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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홍섬(洪暹, 1504년 10월 17일(음력 9월 10일)~1585년 3월 11일(음력 2월 11일)[1])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남양 토홍계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홍언필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을 지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었다(1540). 그 뒤 수찬, 부제학, 경기도관찰사, 대사헌을 거쳤다.
1552년(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듬해(1559) 좌찬성 겸 이조판서로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서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하였다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 · 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6월 28일 명종이 승하하고 7월 3일 선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로서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였다.
1568년 4월 1일 우의정에 올랐다.(1568.4.1-1571.5.1)
1571년(선조 4) 5월 1일 다시 좌의정이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1571.5.1-1573.3.12/1차)
1574년 4월 11일 영의정에 승진되었다(1574.4.11-8.10/1차).
1575년 7월 1일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1575.7.1-1576.8.1/2차)
1576년 12월 6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1576.12.6-1578.11.1/2차)
1578년 11월 1일 좌의정을 사임하고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2](1578.11.1-1579.2.1/3차)
1585년 사후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寃憤歌)」가 있으며,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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