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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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농민전쟁(獨逸農民戰爭, 영어: German Peasants' War 독일어: Deutscher Bauernkrieg 도이처 바우에른크리그[*])은 1524년에서 1525년까지 중앙유럽의 독일어권 지역을 준동시킨 민란이다. 30만 명의 농민들이 봉기했으나, 빈약한 무장상태 및 귀족들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10만여 명이 학살당한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1] 생존자들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었고, 그들이 추구했던 목표들은 거의 달성되지 않았다. 보다 과거의 분트슈 운동이나 후스 전쟁처럼, 독일농민전쟁은 급진적 성직자(주로 재세례파)들의 지지와 지도를 받은 농민들의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반란의 성격을 가졌다. 독일농민전쟁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고 넓게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전쟁은 1525년 중반에 최고조였다.
독일농민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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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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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농민군 | |||||||
지휘관 | |||||||
토마스 뮌처 † 미하엘 가이스마이르 한스 뮐러 폰 부르겐바흐 † 벤델 히플러 † 플로리안 가이어 폰 기벨슈타트 † |
게오르크 3세 폰 발트부르크차일 필리프 1세 폰 헤센 방백 게오르크 폰 작센 공작 하인리히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괴츠 폰 베를리힝겐 | ||||||
병력 | |||||||
300,000+ | 6,000–8,500+ | ||||||
피해 규모 | |||||||
70,000-100,000+ | Minimal |
독일농민전쟁은 오늘날의 독일연방공화국 서남부 및 알자스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시작된 민란들로 시작되어, 이후 독일 중부와 동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까지 확산되었다.[2] 독일에서의 봉기가 진압된 뒤에도 스위스의 몇몇 칸톤에서 잠시 봉기가 불타올랐다.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킨 직후부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은 민주적 성격으로 인해 권위를 가진 일부를 제외하면 다들 평등했기 때문에 지휘 구조를 갖출 수 없었고, 포병대와 기병대도 부족했다. 그들은 다른 농민병들과 비교하면 우수한 장비를 가졌으나 귀족 군대와 비교해서는 군사적 경험도 없고 장비의 질도 떨어져서 일부 정예를 제외하면 본격적으로 무장한 귀족 군대를 살상할 수 없었다. 반면 그들이 맞서야 했던 귀족들은 숙련된 군사지도자들이었으며, 장비와 규율을 갖춘 군대와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어서 대부분 전투보다 학살에 가까운 싸움을 했다.[3] 이 전쟁으로 대략 농민 10만 명이 죽었으나 끝난 후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농지 파괴와 같은 귀족들의 공격과 무관심 아래에 기아 등으로 죽어갔다.
독일농민전쟁은 종교개혁의 일부 원칙과 수사를 내포해 농민들의 영향력과 자유를 추구했다. 급진파 종교개혁가들과 재세례파가 민란을 선동하고 또한 지지했으며, 그들 중 토마스 뮌처가 가장 유명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종교개혁의 우두머리인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이 농민군을 "도둑놈들"이라고 비난하고 귀족의 편을 들었다. 루터는 악마의 소행을 저지르는 농민들은 미친 개와 같다며, 귀족들에게 그들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4] 역사학자들은 독일농민전쟁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아 왔고, 독일농민전쟁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사회사학자 및 문화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