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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불교 승려 (1327–1405)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무학(無學: 1327년 10월 5일(음력 9월 20일)~1405년 10월 3일(음력 9월 11일)[1])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승려이다.[2]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법명은 무학(無學) · 계월헌(溪月軒)이다.[2][3]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다.
조선 초기 변계량이 지은 무학대사비문에 의하면, 무학은 1327년 경상도 삼기군에서 박인일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 밖에 출가 이전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4]:87
무학은 1344년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5],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원나라에 있는 동안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 그 후 고려 말기의 저명한 승려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2]
일설에 무학은 나옹 혜근을 이어 수좌승이 되었다고 하나,[6]:257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혜근은 말년에 회암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1397년에 이색이 지은 보제선자 사리석종비의 등에 의하면 무학은 회암사가 아닌 청계사의 주지를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무학이 혜근으로부터 수좌가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이야기 자체는 오직 무학의 주장에 근거해 변계량이 지은 무학대사비문에만 등장하는데, 무학대사비문에는 나옹 혜근에 관한 언급이 굉장히 높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반면 나옹 혜근의 비문에는 무학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정을 고려할 때, 무학의 주장은 그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4]:88-90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직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2][3]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아래의 두 기사를 제외하면 조선 전기에는 무학이 조선의 천도에 영향을 끼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4]:96-97
(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능히 알 수 없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계유 2월 11일의 기사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어떠냐?”자초가 대답하였다.“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이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선발하여 성쌓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
조선 초기에 기록상 확인되는 무학의 역할은 왕사로서 왕의 불교 신앙을 보좌하는 본래의 직무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고려의 도성 개경의 중앙에 연복사에는 고려 초기에 건축되었다가 허물어진 5층탑이 있었는데, 고려 말기에 거듭 실패하였던 5층탑의 중건은 외려 조선 건국 후 1392년에 들어 성공하기에 이른다. 태조실록에 중건 과정마다 선법을 강설한 것은 무학대사임이 확인되므로, 그 중건에는 무학의 역할이 상당하게 작용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4]:98-99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7]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3]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8]
그러나 무학의 활동은 철저하게 불교 신자로서 불법과 풍수를 존중한 태조의 개인적인 후원 아래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숭유억불을 제창한 유교국가 조선에서 무학이 활동 공간은 넓지 않았다. 심지어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무학에 대한 비난이 공공연하게 정치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태종 역시 왕으로써 그러한 비판에 참여하였다.[4]:100-102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년)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3] 사망 후 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9]
무학은 여러 야사와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나, 설화들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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