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질(宋軼, 1454년 ~ 152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가중(可仲),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에 이르고, 1512년 우의정, 1513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생애
1477년(성종 8) 사마 양시에 합격한 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82년에는 진현시(進賢試)에 발탁, 홍문관정자를 거쳐 1485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 때에 나라에서 재정 긴축을 강화하여 관찰사와 수령에게 사저곡(私儲穀)과 제사사(諸寺社)의 장리곡(長利穀)을 철저히 조사하여 본주인의 용도를 제하고 그 밖의 것은 감봉(監封)하게 했는데, 그는 이 일의 추진을 주관하였다. 그 일례로 충청도 진천 지방의 재상 신균(辛均)과 상장군 오유종(吳有終)은 모두 사저곡이 수만 석에 이르나 관청의 감봉은 100석에 불과함을 밝히고 진천 고을의 관리를 징계조치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에 농장을 가지고 있는 재상들에게 스스로 납속(納粟)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어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다시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우승지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왜인들이 불법적인 약재무역을 횡행하자 이의 단속을 주청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했는데 때마침 그 지방에서 유행하던 역질(疫疾)의 치유에 힘써 지방민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오랫동안 북방의 국방을 다스렸다. 1501년에는 도민 임지성(林之盛)의 변란을 사전에 파악, 진압했으며, 그 공로로 형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같은 해에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서 공조·호조·이조·형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특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며, 경재소(京在所)의 당상관별감을 토성조관(土姓朝官)으로 임명시켜 풍속을 바르게 하고, 왕자·제군(諸君)이 이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0세 때 정헌대부(正憲大夫)·예조판서가 되고, 이어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예조판서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여원군(礪原君)에 봉군되었다. 1509년 함경도체찰사가 되어 동북 육진 지방의 사민입거책(徙民入居策)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북도 일원을 순찰한 뒤 무산·풍산 지방의 《이배도 (移排圖)》를 제작하여, 진상하기도 하였다. 이후 우찬성과 좌찬성을 지냈다.
151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러나 대간들로부터 탐오(貪汚)하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가족 관계
묘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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