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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하학궁(稷下學宮, Jixia Academy)은 고대 중국 전국시대에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 소재했던 학문기관이다.[1] 임치성 서문인 “직문” 밖에 위치해서 직하학궁이라고 했다.[2] 여기서 “직”이란 농업의 신 후직을 가리킴이다.
『사기』에 따르면,[3] 전제 선왕이 기원전 318년경 설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안칠자 서간은 선왕의 조부 전제 환공이 학궁을 세웠다고 말했으며, 사마천의 서술 역시 선왕이 학궁을 처음 세웠다기보다 복구했다는 쪽에 가깝다.[4] 직하학궁의 역사적 성격은 “국가가 학문을 국가적 기능으로 생각하는 명백한 신념으로 학문을 후원한 최초의 사례”로 요약된다.[5] 그러나 일각에서는 직하학궁의 설립은 강제를 몰아낸 찬탈로 성립되어 원래부터 취약한 전제 정권의 정통성이 환공의 친족숙청극으로 더욱 훼손되자 이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수행한 정책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6]
당시 열국의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멀리서부터 학궁에 찾아와 합류했다. 대표적으로 도가의 전변・신도・팽몽・장주,[1] 음양가의 추연, 묵가의 송견, 유가의 맹자[7]・순자[8]・순우곤 등이 있다. 『맹자』에서 맹자가 제 선왕과 대담하는 대화편들이 이 직하학궁 시절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직하학궁은 황로사상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관자』와 『내업』 같은 텍스트들이 여기서 집성되었다.[5] 일각에서는 『도덕경』도 여기서 성립된 것이라고 본다.[2]
직하학궁의 학사들은 거처와[3] 급료를[8] 제공받았을 뿐 아니라, 사회적 위신에 있어서도 명예로운 직위로 대접받았다. 총장격인 좨주(祭酒)와 선생(先生)급 학사들은 사(士)가 아닌 상대부(上大夫)의 격으로 대우받아 부역을 면제받았다.[8] 『염철론』 제11장을 보면, “제 선왕은 학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했다. 맹자와 순우곤 같은 이들은 고위직이 수여되어도 무시하고 유세(강의)하기만 즐겼다. 이러한 학자들이 직하학궁에 천여 명이나 모여 토론했다. 그 때는 공손홍과 같은 사람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9]
직하학궁은 제 민왕의 치세까지 번영하다가, 기원전 284년 연나라가 임치를 함락시키고 약탈할 때 망해 버렸다. 하지만 사마천은 직하학궁이 전국사군자의 식객단 같은 비슷한 제도들의 전범이 되었다고 평가했다.[10] 진나라의 여불위 역시 비슷하게 학자들을 후원해서 『여씨춘추』를 편찬했다.
2022년 2월 산동성 치박시에서 직하학궁 유적이 발굴되었다. 유적은 동서로 210 미터, 남북으로 190 미터의 사다리꼴 형태였으며, 면적은 약 4만 평방미터에 달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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