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 전투
크로아티아와 유고 인민군 사이 막사와 초소를 중심으로 벌인 전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막사 전투(크로아티아어: Bitka za vojarne 비트카 자 보야르네)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인 1991년 중후반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이후 크로아티아 육군이 됨)과 크로아티아 경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교전이다. 전투는 크로아티아 전역의 수많은 유고 인민군 막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크로아티아군이 유고 인민군 막사, 무기고, 기타 시설을 봉쇄하면서 시작되었다. 9월 14일 대대적으로 시작된 전투 목표는 크로아티아가 자국군이 점령한 영토 내 유고 인민군 진지를 무력화하고 장비가 열약한 크로아티아군을 위한 무기와 탄약 보급을 확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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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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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
격파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T-55 전차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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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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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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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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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미상 |
사상자 미상 포로: 전차 250대, 포 400~500문, 해군 선박 36척, 소화기 18만정, 유고 인민군 장교 3천명 |
막사 전투는 1990년 8월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킨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와 크로아티아 정부, 또한 유고 연방을 지키러는 유고 인민군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발생했다. 동시에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막사 전투 이후 9월 초 봉쇄된 막사 구호를 작전 계획에 추가해 유고 인민군이 급하게 유고 인민군의 공세 작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유고 인민군의 진격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게 대부분 막혔으며 극소수의 유고 인민군 막사만 구출에 성공했다.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은 소규모의 고립된 유고 인민군 초소와 다수의 무기고 및 막사를 점령했으며 특히 유고 인민군 제32(바라주딘 주둔) 군단 전체의 막사가 함락되었다. 이 공격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전차 250대, 포 수백문, 대량의 소화기와 탄약 등 상당한 무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초기 유고 인민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부 유고 인민군 시설은 전투 없이 항복했으나 그 외에 점령에 맞서 무력 저항을 펼친 시설도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병영이 시가지에 있어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포로로 잡은 유고 인민군 대원에 대한 학대나 살해 혐의, 혹은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가 제기되었으나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피고인은 미결로 끝났다.
1991년 11월 유고 인민군과 크로아티아는 봉쇄를 종료하고 크로아티아에서 유고 인민군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1992년 1월 4일까지 두브로브니크 인근과 비스섬, 라스토보섬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철수가 완료되었다. 1992년 여름까진 유고 인민군이 나머지 지역에 주둔했다.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에서 통치한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밴스 계획 평화안에 따라 유엔 보호군을 주둔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