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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국무원 제1대 총리 (1898–1976)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저우언라이(중국어 간체자: 周恩来, 정체자: 周恩來, 병음: Zhōu Ēnlái, 한자음: 주은래,[2]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주의 혁명가, 중국 공산당의 정치인이다.
1972년의 모습 |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국무원 총리 | |
임기 | 1949년 10월 1일~1976년 1월 8일 |
후임: 화궈펑(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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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4년 9월 27일~1976년 1월 8일 |
전임: 마오쩌둥(1대) 후임: 등소평(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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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898년 3월 5일 |
출생지 | 청나라 장쑤성 화이안 |
사망일 | 1976년 1월 8일 | (77세)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학력 | 중화인민공화국 난카이 대학 중퇴 |
정당 | 중국공산당 |
부모 | 양부 저우이간(周貽淦)[1] 생부 저우이넝(周貽能) 생모 완둥런(万冬人) |
배우자 | 덩잉차오 |
자녀 | 없음 |
종교 | 무종교 |
별명 | 자는 상우(翔宇), 호는 비비(飛飛), 오호(伍豪), 소산(少山), 관생(冠生) |
서명 |
1949년에 이르러 모택동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이래로, 마오쩌둥 정권 하에서 문화대혁명이 거의 끝날 때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를 역임하였다.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다. 톈진 난카이 고등학교와 난카이 대학에서 학업하고 일본 호세이 대학, 메이지 대학, 베이징 대학, 알리앙스 프랑세즈 등에서 머물며 활동하였다. 중국 난카이 대학 재학 중 5.4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국립 베이징 대학에서 리다자오 등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학설연구회, 중공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지역에서 국제공산주의자로 머물기도 하였으며, 1922년에는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하고 귀국한 뒤는 1924년 공산주의자 신분으로 황푸 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이 되었다. 공산당의 영수 천두슈의 지휘 아래, 리다자오, 주더, 마오쩌둥, 취추바이 등과 함께 코민테른의 지도로중공의 폭력 혁명을 지휘하던 중에는 1927년 국민당의 장제스가 주도한 상하이 쿠테타를 맞게 되었고, 이후로는 당시 중국 내에서 난창 봉기, 광저우 코뮌 등의 주도적인 인물로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공산혁명 근거지를 이전하기로 함에 따라 마오쩌둥 등과 함께 대장정을 주도하였고 시안 사건 때는 공산당의 대표로 국공합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로, 소련의 스탈린 하에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1949년 10윌부터 1976년 1월 8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국무원 총리로 있었는데, 지난 날 한때 각각 중공의 부총리로 있던 린뱌오와 덩샤오핑이 각기 총리 권한 대행을 잠시 맡은 적도 있었지만, 사실상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곁에서 중공의 종신 총리로 활동하였다. 1949년 10월 1일부터 195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외교부장 직에 있었고, 1954년 9월 27일부터는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주석직을 넘겨받아 1976년 1월 8일에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마오쩌둥이 국내외 정치와 군사 사무를 주관한 반면, 저우언라이는 마오 주석 곁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등을 도입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소련,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 국제 외교 동맹 사무를 주관하기도 하였고, 이밖에 중공 정무, 국내 교육 이념 투쟁 등의 사무를 총괄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무산계급 독재 혁명을 이끌었던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 혁명가로서 최고위의 권력가로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였으며, 당시 공산당의 최고위의 권력가이었던 마오쩌둥을 평생 동안 보좌하면서 중공의 권부를 지켰다. 자는 상우(翔宇)이고 호는 비비(飛飛), 오호(伍豪), 소산(少山), 관생(冠生)이다.
1898년 3월 5일 청나라 장쑤성 화이안에서 청나라의 가난한 하급 관료 출신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저우의 할아버지는 관리였으나 봉급은 매우 적었고, 아버지는 과거 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서기같은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였다. 태어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후사가 없이 사망한 5촌 아저씨(친할아버지 남동생의 아들)의 양자로 입양되어, 어릴 적부터 양할머니[3]로부터 전통적인 고전교육을 받았고, 서당에 다녔다.
유년기에 민족주의적인 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청나라를 이민족의 식민 체제로 간주하고 청나라와 만주족 출신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워나갔다.
10살 이전에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와 양할머니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그는 고향 화이안을 떠나 동북 지방의 선양에 살고 있던 친숙부에게 갔다. 12살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평등과 혁명 사상과 같은 서구 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해혁명이 터져 1912년에 청나라 왕조가 붕괴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1913년 15세 때 중국 톈진의 난카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졸업 후 일본 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도쿄 도쿄간다구고등예비학교(호세이 대학 부속학교)에서 공부하고 틈틈이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이후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침략적 압력이 중국에 가해지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난카이 대학 재학 중에 5·4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된 뒤 석방되었다.
5.4운동에 참여하여 전국적인 이름을 얻기 시작한 저우는 이후 톈진의 난카이 대학의 철학 전공으로 적을 두었으나, 수업에는 자주 나가지는 않았고 얼마 후 학업을 그만두었다. 그는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텐진학생연합"의 조직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저우는 이 조직의 기관지인 《톈진학생연합회보》의 편집인이 되어 활동했다. 1919년 9월, 12명의 남학생과 8명의 여학생으로 "각오사"(觉悟社)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서 후에 부인이 되는 중국 공산당 당원 덩잉차오를 만났다. 저우는 남학생으로만 조직된 "톈진학생연합"과 여학생으로만 조직된 "애국연합"을 통합하는 조직책 중 한 사람이었다.
1920년 경찰이 인쇄소를 덮치고 "각오사"의 회원을 체포하였다. 저우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고, 이후 다른 28명과 함께 그도 체포되었다. 이후 하지만 경범죄로서 풀려났다. 코민테른은 공산당에 가입한 저우를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려 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리다자오의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리다자오, 장궈타오 등의 베이징 공산주의소조를 거쳐 1921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서 활동하였다. 저우의 프랑스 유학 이후로 중공이 담당하던 "각오사"의 조직은 덩잉차오가 맡았다.
1920년 저우와 196명의 다른 중국인 학생들은 상하이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출발했다. 이것은 "근공검학"(勤工俭学) 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의한 것으로, "중불 교육위원회"가 담당하였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로 가서 프로그램에 의해 일하면서 학업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위원회는 그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게 되었고, 저우는 중화민국의 신문에 해당 교육위원회와 중국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파리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절 덩샤오핑과 알게 되어 교유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코민테른의 중국 공산당의 산하 학생 조직을 이끌었고, 1922년에 중국 공산당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영국, 독일 등을 여행하면서 중국 유학생들을 중국 공산당 산하 단체인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모집하고 그들 중 일부를 선발하여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인정받아 제1차 국공 합작이 성립하자 국민당 측 당원들을 상대로 한 통일 전선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1924년 홍콩을 거쳐 광저우로 돌아왔다.
1924년 1월 쑨원은 국민당이 공산당과 임시적 협력을 하는 것을 모색했고, 중국 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황푸 군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장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열강에 의해 고립되었던 소비에트 연방과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열강 세력을 몰아내어 고립을 탈피할 기회로 보고 무기와 자금, 군사 고문단을 지원했다. 10월에 저우는 이 학교에서 정치부 부주임으로 학교에서 군인들을 기르는 일에 참여하였다. 당시 황푸 군관학교에서 학교장 업무를 담임하고 있었던 사람은 중국 국민당의 실력자 장제스였다.
저우는 곧 중국 국민당 당내의 주도 세력이자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중국 국민당 자체가 군벌의 연합체이며 반공 단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들의 탄압에서 중국 공산당이 이들에 이기기 위해서는 코민테른 지원으로 자체 무장 병력을 조급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부교장을 맡고 있던 다른 공산당 당원 녜룽전과 함께 생도들을 포섭하여 중국 공산당 당원에 가입시켰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직후에는, 광둥의 군인 천츙밍이 광저우 지역을 점령하였다. 저우는 생도들을 이끌고 천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이후는 또한 황푸 군관학교의 군법회의 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저우는 여세를 몰아 다시 산터우 점령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산터우와 인근 지역에 대한 특별행정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이용하여 그는 북벌에 나서고자 했던 중국 국민당에 영합하여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의 세포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해 8월 공산당원 덩잉차오와 5년간의 원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혼인하였다.
쑨원의 사후, 국민당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의 삼두정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곧 국민당 좌파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었고, 장제스는 이를 기회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당의 우파를 통합하여 자신의 지휘 아래 두었다. 1926년 3월 18일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상하이에 있는 동안 장은 당에 있던 좌익을 추방하고 당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몄다. 장은 국민당군의 군함 중산함의 함장과 선원이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들을 모두 체포했고, 더 나아가 네룽전을 포함한 황푸 군관학교의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가 선포되었고, 산터우에서 돌아온 저우도 48시간 동안 체포구금되었다. 저우는 풀려나면서 장을 대면하였고, 장에게 저우는 "국공합작의 단결을 방해하는 일이다"라고 비난했으나, 장은 일부 공산당 과격세력의 음모를 분쇄한 것일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상해로부터 돌아온 보로딘은 장을 신뢰했고, 저우가 성급했다고 힐난했다. 장의 요구에 의해 보로딘은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원의 명부를 장에게 넘겼다. 이 명부에 빠졌던 당원은 저우가 비밀리에 모집한 당원들이었다. 장은 모든 공산당원 장교들을 해임하였고,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국민당 거두 왕징웨이도 유럽으로 보내버려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저우도 다른 공산당원 장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와서 공산 혁명의 선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는 1926년 상하이에 대한 국민당의 공세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주도하여 국민당 북벌군이 상하이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원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시의 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시를 점령하였고 범죄조직인 청방과 삼합회를 동원하여 백색테러를 주도, 자신의 북벌의 원조에 참여했던 공산당 세력 하의 노동자들을 체포 처형하였다(4.12사건 참조). 이를 기화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각지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일어났다.
저우는 1927년 8월 1일 허룽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홍군이 있던 장시 소비에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우는 교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28인의 볼셰비키" 그룹 대신에 스탈린의 중국 혁명의 조언대로 농촌의 공산 혁명 봉기를 우선시하는 마오쩌둥의 노선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권을 잡고 국민당군에 정규전으로 맞서 큰 피해를 낸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서 중심적 권력을 잃고 장정 기간중 마오가 당권을 더욱 공고하게 장악하자 그는 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또한 저우는 상하이 등지에서 취추바이, 마오둔 등과 함께 루쉰 등이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설립해 활동한 지하 좌익작가연맹의 실질적인 지도자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중화민국의 군벌 장쉐량이 국민당이 공산당과 힘을 합쳐 항일 전쟁을 함께할 것을 주장하며 자신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사건이 벌어지자, 저우는 코민테른 진영에서 공산당 측 교섭자로 나서 항일 활동을 위한 국공합작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저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국민당 정부가 있던 충칭에서 공산당 측 대표로 머물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저우는 총리 겸 외교부장을 맡아 구소련이 선두에 서는 공산주의 국가 진영의 한축을 대표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 초기부터 공산주의 혁명가로 활동한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주의자로서 대한민국을 적국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무력 침공하는 것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1955년 제네바 회의와 반둥 회의에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로 활동하였다. 1958년 천이에게 외교부장을 넘겨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종신으로 계속 맡았다.
저우는 삼반오반운동,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마오쩌둥 정권에서 발생한 정치적 투쟁 운동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문화대혁명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던 중 미중 정상회담에 응하기도 했지만,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는 그의 임기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4] 저우언라이 자신도 미․중 정상회담에 마오쩌둥과 함께 미국 측의 주된 상대로 나서 상하이 코뮤니케에 공동서명하였다.
그는 말년에 자신에게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갈 무렵에는 저우 자신이 마오와 사인방에 단지 협조하면서 권력에 순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총리직 사퇴를 만류하는 주변의 요청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하지 않았고 사인방 체제 하에서 문혁 내내 계속 정무를 맡아보았다. 1976년 1월 마오에 8개월 앞서 사망했다. 향년 79세.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 정부의 뜻답게, 자신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중국에 뿌려졌다. 저우는 마오 정권 내내 2인자로서 마오쩌둥을 보필하였으나, 일설에는 마오가 저우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텐진에는 이후 저우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다.
저우의 죽음은 마오쩌둥 사후에도 계속해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사인방에게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문혁에 적극 참여한 와중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나중에 소외를 당한 중국의 혁명 인민 학생 군중들에게는 아주 달갑지만은 않은 소식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저우를 기리기 위해서 청년 마오쩌둥주의자들의 참여로 텐안먼 광장에 모인 추모 인파가 문혁 말기의 시국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며(관련자: 후야오방), 이것이 1976년 천안문 사건이었다.
정치인이자 혁명가로서 그가 중국 공산당에 남긴 영향은 매우 컸다. 그는 사실상 문혁 때까지도 마오쩌둥의 가장 친밀한 정치적 조력자, 사실상 공산당의 행정적 업무에서 오랜 동업자에 해당했던 사람이었다.
그와 아내 덩잉차오(鄧穎超)는 자식이 없어서, 공산 혁명 기간 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 중 유명한 이 중 하나가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李鵬)이라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었으나, 리펑은 죽기 전에 자신이 저우언라이의 양자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북한이 불법으로 일으킨 한국전쟁이 북한의 내전이라고 주장한 바 있고,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삼팔선을 넘어서 반격함으로써 통일을 실현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는 북한의 내전에 대해서 남조선과 유엔군이 북한의 내정에 간섭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문혁 때 자신이 구할 수 있던 중국의 개국에 참여한 정치인들의 죽음을 수수방관한 것에 대한 비판 역시 있다. 비밀로 분류된 중국 공산당의 서류들을 접할 수 있었던 전기 작가 가오원첸이 홍콩(香港)에서 펴낸 저서에 의하면, 저우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과 사인방의 행보를 완화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마오와 사인방에 사실상 협력하거나 굴복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였고,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받고 숙청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우언라이의 이같은 과거의 외교 성향, 행정 사무 이력이 현재까지 적어도 중국 공산당의 외교부 정치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장쑤성 화이안에서 하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5촌 아저씨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유년기에는 양할머니(원래는 종조모)에게 전통적 고전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에는 생부의 친동생인 친숙부에게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27세 때인 1925년 8월 8일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서 덩잉차오(鄧穎超)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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