은 단순히 중세적 미신일 수도 있지만, 무지개와 무리가 며칠동안 연속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 많은 비가 오랫동안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과 황해도에서 거의 동시에 우레가 발생한 것 역시 광범위한 호우가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3월 11일에 또다시 졌다.[11]
1월 6일부터 한 달 가까이 금성이 낮에도 보여 불안감을 자아냈고, 1월 8일에 서울에, 1월 9일에는 평안도에, 1월 10일에는 서울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평안도의 경우 아예 운석이 떨어졌다.[12][13][14][15] 동시다발적인 유성의 출현은 이 당시 지구가 유성군을 지나는 바람에 우주 먼지로 인해 일조량이 감소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21일에도 꼬리가 2~3척이나 되는 유성이 묘성(昴星: 현재의 플레이아데스 성단) 아래에서 나타나 땅으로 떨어졌으며,[16] 유성은 2월 5일에 또다시 나타났다.[17] 윤달 2월 11일, 오시부터 유시까지(대략 정오경에서 저녁 식사때 즈음까지) ‘마치 먼지가 내리는 듯’ 날이 컴컴해졌다.[18][19] 같은 달 29일에는 꼬리가 5~6장(丈)[20]이나 되는 유성이 떨어졌으며,[21] 한참 뒤인 5월 13일에는 또 다시 유성이 발견되었다. 모양이 병 모양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22][23]
1월 4일, 지난 12월 12일에 전라도에 문과 창문이 모두 흔들릴 정도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24] 윤달 2월 16일에 경상도 거창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다음 달 6일에 서울에 보고되었다.[25] 윤달 2월 21일에 경기도 교동에서 지진이 있었음이 24일에 보고되었다.[26] 바로 이틀 뒤인 23일에 경기도 통진(현 경기도 김포시)에서 지진이 일어나 28일에 보고되었다.[27] 5월 12일에는 황해도에 지진이 났음이 보고되었다.[28]
2월 15일, 충청도에서 역병이 창궐해 80여 명이 죽었다.[30][31] 윤달 2월 11일, 무슨 병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평안도에서 역병이 창궐해 1천 3백 명이 감염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32][33] 3월 7일, 경상도에 역병이 창궐해 1천 명 이상이 감염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34][35] 4월 1일에 충청도에 또다시 역병이 돌아 죽는 자가 연달았다.[36][37] 4월 5일에는 제주에 역병이 돌아 역시 죽는 자가 연달았다.[38][39]
윤달 2월 26일, 서울에 때늦은 눈과 우박이 내렸다.[40][41] 오후에는 눈과 비가 섞여 내렸다.[42] 윤달 2월 28일, 경상도에 크기가 새알만한 우박이 내렸음이 3월 8일에 보고되었다.[43] 3월 25일, 평안도에 서리가 내렸음이 4월 7일에 보고되었다.[44][45] 평안도는 이어 3월 27일, 4월 6일, 4월 7일에 연이어 서리 우박이 내려 곡식의 싹이 죽고 목화•삼베가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는 3월에 눈까지 내리는 기현상을 보인다.[46][47] 4월 6일에는 경기도에 우박이 내려 밀과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48][49] 전라도와 경상도는 4월 8일에 서리가, 4월 9일에 우박이 내렸으며, 동시에 매우 가물었다.[50][51] 4월 16일에 함경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5월 5일에 보고되었다.[52] 4월 23일에는 전라도에서 밤마다 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피해를 입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53][54] 4월 28일에는 원양도(현대의 강원도)에 우박이 내렸다.[55][56] 5월 7일, 평안 감사의 보고가 도착했다. 평안도에 연일 우박이 내려 땅에 반 자(약 15 cm)나 쌓였으며, 동시에 가뭄이 너무 심각하여 농사가 가망이 없다는 내용이었다.[57][58] 5월 9일에는 경기도에 우박이 내려 5월 12일에 보고되었다.[59][60] 5월 16일에는 원양도와 황해도에 우박이 내렸음이 보고되었다.[61][62] 5월 17일에 평안 감사의 보고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기가 막혔다. 우박으로 인해 벼가 상한 것은 물론, 오리알 만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져 반 자나 쌓이고, 네 살짜리 아이가 그 우박에 맞아 죽었으며, 꿩•토끼•까마귀•까치 등 짐승들이 숱하게 죽었다.[63][64] 5월 22일에는 지난 5월 5일에 평안도에서 우박이 내렸음이 보고되었다.[65][66] 가뭄이 물러가고 홍수가 시작된 6월에는 다시 평안도에서 우레와 바람을 동반한 우박이 내렸다.[67][68] 6월 16일에 또다시 평안도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했는데, 7월 11일에 보고되었다.[69][70] 7월 11일에는 또 지난 6월 5일에 함경도에 비둘기 알 만한 우박이 내렸음이 보고되었다.[70][71]
3월 20일, 예조에서 임금에게 기우제를 지낼 것을 청했고, 임금이 이에 따랐다.[72][73] 이때쯤 하여 이 가뭄과 이상기후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3월 23일에 서울뿐 아니라 각지의 성황당, 우사단에 관원을 파견해 기우제를 지냈다.[74] 3월 25일에 지평 유연이 “서울에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외방에는 겨를이 없어서 지내지 못한다”고 고한 것으로 보아 가뭄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75] 3월 28일에 종묘•사직•북교에 사람을 보내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76] 하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이 4월 1일에 황해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37][77] 4월 4일, 4월 9일, 4월 10일에 다시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효과가 없자 종묘와 사직에 일반 관원이 아닌 대신을 파견해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8][79][80]
네 번째 기우제를 지냈던 4월 9일에 양심합에서 임금과 대신들이 나눈 대화를 살펴보면,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도저히 파종을 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이 때 대신들은 ‘약간이나마 비가 와서 밀이나 보리는 살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81] 이미 지난 한 달동안 비가 오지 않아 밀과 보리가 모두 말라 죽은 뒤였다.[82] 다섯 번째 기우제인 4월 10일 기우제를 지내던 도중 비가 올 듯 하자 다음날 기우제를 중단했다.[83][84] 4월 14일에 비가 조금 오자 기우제를 또 중단했다.[85] 그러나 이때 서리 우박이 내리고 있던 경상도와 전라도, 즉 양남 지방은 가뭄이 더욱 심해졌고, 특히 전라도는 보리가 마르고 모가 타는 지경에 이르렀다.[50][51]
4월 27일에 여섯 번째로 기우제를 지냈다.[86][87] 그러나 이틀 뒤인 4월 29일, 평안도에 한재(旱災), 즉 재난 급의 가뭄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88][89] 5월 2일에 임금이 내린 하교를 보면,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파종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90][91] 다음날 정원이 이 비망기 내용이 매우 좋으니, 대중에 공개할 것을 청했고, 임금이 윤허하여 반포하였다.[92][93] 5월 7일에는 우박과 가뭄이 너무 심각해 농사가 가망이 없다는 평안 감사의 보고가 도착했다.[57] 혹독한 가뭄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 10일, 여덟 번째 기우제를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94][95] 그러나 불과 4일 뒤인 5월 14일,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어 모가 다 말라 죽었다는 경상 감사의 보고가 접수되었다.[96][97] 이틀 뒤에는 전라 감사가 참혹한 가뭄이 들었음을 보고했다.[61][62]
살인적인 가뭄이 계속되던 5월, 22일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98] 다음날인 23일에도 비가 계속되었다.[99] 가까스로 가뭄을 견뎌낼 수 있었으나 이미 절기를 넘겼기 때문에 파종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100] 어디 한 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 팔도가 모두 흉년이 들었다.[101]
비록 이미 농사는 망쳤지만, 5월 말에 내린 비로 가뭄이 끝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홍수가 찾아왔다. 6월 1일, 전라도에 큰 비가 연일 내려 들판이 강이 될 지경이라는 전라 감사의 보고가 접수되었다.[102] 6월 8일에는 경상도에 참혹한 홍수가 졌다는 경상 감사의 보고가 올라왔다.[103][104] 이어 6월 20일에 경기도에 큰 물이 졌다는 경기 감사의 보고가 올라왔다.[105] 당시 전국 각 도에 모두 홍수가 일어났는데, 주요 식량 생산지인 호남이 그 피해가 특히 심했다.[106]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비가 안 와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제는 비가 너무 쏟아져서 기청제를 지내자는 말이 나왔다.[107] 기청제를 건의한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기청제와 동시에 죄수를 너그럽게 처리하자고 건의했지만, 임금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보류하고 우선 기청제를 지낼 것을 명했다.[108] 이에 이틀 뒤인 6월 22일에 사대문에서 기청제를 지냈다.[109] 하지만 7월 1일이 되자마자 함경도의 수재가 아주 참혹하다는 함경 감사의 보고가 접수되었다.[110][111] 다음날인 7월 2일, 이번에는 황해도에 홍수가 났으며,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112][113] 7월 11일에는 또 평안도에 큰비가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69][70] 같은 날 함경도에 수재가 매우 참혹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71] 8월 27일에는 전라도 화순군에서 9세의 아이가 큰 바람에 떨어져 죽었으며, 부안의 변산의 금송(禁松) 수백 그루가 모두 뽑혀 나갔으며, 장흥에서는 해산물을 채취하려 바다에 나간 12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114] 또한 강원도에 9월 1일부터 3일까지는 비와 바람이 크게 일어났으며, 같은 달 8일에는 광풍이 불고 비와 우박이 동시에 내렸다.[115] 같은 달 9일에는 제주 목사가 7월 27일에 일어난 강풍과 폭우로 사람이 죽고 풀과 나무가 소금에 절이고 대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소나무 등이 마르는 등의 피해를 보고했다.[116] 또 같은 달 17일에는 강원도에 큰 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도로가 시내로 변했으며, 벼가 떠내려가 모든 들판이 비었다. 또한 우박이 내렸다.[117] 11월 17일에는 나주 영산강에 천둥과 번개와 함께 큰 비가 내려 영산강 일대의 밀과 보리가 모두 잠겼다.[118]
5월 12일, 전근대 농업의 가장 심각한 재앙인 누리 떼가 경기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음이 보고되었다.[59][60] 6월에는 함경도에 누리 떼가 온 들판에 퍼져 각종 곡식을 빨아먹고, 딱정벌레목 곤충(원문에는 갑충(甲蟲)이라고 표현)들이 물밑으로 들어가 해를 끼치며, 참새 천만 마리가 하늘을 뒤덮어 곡식은커녕 도토리와 밤도 열리지 못했다. 이것은 7월 11일에 서울에 보고되었다.[70][71]
기근이 진행되면서 곳곳에서 자식이나 부모를 버린다든가, 아니면 죽인다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월 11일에는 전라 감사 오시수는 갓난아이를 도랑에다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보고했으며,[119] 3월 21일에는 연산(連山: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에 사는 사노비 순례(順禮)가 그의 죽은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먹었는데, 승정원에서는 "실제로는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20] 4월 3일에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는 사람도 있었으며,[121] 같은 달 6일에는 선산부(善山府: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한 여자는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자는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가기도 했다.[122] 또 겨울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늙은 어머니를 길에다 버리는 일도 있었다.[123]
경술년 3월 11일에 경기도의 고을에 쌀 8천석을 구휼이랍시고 내놓았는데, 모두 썩은 쌀이라 백성들이 괴로워했다.[124] 다음날 남인 당수 허적이 산골에 둔전을 만들고 유이민들을 모아 군부대를 만들 것을 건의했는데,[125] 일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유랑생활 하는 백성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3월 20일에 강화 유수 김휘가 갑진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 줄 것을 임금에게 청했다.[126] 하지만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127]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지배층은 아직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4월 3일에 조운선이 침몰하자 평안 감사가 장계를 올려 환곡미 탕감을 요청했고, 침몰한 배의 530석, 미납된 환곡 160석을 탕감했다.[128][129]
5월에 이르러 가뭄이 재난적 수준에 이르자 서울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리하라고 명했다.[130] 또한 외방의 죄수들도 그 심리를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하고,[131] 역시 너그럽게 처리하라고 명했다.[132] 5월 6일에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심리를 시작했다. 이때 형기가 짧은 죄수 472명을 모두 석방할 것을 명하고, 북방에 귀양 간 이가 너무 많다 하여 남방으로 옮기라고 명했다.[133][134] 심리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어,[135] 5월 7일에 끝났다.[136]
가뭄이 끝나고 홍수가 찾아오기 시작한 6월 5일, 대사헌 김수항이 사표를 내며 각종 민생구제책을 건의했다. 김수항뿐만 아니라 여러 신하가 진언했는데, 이 중 실지로 채용된 의견은 하나도 없었다.[137][138] 6월 21일, 충청도의 수재민 구제를 위해 특전을 내렸다.[139] 이런 와중에도 백성들을 수탈하는 못된 무리가 있어, 어민들을 수탈한 벼슬아치 둘이 처벌을 받았다.[140][141] 7월 6일에 전라 감사가 도내에 굶주린 사람이 많다고 하자 다시 특전을 내려 구휼하게 했다.[142] 7월 13일, 그저 소결에 그치지 않고 대대적인 사면령을 반포했다.[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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