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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의 왕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노국대장공주 패아지근씨(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氏, ? ~ 1365년 3월 8일(음력 2월 15일)[1])는 고려 공민왕의 적후(嫡后)이다. 원 순종(元 順宗·추존)의 손자인 위왕(魏王) 베이르 테뮈르 (孛羅 帖木兒, 몽골어: ᠪᠶᠢᠷ
ᠲᠡᠮᠦᠷ Bayir Temür)의 딸로, 본명은 보르지긴 부다시리(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ᠪᠤᠳᠢᠰᠢᠷᠢ Borǰigin Budaširi, 한국 한자: 孛兒只斤 寶塔實里 패아지근 보탑실리)이다.
칭기스 칸의 7대손이다. 1365년(공민왕 14년)에 난산으로 서거했다. 시호는 처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를 내렸다가[2] 차후 원에서 내린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로 교체토록 하고[2], 결국 이를 합성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다.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했다.[3] 올바른 호칭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알려져 있다. 능은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현정릉 내에 위치한 정릉(定陵)이다.
생년은 알려지지 않는다. 1349년(충정왕 1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갈 때 원으로부터 승의공주(承懿公主)에 책봉되었다.[4]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실시하자 자신이 태어난 고국을 배척하고, 남편을 도왔으며, 공민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에 겨우 임신하여 공민왕은 후사가 생겼음을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난산으로 아들을 유산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자 공민왕은 매우 슬퍼하였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후 정치권을 신돈(辛旽)에게 양도했다. 공민왕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또한 공민왕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혼제를 지냈으며, 그 진영을 모시기 위해 호화로운 영전을 짓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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