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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6·7대 총통 (1910–1988)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장징궈(중국어 정체자: 蔣經國, 병음: Jiǎng Jīngguó, 한자음: 장경국, 1910년 3월 18일 ~ 1988년 1월 13일)은 중국 국민당의 정치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이다.
장징궈 蔣經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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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공식 초상 | |
중화민국의 6·7대 총통 | |
임기 | 1978년 5월 20일-1988년 1월 13일 |
전임 | 옌자간 |
후임 | 리덩후이 |
부통령 | |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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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제9대 행정원장 | |
임기 | 1972년 6월 1일-1978년 5월 20일 |
전임 | 옌자간 |
후임 | 수칭청 (대리) |
대통령 | |
부총리 | 수칭청 |
중화민국의 제11대 행정원부원장 | |
옌자간 행정원회의 | |
임기 | 1969년 7월 1일-1972년 6월 1일 |
전임 | 황샤오쿠 |
후임 | 수칭청 |
총리 | 행정원장 옌자간 |
중화민국의 국방장관 | |
옌자간 행정원회의 | |
임기 | 1965년 1월 14일-1969년 6월 30일 |
전임 | 유다웨이 |
후임 | 후앙치에 |
총리 | 행정원장 옌자간 |
중화민국의 무임소장관 | |
천청, 옌자간 행정원회의 | |
임기 | 1958년 7월 15일-1965년 1월 13일 |
총리 | |
중화민국의 국군퇴제역관병취업보도위원장 | |
유훙춘, 천청, 옌자간 행정원회의 | |
임기 | 1956년 4월 25일-1964년 7월 1일 |
전임 | 옌자간 |
후임 | 챠오추유 |
총리 | |
중국국민당의 제1대 당주석 | |
임기 | 1975년 4월 5일-1988년 1월 13일 |
전임 | 장제스 (총재 직함) |
후임 | 리덩후이 |
이름 | |
별명 | 자(字): 젠펑(建豐) 러시아 이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엘리자로프(Nikolai Vladimirovich Elizarov)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10년 3월 18일 |
출생지 | 청나라 저장성 닝보 부 펑화 현 |
사망일 | 1988년 1월 13일 | (77세)
사망지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학력 | 중화민국 국방참모학교 |
정당 | 중국국민당 |
부모 | 장제스(부) 마오푸메이(생모) 천제루(계모) 쑹메이링(계모) 야오예청(서모) |
형제자매 | 장젠화(동복 누이동생)[1] 장웨이궈(이복 아우) 장야오광(이복 누이동생) |
배우자 | 초배 펑푸넝(馮彿能, 이혼; 결혼 기간: 1926년~1927년) 계배 장팡량(蔣方良, 재혼; 결혼 기간: 1935년~1988년)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내연 기간: 1940년~1942년) |
자녀 | 장샤오원(적장남) 장샤오장(적녀) 장샤오옌(서자) 장샤오쯔(서자) 장샤오우(적차남) 장샤오융(적삼남) |
종교 | 불교 → 개신교(감리회) |
군사 경력 | |
복무 | 소련군 국민혁명군 중화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29년 8월 8일-1937년 3월 2일 (소련군) 1937년 3월 2일-1947년 12월 25일 (국민혁명군) 1947년 12월 25일-1968년 12월 29일 (중화민국 육군) |
근무 | 자유중화민국 타이완 국방부 |
최종계급 | 중화민국 육군 대장 |
지휘 | 중국국민당 군사교육위원장 자유중화민국 타이완 국방부 장관 |
주요 참전 | 중일 전쟁 |
자(字)는 젠펑(建豐)이며 소련 거주 시절 러시아식 이름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옐리자로프(Nikolai Vladimirovich Elizarov)이다.
장제스(蔣介石)의 맏아들로 중화민국 정부의 요직을 거친 그는, 현역 육군 대장 시절이던 1965년 1월 14일을 기하여 중화민국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여 이후 1965년 1월 14일부터 1969년 6월 30일까지 4년을 넘도록 중화민국 국방부 장관 직책을 지냈고, 특히 중화민국 국방장관 재직중이던 1968년 12월 29일을 기하여 중화민국 육군 대장 예편하였으며 1972년부터 1978년까지는 중화민국 수상인 중화민국 행정원 원장을 지냈고 그 사이 1976년부터 1977년까지는 중화민국의 총통 권한대행을 1년간 지냈으며, 197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중화민국의 총통을 지냈다.
장징궈는 장제스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마오푸메이(毛福梅)의 아들로 저장성(浙江省) 펑화 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제스는 그를 엄격하게 공부시켰으며 아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192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자 했는데, 당시는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중산 대학에서 카를 라데크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열정적으로 공부했으며 어느 정도 트로츠키주의로 기울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따로 그를 불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라고 요청하고 그가 수락하자 그때 소련 공산당에 가입이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장징궈는 이를 부인했다.
1927년 장제스가 4.12사건으로 공산당을 학살하자 장징궈는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에 남을 것을 선언했다. 그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톨마체프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우랄 산맥의 철강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35년 벨라루스계 러시아 여자인 장팡량(蔣方良)과 결혼했다.
장징궈는 1936년에도 아버지의 정책을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나 소련에 체류한 것 등이 모두 강요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1937년, 중국에서 장제스가 공산당과 새로운 연합전선을 구축하자 스탈린은 장징궈가 소련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소련에서 귀국한 장징궈는 국민당 정권에 소속되어 일을 맡았다.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인기를 만회하고자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를 엄단했고 화폐 개혁을 하는 등 꺼져가는 국민당의 불꽃을 살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싶었으나, 나중에 그의 계모인 쑹메이링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장제스는 장징궈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 후로 그와 쑹은 평생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후퇴한 뒤, 장징궈는 타이완에 자리잡은 중화민국 정부의 군대와 안보기관의 책임자로 국민당을 지휘했고, 1965년에는 국방장관이 되었다. 1972년, 행정원장(총리)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장제스가 병석에 누운 뒤부터 장징궈는 사실상 중화민국의 통치자로서 활동했다.
1978년, 중화민국 6대 총통으로 취임하여 1988년, 7대 총통 임기 중간에 서거하였다.
그는 정부의 부정 부패를 척결하고 정실(情實) 인사를 배격했으며 본토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입법원과 행정원에 본성인(本省人: 명 말기 본토에서 건너간 한족) 출신 인사들을 더 많이 기용하여 정부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1970년대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장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중화민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그는 중화민국의 정치적 안정과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애썼다.
1987년 7월 15일에는 국부천대 이후 38년 간 선포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하여 현실적인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88년 1월 13일, 장징궈는 사망하였다. CIA에 포섭된 장셴이(張憲義) 대만 국방부 산하 핵연구소 부소장(대령급)이 핵 개발 자료를 들고 미국으로 망명한 3일째 되는날이었다.[2]
장징궈는 장팡량(蔣方良)과 혼인 관계 중 내연녀 장야뤄(章亞若)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샤오옌(蔣孝嚴)과 장샤오쯔(章孝慈)를 얻었다. 이 중 장샤오옌은 자신이 장징궈의 아들임을 주장했으나 장징궈 부인 장팡량의 반대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장샤오옌은 2007년 3월 31일을 기하여 장징궈의 아들로 본성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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