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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지방하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지방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2]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발원지에서부터 잰 본류의 길이는 10.92 km, 유역 면적은 50.96 km2이나,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 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 km[3]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의 관리 하에 공원으로 쓰인다.
상류는 백운동(白雲洞)에서 시작된다. 중·하류에서는 조선조 내내 치수 사업이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천(開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계천’의 명칭은 대체로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에서 나타나며,[4] 상류인 청풍계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5]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 이후로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한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다. 이때의 준설 과정을 《준천사실》으로 기록하였다.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중반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의 서울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이었다.
청계천 복개사업은 일제강점기나 1955년에도 일부 이루어졌지만,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는 광교 ~ 청계6가(동대문 야구장 부근) 구간,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 ~ 청계8가(신설동) 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 8가 ~ 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었다. 그리고, 이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1일에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억 3,900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하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이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다.
서울특별시는 2050년까지 장기 계획을 세워 청계천을 역사와 전통이 있게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18년까지 청계천의 인공 보(湺)를 철거한다. 2030년까지는 수표교 등의 유적을 제자리에 옮겨놓으며, 중·하류 수질을 개선할 예정이다. 백운동천이나 삼청동천의 계곡수 또한 이때까지 유입시키기로 정하였다. 최종적으로 2050년까지는 옥류동천과 남산동천을 청계천으로 잇기로 했다.[6]
여러 기관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서울학연구소가 시민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 도심에서 시행된 주요 20개 사업 가운데 '청계천 복원'이 만족도와 기여도 평가에서 5점 만점에 4.02점을 받아 1위에 선정되었다.[7]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청계천 복원의 최대 성과로 생태환경의 회복을 꼽았으며 서울의 랜드마크를 묻는 질문에 청계천은 4위에 올랐다.[8] 또한 서울시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청계천 주변지역 상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청계천 복원 사업의 진행 상황에 대해 `잘 진행됐다'는 평가가 66.8%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복원 사업의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잘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77.6%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9]
긍정적 평가로는 청계천과 그 주변 환경의 개선을 든다. 복원된 청계천이 시민들의 도심속 휴식공간이 되었으며 여가공간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우선 대기질 개선과 소음 감소가 확인되었으며[10], 열섬현상이 약화되었고[11], 음이온 발생량이 일반 도심지역의 발생량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12]. 또한 청계천에 서식하는 생물종이 복원 전(98종)의 6.4배에 이르는 626종(식물 308종, 어류 25종, 조류 36종)으로 증가하였는데, 특산종인 참갈겨니·참종개·얼룩동사리 등과 깝작도요·알락오리·도롱뇽 등의 서식이 확인되었다.[13]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복원의 경제효과가 최대 2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였고 복원 이후 주변 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31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했다.[14] 국외로는 일본 나고야시가 공무원단을 파견하는 등 장기적인 교류를 통해 복원 사업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15] 미국에서는 하버드대가 청계천 복원사업을 내용으로 한 서적을 출간하고 이를 수업 교재로 채택하였으며[16]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서울시 옛 청계천복원팀이 환경단체 회원과 LA시의원 등에게 하천 복구 노하우를 전수하였다.[17]
반면 부정적 평가도 많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자신의 저서에서 복원된 청계천을 "인공호수"라며 호되게 비판하였다.[18] 또한 기존에 흐르는 물의 양이 적어 취수장에서 전기를 이용해 한강물과 지하수를 끌어다 청계광장에서 흘려보내는데, 이때 물을 끌어올리는 데 쓰이는 전기요금이 한해 평균 8억 가량으로 상당하며[19] 녹조 또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8,000만원을 녹조제거를 위해 쓰였다. 이 외에도 인건비, 청소·경비용역비, 토목·조경시설 유지관리비 등에 2011년에만 80억여원이 소모되었다. 이는 2005년 37억에서 2010년 77억원에 이은 것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11년 6월 조선일보의 설문 조사에서 최악의 건축물 3위에 뽑혔는데, "청계천은 한국을 상징하는 공공 건축물인데 건축가도 없이 단기간에 불도저로 밀어붙이듯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20] 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자신의 임기 안에 청계천 복원 사업을 무리하게 끝마치기 위하여 유적 복원을 날림으로 진행했다는 평가도 있는데, 실제로 석축·효령교·하랑교·오간수문은 복원되지 않고 중랑구 하수종말처리장에 보관되고 있다.[21] 또한 1773년에 쌓은 현 무교동 사거리에서 시작되며 청계천을 따라 17.1m의 폭을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청계천 석축은 발굴 후 복원되지 못했다. 복원 당시 발견된 석축은 동아일보사 앞의 좌안석축이 교차로를 기준으로 서쪽 57m, 동쪽 36m 정도, 반대편 우안석축은 9m 정도로 모두 100여m나 된다. 수표교는 예산상의 문제라는 표면적 이유로 장충단공원에 남아 있고, 광통교는 원래와 다르게 복원되었다. 청계천 입구에 위치하는 소라탑 또한 일각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스웨덴 출신의 미국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한 작품으로, KT가 34억의 비용을 들여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다. 높이 20m, 폭 6m, 무게 9t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적인 미가 결여되어 있고, 주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비판과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2]
조선 시대의 청계천의 다리 목록이다. 백운동천의 신교부터 송기교까지의 다리는 해당 문서에 있다.
조선시대의 다리를 계승한 경우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서울 청계천 유적은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이 있던 터와, 광통교, 하랑교, 효경교, 오간수문, 양안석축 등의 유구 일체를 의미한다. 발굴 이후 10년 넘게 중랑물재생센터(옛 중랑하수처리장)에 방치되고 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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