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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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 사화가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1]
간략 정보 무오사화 戊午士禍/戊午史禍, 참가자 ...
무오사화 戊午士禍/戊午史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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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연산군·유자광 등 훈구파 |
장소 | 조선 |
날짜 |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
사망자 | 김일손 등의 사림파 |
원인 |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음 |
결과 | 김종직 부관참시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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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자, 훈구파는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와 갈등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훈구파는 성종실록 편찬에 원고가 된 사초(史草)중에 《조의제문》의 불충함을 명분으로하여 연산군의 지원속에 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지난 계유정란(1453)때 있었던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에 격노한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초를 근거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견제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