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왕조 제2대 프랑크 국왕이자 초대 신성 로마 황제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카롤루스 대제(라틴어: Carolus Magnus 카롤루스 마그누스[*], 독일어: Karl der Große 카를 데어 그로세[*], 프랑스어: Charlemagne 샤를마뉴[*], 영어: Charlemagne 샬러메인[*], , 스페인어: Carlomagno 카를로마뇨[*], 740년 혹은 742년 4월 2일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는 카롤루스 왕조 제2대 프랑크 국왕이자 초대 로마인의 황제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라틴어 발음을 따른 카롤루스 마그누스, 프랑스어 발음을 따른 샤를마뉴, 독일어 발음을 따른 카를 대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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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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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의 카롤루스 초상화 | |
로마인의 황제 | |
재위 | 800년 12월 25일-814년 1월 28일 |
대관식 | 800년 12월 25일 |
공동재위자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813년–814년) |
후임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
랑고바르드인의 왕 | |
재위 | 774년 7월 10일-814년 1월 28일 |
대관식 | 774년 7월 10일 |
전임 | 데시데리우스 |
공동재위자 |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 (781년–810년) 베르나르두스 (810년–818년) |
후임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
프랑크인의 왕 | |
재위 | 768년 10월 9일-814년 1월 28일 |
대관식 | 768년 10월 9일 |
전임 |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
공동재위자 | 카를로마누스 1세 (768년–771년) 카롤루스 이우니오르 (800년–811년) |
후임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
이름 | |
휘 | 카롤루스 |
별호 | 마그누스 |
신상정보 | |
출생일 | 742년 4월 2일(혹은 740년, 747년) |
출생지 | 프랑크 왕국 왈롱나 주 에르스탈 모처 (불확실) |
사망일 | 814년 1월 28일 |
사망지 | 프랑크 왕국 아헨 (현재 독일령) |
국적 | 프랑크 왕국 |
왕조 | 카롤루스 왕조 |
부친 | 피핀 3세 |
모친 | 베르트라다 드 랑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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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묘소 | 아헨 대성당 |
서명 |
카롤루스는 서부, 중부유럽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크게 확장했다. 재임하는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동로마 황제와 대비되는 서로마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되고서 교회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국내외적인 카롤루스의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성 로마 제국 등 재임연표에서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동생인 카를로만과 함께 왕국을 통치하였고 후에 사이가 나빠지자 전쟁의 위기가 닥쳤으나 카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프랑크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778년부터 802년까지는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인들을 격퇴하였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778년부터 800년대까지 수시로 원정,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현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에서 카롤링거 왕조를 창업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한 최초의 인물이자 로마 제국 이후 처음으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시킨 왕으로 유명하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후 그는 '대제'로 번역되는 마그누스(라틴어) 또는 마뉴(프랑스어)의 칭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