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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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도교(道敎)를 다루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한국의 도교가 한국 고래의 민족 고유 신앙에 원류를 두고 있다는 관점에서 한국의 도교를 설명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도교가 중국에서의 도교, 즉 중국 민족의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황로사상(黃老思想)을 중심으로 정립된 후한(後漢: 25~220) 말기의 기원후 2세기 전반기에 장각(張角: ?~184)이 개창한 태평도(太平道)와 장릉(張陵: 34~156)이 개창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도교의 원류로 보는 관점에서 한국의 도교를 설명하는 경우이다.[1]
이런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관점과는 달리, 한국의 도교는 민족 고유 신앙 위에서 중국의 황로사상(黃老思想)과 신선사상(神仙思想)에다 유교 · 불교를 덧붙여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정한 시대의 사상이나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도 그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다.[1]
먼저, 고조선의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는 다분히 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적 도교의 색채는 아니며 한국 특유의 도교적 색채의 신앙이다. 여러 옛 기록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고대 사회의 시조에 관한 신화에 나타나는, 태(胎) · 란(卵) · 습(濕) · 화(化)의 사생설(四生說)에 의한 도교적 유래와 출생은 이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신이(神異)하고 비상(非常)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신선설(神仙說)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그리고 단군 신화에 나타나 있는 군장(君長)과 천신(天神)과의 관계, 제사장(祭祀長) 칭호, 그리고 신단(神壇) 설치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도교가 아직 고대 한국에 유입되기 이전에 이미 도교 사상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1]
또한 고대 한국, 즉 삼국 시대 역시 민속 신앙에 의한 설화적 · 신화적 사회 구조 아래 사상 · 문화 등 여러 제도가 형성되어 오다가 도교가 삼국으로 유입되었다.[1]
고구려의 경우, 중국의 남북조시대 때 도교(특히, 신선사상과 도가의 무위사상)가 고구려로 유입된 흔적이 있다. 또한 영류왕 7년(624년)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도사와 함께 천존상(天尊像)과 도법을 보내 그 도사가 《도덕경》을 강의하였다.[1]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아들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와의 싸움터에서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가(道家)의 글을 인용하여 추격을 중지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이로써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국의 도교(도가)가 백제에 유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신라의 경우, 삼국 중 가장 고유 신앙이 깊어 낙천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생활양식이 중국의 도교 사상인 무위자연주의(無爲自然主義)와 결합되기 알맞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중국 도교의 유입은 제34대 효성왕(孝成王) 2년, 당현종(唐玄宗)이 사신을 시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과 여러 가지 문서를 보내 왔다는 사실이 있으나 신라 역시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민족 고유의 민간 신앙에 의한 산신사상(山神思想212)·수신사상(水神思想)·무속신앙(巫俗信仰) 등 정령사상(精靈思想)인 자연숭배(自然崇拜) 신앙이 깊었고 이에 원류를 둔 도풍과 선파(仙派)가 존재했었다. 이렇게 삼국 시대는 민족 고래의 고유신앙을 바탕으로 중국 도교와의 교섭은 도참사상(圖讖思想)이 널리 보급되고 때를 같이하여 전래된 불교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사상과 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그 후 남북국 시대를 거쳐 고려 초기에는 종교를 왕조 통일 국가를 추진하는 활력으로써, 태조 왕건(王建)은 훈요십조(訓要十條)[2]를 제창하여 교화 정치 사상(敎化政治思想)을 정립시켰으며, 국교로는 신라에 이어 불교를 숭상하였다가 점차 유·불·도를 다 포용하였고 도교적 면으로는 팔선사상(八仙思想), 팔관회(八關會), 초제(醮祭)제도가 있었으며, 관청 기관으로 복원관(福源觀)·대청관(大淸觀) 등이 있어 민속 신앙으로서 서민층에까지 깊게 파고들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유교의 정주학(程朱學)이 들어와 판을 치게 되자 도교는 불교와 함께 지식 계급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었고, 조선 전후기를 통하여 유교를 국교로 하는 정치 제도 아래 사림(士林)으로부터 대단한 비판을 받는 가운데도 대청관과 소격전(昭格殿)은 존립하여 각급 초례(醮禮)가 봉행되었으며, 중종 때에 조광조(趙光祖) 등의 유학자에 의하여 소격전이 혁파되었다가 4년 뒤 복설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당파 싸움은 많은 사림파(士林派) 가운데 은거(隱居)하는 청담풍(淸談風)이 일어나 현실에 실망한 유생(儒生)들이 유가에 대립하는 도가(道家)를 야인정신(野人精神)의 귀의처로 삼고 산야(山野)에 파묻혀 수도하는 단학파(丹學派)를 형성하였다.
최근세에 와서는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에 교리를 둔 선음즐교와 유·불·선 3교를 합일하는 종지를 내걸고 일어난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과 강일순(姜一淳)을 교조(敎祖)로 하는 50여 개파의 증산교단(甑山敎團) 등 민족 사상에 기틀을 둔 신흥 종단이 난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중국 톈진(天津)으로부터 장서전(張瑞筌) 등에 의하여 전래한 일관도(一貫道)는 각기 대한도덕회(大韓道德會)·국제도덕협회(國際道德協會)라는 종교 단체로서 성리심법(性理心法)을 전하고 있다. 한국 도교는 중국의 성립 도교(成立道敎)[3] 가 들어오면서부터 유교의 각종 경서와 불교의 경전과 함께 많은 도서(道書)가 전래하여 사상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