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공화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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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 Guatemala 레푸블리카 데 과테말라[*], 문화어: 과떼말라)은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나라이다. 북쪽과 서쪽은 멕시코, 동쪽은 벨리즈와 카리브해, 남동쪽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남쪽은 태평양과 접해 있다. 인구는 약 1660만 명이며, 이는 중앙아메리카 전체에서 제일가는 수치이다.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는 과테말라시티이다.
과테말라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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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ública de Guatemal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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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스페인어: El País de la Eterna Primavera (영원한 봄의 땅) | ||
국가 | 과테말라의 국가 | ||
과테말라의 위치(진녹색) 서반구(회색) | |||
수도 | 과테말라시티 북위 14° 36′ 48″ 서경 90° 32′ 07″ | ||
정치 | |||
정치체제 | 공화제, 단일국가, 대통령중심제 | ||
대통령 |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 ||
부통령 | 카린 에레라 | ||
역사 | |||
독립 | 스페인, 멕시코 제1제국에서 독립 | ||
•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 •멕시코 제1제국으로부터 독립 | 1821년 8월 21일 1823년 | ||
지리 | |||
면적 | 108,890 km2 (103 위) | ||
내수면 비율 | 0.4% | ||
시간대 | UTC-6 (UTC-6) | ||
DST | 없음 | ||
인문 | |||
공용어 | 스페인어 | ||
인구 | |||
2015년 어림 | 16,176,133명 (68위) | ||
인구 밀도 | 134.6명/km2 (55위) | ||
경제 | |||
GDP(PPP) | 2004년 어림값 | ||
• 전체 | $627.8억 (71위) | ||
• 일인당 | $4,155 (143위) | ||
GDP(명목) | 2004년 어림값 | ||
HDI | 0.581 (133위, 2012년 조사) | ||
통화 | 케찰 (GTQ) | ||
종교 | |||
종교 | 기독교 84%[1] 무종교 15% 기타 종교 1%[2] | ||
기타 | |||
ISO 3166-1 | 320, GT, GTM | ||
도메인 | .gt | ||
국제 전화 | +502 |
과테말라라는 말의 기원은 원주민에서 나온 것으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혹자는 그 이름이 마야어로 "나무의 땅"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나와틀어로 "Quauhtitlan"인데 이것은 "나무들 사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정복 기간 중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를 수행하였던 틀라스칸테칸(Tlaxcaltecan) 군사들이 이 지역에 붙인 이름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말로 "키체"로 번역되며, 이것은 "많은 나무"를 뜻한다. 또 다른 생각은 과테말라라는 이름이 나와틀어로 "coactlmoctl-lan"가 스페인어로 변형된 것인데, 이것은 "뱀을 먹는 새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과테말라의 독수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과테말라에 인간이 정착했던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흔적은 적어도 기원전 1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과테말라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 흑요석 화살촉 등 몇 가지 증거들로 미뤄볼 때 기원전 18,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3] 과테말라 선주민이 채집 및 수렵 생활을 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그러나, 페텐 분지(Petén Basin)와 태평양 해안에서 나온 꽃가루 샘플은 기원전 3500년경, 옥수수 문명이 발달했었음을 보여준다. 고원지대인 엘 키체(El Quiché)주와 중부의 태평양 해안에 위치한 에스쿠인틀라(Escuintla)주 시파카테에서 고고학적 유물(기원전 6500년)이 발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대 과테말라의 영토는 마야 문명의 핵심을 형성했다.
아메리카 대륙은 1492년 10월 12일에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당한후 황금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는 유럽의 탐험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521년,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4] 1533년 피사로에 의해 잉카제국이 정복당하며 신대륙은 발견과 탐험의 시대에서 정복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5]
스페인에 의한 과테말라 지역 정복은 1523년에 코르테스 휘하의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가 소코누스코(Sononusco) 지역 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6] 복속시킨 원주민 부족들과 함께 구성된 원정대는 남으로 이동하여 과테말라의 키체 왕국을 침공하였다. 키체 왕국의 전사들이 강하게 저항하였으나 1524년 올린테페케(Olintepeque) 계곡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정복에 성공하였고[7] 같은해 7월 25일에 수도를 건설하여 산티아고로 명명했다.[8]
1542년, 스페인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중에 알바라도가 정복한 지역을 '과테말라 총독령'으로 분류한후 총독청을 설치하여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식민통치에 들어갔다.[9] 과테말라 총독청의 관활지는 현재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멕시코 치아파스주 지역에 해당하며 누에바에스파냐에 속했으나 사실상 자치권이 행사되었다.[9] 총독청이 설치되어 있는 과테말라의 수도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중미 지역의 정치, 경제, 사법, 행정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1527년과 1541년에 두 차례나 수도를 이전하였으나 1775년 12월 1일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수도를 현재의 과테말라시로 이전하였다.[8] 멕시코나 볼리비아와 달리 금과 은 등 희귀금속이 적어 카카오, 인디고, 면화, 담배 등 수익성이 좋은 작물을 재배하였는데, 스페인이 독점 교역 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밀무역이 성행하였다.[10]
독립 무장투쟁을 벌리던 멕시코의 이달고와 모렐로스 신부가 순교한후 이투르비데가 1821년 2월 이괄라 계획을 선언하며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과 1821년 8월에 코르도바 조약을 체결하며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11] 과테말라 총독은 중미 지역대표들을 소집하여 진로를 논의했다. 스페인과 단절후 멕시코와의 통합이 결정되었고 1822년 1월 5일에 멕시코에서 이투르비데가 황제로 즉위한 후 멕시코 제국에 합병되었다.[12]
1823년 초에 산타 안나 대령의 쿠데타로 이투르비데가 멕시코에서 축출되며 멕시코 제국이 붕괴하였다.[13]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는 멕시코로부터 떨어져 나와 같은해 7월에 중미연방공화국을 형성하였다.[14] 11월 22일에 각 지역 정부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연방헌법이 공포되었다. 연방의 출발은 초기부터 중앙 집권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고 지역간 이해관계가 상충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1824년에 엘살바도르 출신 마누엘 호세 아르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과테말라의 보수주의자들과 온두라스의 자유주의자들이 마누엘의 정책에 반발하며 내란이 발생했다. 온두라스 출신 프란시스코 모라산 장군이 1827년 마누엘 정권을 붕괴시킨후 1830년 4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5] 개혁을 추진하던 프란시스코 정권은 1837년에 연방내 대부분의 지역에 콜레라가 창궐하며 위기에 봉착한다. 민심이 흉흉해지며 민중봉기가 발생하였고 호세 라파엘 카레라가 이끄는 세력이 1838년 4월 수도 과테말라시를 점령하여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로써 연방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같은해 5월에 소집된 중미연방의회는 각 주의 독자적인 헌법제정과 독립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15] 그러자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가 연방을 탈퇴하였고 중미연방은 15년만에 해체되었다. 1844년 호세 라파엘 카레라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847년 3월 21일 과테말라는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16][17]
과테말라는 20세기 초반부터 미국 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일련의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었다. 1944년, 권위주의 지도자인 호르헤 유비코(Jorge Ubico)는 친민주적인 군사 쿠테타에 의해 전복되었으며, 10년간의 혁명으로 사회와 경제의 전면적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54년, 미국이 지원한 군사 쿠데타가 혁명을 종식시켰고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과테말라는 1960년에서 1996년까지 군대에 의해 자행된 과테말라 대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미국이 후원하는 정부와 좌익 반군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을 견뎌 냈다.[18][19][20] 과테말라는 유엔의 평화 협정 이후 빈곤, 범죄, 마약 및 사회 불안으로 고심하고 있지만 경제 성장과 성공적인 민주 선거를 목격했다.
동서가 산맥으로 이루어지면서 국토를 세 개의 지방으로 나눈다. 태평양쪽의 좁은 해안평야와 북부의 넓은 저습지는 덥고 건강상 좋지 않은 지방이다. 이를 빼고서는 산악지대가 많은데, 중앙의 산지나 고원은 상당히 시원하고 쾌적하며, 건기와 우기 중에서 특히 건기에 지내기 좋다. 따라서 인구의 태반이 중앙고지에 집중해 있으며, 수도인 과테말라 시도 해발 약 1,500m의 고지에 있다. 중앙산지는 멕시코에서 계속되는 험준한 습곡 산맥이며, 태평양 연안을 따라 화산이 즐비하다. 화산성 토양은 비옥하므로 이 지역에는 농업이 발달해 있다. 2018년 푸에고산 분화가 일어날 만큼 활화산이나 지진의 활동도 격심하다. 약 50년 전의 대지진(en:1976 Guatemala earthquake) 때에는 수도가 거의 파괴되었다.
모든 주요 도시는 태평양 연안 지역에 있으며 북쪽의 페텐 지역은 산발적으로 인구가 분포하다. 해발고도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며 저지대일수록 습하고 열대 기후에 가깝다. 반대로 높은 지역은 상당히 건조하다.[21]
과테말라 내를 흐르는 강은 대개 얕고 짧지만 리오둘세 강의 경우 더 크고 깊으며 주요 강은 이웃 국가인 벨리즈를 거쳐 카리브해와 멕시코만으로 흘러들어간다.
과테말라는 오랫동안 벨리즈와 영토 분쟁이 있었다. 과거 스페인의 식민 역사 때문이기도 한데, 1859년에는 영국과 과테말라가 영국령 온두라스의 경계를 획정하는 데 합의하였다.[22][23]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지진이 활발하며, 활성인 모타구아(Motagua) 단층과 믹스코(Mixco) 단층이 지나간다. 모타구아 단층은 북아메리카판과 카리브판의 경계이며, 산안드레아스 단층과 같이 두 판이 서로 미끄러질 때 지진이 발생한다. 1976년 과테말라 지진(M=7.5)때, 광범위한 파괴를 야기한 주요 원인으로 모타구아 단층이 지목되었다.[24]
과테말라는 대통령이 국가 수반과 정부 수장인, 다당제 체제의 민주 공화국이다. 행정권은 정부에 의해 행사되고 입법권은 정부와 의회에 모두 부여된다.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에 독립적이다.
과테말라 시는 열대 고원에 위치하는 과테말라의 수도이자 중앙아메리카의 최대 도시이다. 인구는 245만 0,212명(2018년 기준)이다. 기온은 연평균 20°C로 쾌적하나 지진의 피해가 많다.
과테말라의 주 (departamento)는 총 22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과테말라는 대한민국과 1962년 수교하였으며 북한과는 2007년 수교하였다. 주(駐)과테말라 미국 대사관은 과테말라 시티에 있다. 미국 국무성에 따르면, 미국과 과테말라는 전통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인권, 시민 운동, 군사 문제 등에서 때로 갈등을 빚어왔다.[25]
과테말라는 또한 1948년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정식 승인하였다. 대한민국은 1974년 과테말라에 대사관을 설치하였고, 과테말라 측은 1977년 주한국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전체 인구의 52%[26] 가 농촌에 거주하고 전체 취업 인구의 50%가 농업에 종사하며 대부분이 소작농이다. 1994년 이래 수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21억 달러의 외채, 인플레이션, 실업 등 경제문제가 산적해 있다. 주요 수출품은 커피·면화·바나나·설탕·원유 등이며, 수입품은 소비재 연료·윤활유 등이다.[21] 또한 과테말라는 세계 커피 수출량 8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민의 생활 수준은 평균적으로 낮으며, 평균 수명은 72세이다.[27] 빈부의 차이는 극히 심하고 인구의 10%가 국민 전체의 소득의 47%를 차지하는 한편, 국민의 51%는 빈곤층에 속해 있다.[28]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마야족 등 선주민은 대체로 영세한 소규모 농업에 종사했고 스페인어를 읽고 쓰는 데에 서툴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종사할 기회도 적다.
과테말라는 300∼900년경에 원주민 마야민족이 찬란한 마야문명을 꽃피웠던 곳이나 현재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며, 의무교육제도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과테말라의 민속악기 마림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곳곳에 마야의 풍속이 짙게 남아 있어, 도시 특권층의 서구 생활양식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과테말라는 마을에 따라 옷색깔이나 머리 장식이 다른데, 하나같이 원색의 기하학적 무늬를 즐겨 사용한다. 그래서 과테말라의 시장은 항상 원색의 물결을 이룬다. 해발 2071m에 자리잡은 치치카스테낭고는 인디오말로 가시가 있는 지치자라는 땅을 뜻하는데 목요일과 일요일에 서는 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과테말라의 축제는 그리스도교와 마야 토착종교의 제사가 혼합된 것으로 그 수가 많다. 마을마다 수호 성인의 축제일이 있다. 축제일에는 큰북, 피리 등의 민속악기 연주와 정복자의 춤, 무어인과 그리스도교도의 춤 등 전통무용을 볼 수 있다.[21]
중남미에서 원주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이다. 중앙아메리카인의 원주민과 라디노(Ladino) 또는 메스티조 41.4%(아메리카 인디안과 스페인인의 혼혈)과 백인(주로 스페인인. 또한 독일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스칸디나비아인 후손도 있음)이 18%를 차지하며, 아메리카 인디안은 키체(K'iche) 9.1%, 카치켈(Kaqchikel) 8.4%, 맘(Mam)족 7.9%, 케치(Q'eqchi) 6.3%이다. 기타 8.6%는 다른 마야인이고, 0.2%는 비(非)마야 원주민, 0.1%는 기타이다.[29] 지배계급은 혼혈이다.
과테말라의 공용어는 이웃국 멕시코, 온두라스처럼 다수가 스페인어로 국민의 60% 정도가 사용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멕시코식의 스페인어에 비슷한 발음을 사용한다. 나머지의 40%는 각 지역의 방언을 사용한다. 문맹률은 69.1%로, 중앙아메리카에서 아이티나 니카라과 다음에 속한다.
가톨릭 47%
개신교 40%
무종교 10%
기타 5%
가톨릭이 주류이지만 개신교가 발전한 나라이다.
과테말라는 마야문명의 유적이 많은 곳으로써 대성당과 같은 근대적 빌딩과 전통적 건축물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중앙공원(Parque Central)은 시 중심에 위치한 시민의 휴식처로 주위에는 북쪽에 정부청사와 공원서쪽에는 성당 등 주요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정부청사는 1939∼1943년에 걸쳐 세운 조각이 정교한 중요건물이며, 메트로폴리탄 성당은 1809년에 완성된 흰색건물이다. 이 주변은 최대의 번화가로 상점가, 영화관 등이 모여 있다. 아틀란호 (Lago Atitlan)는 과테말라시티에서 서쪽으로 약 150km에 위치, 해발 1,562m에 있는 세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칼데라 호수이다. 호수 주변에는 산페드로 산 (Volcan San Pedro, 3,020m), 톨리만 산 (Volcan Toliman, 3,158m), 아티틀란 산 (Volcan Atitlan, 3,535m)이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또 아티틀란 호반에는 인디오 촌락이 있다.
치치카스테낭고(Chichicastenango, 일명 인디오 마을)는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로 큰 종족인 마야 키체 족의 마을이다. 해발 160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고, 교통상 오지에 속해 아직도 많은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치치카스테낭고란 "가시가 있는 치치나무가 자라는 땅"이란 뜻의 인디오 말로 그냥 "치치(chichi)"라고도 한다. 이 작은 마을에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일요일, 장이 열리면 인근 인디오들이 모여 일용품에서부터 민예품을 매매하는 장이 열린다. 장이 열리기 하루 전날부터 시골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30] 과테말라다운 생활·문화·전통 등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21]
과테말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축구와 야구,농구 등으로 축구는 골드컵, 야구는 팬 아메리칸 게임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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