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ove ads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장쉐량(중국어 정체자: 張學良, 병음: Zhāng Xuéliáng)은 20세기 중엽 시대 중화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만주 태생의 타이완의 정치인인 그는, 중화민국(1949년 12월 8일 이후 타이완)의 예비역 장성급 장교 출신의 군벌 정치인이었다.
장쉐량 張學良 | |
---|---|
중화민국의 동북지역 행정도독 직무대리 | |
임기 | 1928년 6월 3일-1929년 1월 4일 |
주석 | 단옌카이 난징 정부 국가주석 장제스 난징 정부 국가주석 권한대행 |
중화민국의 남경 국민정부 총통부 사정비서관 | |
임기 | 1936년 8월 31일-1936년 11월 13일 |
주석 | 린썬 |
수상 | 장제스 난징 정부 행정원장 |
중화민국의 남경 국민정부 국방부장 비서실 사정비서관 | |
임기 | 1936년 11월 13일-1936년 12월 12일 |
주석 | 린썬 |
수상 | 장제스 난징 정부 행정원장 |
장관 | 허잉친 난징 정부 국방부장 |
중화민국의 남경 국민정부 국방부 사정국장 | |
임기 | 1936년 12월 12일~1937년 2월 25일 |
주석 | 린썬 |
수상 | 장제스 난징 정부 행정원장 |
장관 | 허잉친 난징 정부 국방부장 |
이름 | |
본명 | 장샤오량(張孝良) → 장쉐량(張學良) |
별명 | 자(字)는 한칭(漢卿) 호(號)는 이안(毅庵) 별칭(別稱)은 샤오솨이(小帥)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1년 6월 4일 |
출생지 | 청나라 만저우 지역 랴오닝 성 안산 부 하이청 현 |
거주지 | 중화민국 타이완 성 타이베이 |
사망일 | 2001년 10월 14일 | (100세)
사망지 |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
국적 | 중화민국 |
학력 | 봉천동북육군강무학교 졸(1919년 12월) |
경력 | 중국국민당 고문 겸 당무위원 |
정당 | 무소속 |
부모 | 부(父): 장쭤린(張作霖, 1875~1928) 모(母): 자오춘구이(趙春桂, 1871~1913) 계모(繼母): 라오서우쉔(盧壽萱, 1880~1974) 서모(庶母): 다이셴위(戴憲玉, 1887~1916) 서모(庶母): 쉬수양(許樹暘, 1888~1976) 서모(庶母): 서우이(壽懿, 1896~1966) 서모(庶母): 마웨칭(馬月清, 1905~1976) |
형제자매 | 9남 7녀(배다른 16남매) 가운데 장남(둘째) 동복 누나(同腹姐姐): 장관잉(張冠英, 1895~1968) 첫째 이복 서제(異腹庶弟): 장충량(張忠良, 1904~1906) 첫째 동복 아우(同腹弟弟): 장쉐밍(張學銘, 1908~1983) 셋째 이복 서제(異腹庶弟): 장쉐싼(張學森, 1920~1995) 막내 이복 서매(異腹庶妹): 장화춘(張華春, 1926~1931) |
배우자 | 자오이디(趙一荻, 재혼, 1912~2000, 11년 연하) 위펑즈(于鳳至, 이혼, 1897~1990, 4년 연상) 취루이위(谷瑞玉, 측실, 1903~1931, 2년 연하) |
자녀 | 4남 1녀(배다른 5남매) 맏딸: 장뤼잉(張閭瑛) 첫째 아들: 장뤼쉰(張閭珣) 둘째 아들: 장뤼위(張閭玗) 셋째 아들: 장뤼치(張閭琪) 넷째 아들: 장뤼린(張閭琳) |
친인척 | 바오잉린(鮑英麟, 맏자형) 타오펑페이(陶鵬飛, 맏사위) 천수전(陳淑貞, 맏며느리) 장쥐런(張居仁, 친장손자) 장쥐위(張居禹, 친장손녀) 장쥐신(張居信, 친차손자) 장쥐양(長居仰, 친삼손자) 자오칭화(趙慶華, 계배 장인) 뤼바오전(呂葆貞, 계배 빙모) 취주(谷澍, 첩장인) 원다더(文大德, 첩장모) 장뤼싱(張閭蘅, 이복 서질녀) 장뤼즈(張閭芝, 이복 서질녀) 장쭤타이(張作泰, 이복 첫째 큰아버지) 장쭤푸(張作孚, 동복 둘째 큰아버지) 장쉐청(張學成, 사촌 남동생) 장쉐원(張學文, 사촌 남동생) 바오구이칭(鮑貴卿, 사돈댁) |
직업 | 군인 겸 정치인 및 둥베이 군벌 장군 |
종교 | 유교(성리학)→불교→개신교 |
웹사이트 | 장 쉐량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군사 경력 | |
만주 사변 초반의 전시 당시의 동북군 군벌 및 봉천군사령부 참모장 장쉐량 장군 (1931년 9월 24일) | |
복무 | 봉천군벌(1915년 12월 26일~1935년 4월 17일)→국민혁명군(1935년 4월 17일~1937년 10월 28일) |
복무기간 | 1915년 12월 26일-1937년 10월 28일 |
근무 | 봉천군사령부 참모장(준장, 1930년 1월~1933년 1월) 서북초비사령부 참모장(준장, 1933년 1월~1936년 1월) 서북초비사령부 부사령관(1936년 1월~1936년 8월, 준장→소장) 국민정부 국방부 사정국 국장(1937년 1월~1937년 2월, 소장→중장) 서북초비사령관(1937년 2월~1937년 6월, 중장) 봉천군사령관(1937년 6월~1937년 8월, 중장→대장) 동북군사령관(1937년 8월~1937년 10월, 대장→원수) |
최종계급 | 국민혁명군 육군 원수 |
지휘 | 동북군(1927년 8월, 준장 진급) |
주요 참전 | 중국 국공 내전
|
1901년 6월 4일, 옛 청 제국의 만저우 지역의 랴오닝 성 하이청 현 출신. 그는 20세기 중엽의 군벌 시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36년 12월 12일을 기하여 산시 성(陝西省)의 시안(西安)에서는, 당시 중화민국 대륙 본토의 난징 국민정부 시대의 행정원장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고, 제2차 국공 합작 관련 요구를 한 이른바 시안 사건을 주도하였다.
2001년 10월 14일[1]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향년 100세로 하세한, 그의 자(字)는 한칭(漢卿, 한경)이었으며, 호(號)는 이안(毅庵, 의암)이었고, 별칭(別稱)은 샤오솨이(小帥, 소사)였으며, 개명(改名)하기 이전의 아명(兒名)은 장샤오량(중국어 정체자: 張孝良, 병음: Zhāng Xiáoliáng, 장효량)이었고, 미국식 영어 이름은 피터 장(영어: Peter Chang 피터 챙[*])이었으며, 만주 조선말로는 장학량(張學良)이라 불리었다.
1901년 6월 4일, 군벌 시대 수장 출신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 1875~1928) 선생과, 장(아버지)의 4년 연상의 사별 초배 부인이기도 한, 어머니 자오춘구이(趙春桂, 1913년[2] 향년 42세로 하세.) 여사의 사이에서, 9남 7녀(배다른 16남매) 가운데, 장남(長男)이자 둘째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장쭤린 장군의 장녀(長女)이자 첫째(맏이)인, 장쉐량의 여섯살터울의 동복 누나 장관잉(張冠英, 1895년생~1968년졸)은 1905년에 소학교(小學校)의 졸업반 과정의 1학기를 중퇴한 후, 1907년에 12세로, 바오구이칭(鮑貴卿, 1867년생~1934년졸)의 2남 중 차남(막내)인, 자형 바오잉린(鲍英麟, 1890년생~1965년졸)과 결혼을 하면서부터 일찌감치 출가 및 성가를 하여, 자형과 사이에 1남 1녀를 득(得)하였고, 훗날 1928년 6월 4일, 아버지(장쭤린)를 갑자기 열차 폭격 사고로 여읜 장쉐량은, 나중에 33세의 봉천군벌 육군 준장 때였던, 1931년 10월 8일의 만주 사변 당시에, 28세의 첩실 취루이위(谷瑞玉, 1903~1931)와, 다섯살바기 막내 배다른 서얼 여동생 장화춘(張華春, 1926~1931)을, 관동군이 쏜 포탄 오발 폭격의 비명횡사(非命橫死)로 모두 잃었다.
그리고 장쉐량 그의 아버지 장쭤린 장군은, 대략 1906년경부터 청나라 만저우 지역의 펑톈 군벌의 영수 및 수장이었는데, 오히려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도 친일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중화민국 국민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을 거쳐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원수 직위를 역임하는 등 중화민국 국민정부 과도군사정권 시대 정부수반 직무대리를 역임하다가 1928년 6월 3일, 중화민국 육해공대원수 직위에서는 퇴임과 함께 중화민국 육군 대원수로 전역한 이 날은, 당시 현역 중화민국 육군 준장이었던 장쉐량의 30번째 생일 그 전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튿날(장쉐량 자신의 30번째 생일 당일), 1928년 6월 4일, 아버지 장쭤린이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고모토 다이사쿠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여성 편력과 아편 중독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장쉐량을 오히려 중국 내 영향력 행사에 이용하기 더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장쭤린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쉐량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이후 장쉐량과 그가 이끌게 된 봉계 군벌(봉천군)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
중화민국 대륙 본토 국민정부 시대의 동북군 만주 봉천군사령부 참모장 때인, 1931년 9월 15일에 관동군의 공격이 있었으나, 차라리 부저항을 명령하여 만주 전토를 관동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훗날,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 원인 유발.). 훗날 장쉐량 참모장의 당시 봉천군 사령부 비서장 및 동북군 육군 중위였었던 궈웨이청(郭维城, 1995년[3] 1월 1일, 향년 83세로 사망.)은 장쉐량이 장제스 행정원장의 지시를 따른 것이라 증언하였지만, 훗날 장쉐량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끄는 동북군 무력이 일본군을 감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차라리 부저항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으며, 장제스는 자신에게 저항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4][5]
그러나, 장제스는 동북군에 저항 명령을 내렸음에도 전폭적인 지원은 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만주 사변에서의 부저항 사건의 전모는 장제스와 장쉐량 양 사이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사료되어 보인다.[5]
이후 그는 만주 펑톈(지금의 중공 둥베이 지역 랴오닝 성 선양)의 영향력을 잃었지만, 적지 않은 병력을 보존한 상태였기에, 1935년 4월 17일을 기하여 '국민혁명군'에 편입된 이후에도, 선친 장쭤린 장군처럼 난징(南京)의 국민정부(國民政府)에서도 각종 요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1936년 반(反)공산군 공세를 위해 방문한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산시 성 시안에서 감금하고, 중화권 대륙의 돈독한 평화를 취지로 한, 포괄적인 국공 합작을 요구한 시안 사건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뤄낸다. 그러나 결국, 장제스를 감금한 혐의로써 10년 간의 징역형을 받았고, 출감 후 1949년에 타이완 성의 타이베이로 끌려가서, 역대 국민당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사망한 후, 1993년 12월 1일에 처음으로 중화민국 당국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어, 같은해 12월 15일,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 3월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 지역에서 거주했다.
미국 하와이 지역 현지 시각으로, 2001년 10월 14일 20시 50분(오후 8시 50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자택에서 향년 10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Every time you click a link to Wikipedia, Wiktionary or Wikiquote in your browser's search results, it will show the modern Wikiwand interface.
Wikiwand extension is a five stars, simple, with minimum permission required to keep your browsing private, safe and trans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