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갑오개혁(한국 한자: 甲午改革)은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1]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2]까지 추진한 근대화 개혁으로서 갑오경장(한국 한자: 甲午更張)[3]이라고도 불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세분하며, 이후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요 내용은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은본위제,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다.[4]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고,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일본 또한 톈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파병을 하였다. 톈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침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자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과 맺었던 전주화약으로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새로 신설하여 자주적인 개혁을 하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고, 교정청을 해체하고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신설하였다. 이렇게 추진된 개혁은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 사회 내부의 개혁적 요구를 반영해 신분제를 철폐하는 등 근대적 제도 개혁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의 위세에 의존한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이 추진된 근본적 한계 때문에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군사개혁에 소홀히 하는 등의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그 위세를 잃으면서 추진력을 급격히 상실하였다. 조선 정부는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친러정권이 수립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다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이에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세력이 득세하였고, 김홍집 등 갑오개혁 중심 인물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도주 또는 망명하여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개혁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