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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
1991년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크로아티아 내 진격 작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유고슬라비아 해군과 유고슬라비아 공군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크로아티아 육군(HV) 사이 있었던 교전이다. 유고 인민군은 원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존속을 위해 파병되었으며 본 전역의 초기 계획은 크로아티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1990년에 선출된 크로아티아 지도부의 제거였다.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으로부터 무기를 압수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90년 8월 시작된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의 반란에 개입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부터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준군사조직과 국가방위군 혹은 크로아티아 경찰 사이 완충지대 형성을 위해 유고 인민군이 자주 배치되었다. 사실 이러한 유고 인민군의 완충지대는 종종 반군의 영토 이득을 보장하고 유고 인민군과 크로아티아 간 관계를 점점 악화시켰다. 이후 유고 인민군의 작전게획은 전역 시작 직전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게 포위된 인민군 막사의 포위를 풀고 구출하는 작전으로 변경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여러 유고 인민군 시설을 포위점령하여 이전에 제대로 무장하지 못했던 부대를 무장하고 새로운 크로아트인 징집병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교를 모집할 수 있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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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당시 문서를 확인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교의 모습. 에르두트 인근을 행진하는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준군사 병사의 모습. 부코바르에서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건물의 모습. 카를로바츠 인근에서 격파된 유고 인민군 T-34 전차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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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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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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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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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1991년 9월 기준): 병력 145,000명 전차 1,100대 장갑차 700대 포 1,980문 |
(1991년 9월 기준): 병력 58,000명 (1992년 1월 기준): 병력 155,772명 전차 216대 장갑차 127대 포 1,108문 | ||||||||
피해 규모 | |||||||||
1,279명 사망 | 3,761명 사망 |
본 전역은 1991년 9월 20일에 사실상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비교적 경미한 공세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이 달 말까지 세르비아의 낮은 소집응답률 때문에 심각한 시간 지연과 인력 부족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10월 초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그 동맹군이 유고 인민군을 많이 장악하면서 원래의 전역 목표는 더 축소되었다. 이후 전역 목표는 크로아티아 정부가 세르브계가 다수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내 일부 지역에 대한 접근을 거부하고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 전역은 11월 말에서 12월 초 부코바르 전투와 두브로크니크 포위전 공격으로 절정에 달했다. 크로아티아 육군의 제한된 반격과 진격으로 전장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런 전략적 상황으로 크로아티아 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이 감독하는 휴전안인 밴스 계획이 수립되었다. 1992년 1월 2일에는 휴전 이행에 대한 사라예보 이행 협정이 채결되면서 전역이 종식되었다. 그럼에도 유고 인민군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대체되면서 크로아티아에서 전부 철수하기까지 수 달이 걸렸다. 1991년 한 해에만 7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40~60만명이 넘는 국내실향민이 발생했다. 또한 전역 수행 결과로 1,700명 이상이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