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한반도 전역에 벌어진 전쟁 (1950—1953)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 전쟁[35](韓國戰爭, 문화어: 조선 전쟁/조국해방전쟁[36], 영어: Korean War, 중국어 정체: 韓戰/朝鮮戰爭, 중국어 간체: 韩战/朝鲜战争,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삼팔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이 침공 당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유엔군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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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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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및 한반도 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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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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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병력 | |||||||||
최대 병력 (전투부대): |
총합: 2,970,000명[32] 72,000명[31] 총합: 3,042,000명 | ||||||||
피해 규모 | |||||||||
전쟁 이전 미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38]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30분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삼팔선 이남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39]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40]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며 내만주에 핵폭탄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하지못했다.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여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포로 송환 등 여러가지 갈등이 많아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