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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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로(柳赫魯 / 柳赫老, 1851년 3월 9일~1945년 5월 15일)는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참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고위 관료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오위장으로 가담, 참여하여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었으며, 통신연락과 정찰 임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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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호는 설악(說嶽), 설강(雪岡), 설강산인(雪岡山人), 일본 이름은 야마다 유이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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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충청남도 아산군 읍내면 송하리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복무 | 조선 오위도총부 대한제국 육군 |
복무기간 | 1873년 ~ 1884년 12월 12일 1894년 8월 ~ 1907년 9월 19일 |
근무 | 오위도총부,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
최종계급 | 오위장 조선 조련국 교관 대한제국 육군 부령 |
지휘 | 오위도총부,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포공국장 |
주요 참전 | 갑신정변 |
기타 이력 | 군무아문참의, 서북영림청 사무관, 평안북도관찰사, 경기도참서관, 전라북도장관, 충청북도지사, 전라북도지사 |
1873년(고종 10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882년(고종 19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 어윤중 등의 수행원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1883년(고종 20년) 5월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1884년 5월 귀국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정변 당시 행동대장의 한 사람으로 군사들을 이끌었으나 3일만에 실패하고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귀국,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 등을 거쳐 1895년 7월에는 박영효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해의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광무 7년) 귀국하여 군무아문참의, 육군부령(陸軍副領), 육군 포공국장(砲工局長) 등을 지냈다. 1907년(융희 1년) 12월 평안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910년 10월 한일합병 조약 후 경기도참여관으로 강등되었다. 1916년 충청북도지사, 1917년 중추원 찬의, 1919년 전라북도지사를 거쳐 1921년 중추원 참의로 전임되었다. 1940년 매일신보에는 사망 기사가 나왔으나 1945년 광복 직전까지도 생존했다는 설이 있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설악(說嶽), 설강(雪岡), 설강산인(雪岡山人)이다. 일본식 이름은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1])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1] 오경석(吳慶錫)·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