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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의 능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공민왕릉(恭愍王陵)은 개풍구역 해선리에 있는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한 2기의 무덤으로, 서쪽 것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玄陵)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 |
종목 | 국보 제12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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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려 |
주소 | 개성시 개풍구역 해선리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소재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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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명* |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 |
프랑스어명* | Monuments et sites historiques de Kaesong |
등록 구분 | 문화유산 |
기준 | (ⅱ), (ⅲ) |
지정번호 | 1278-008 |
지정 역사 | |
2013년 (제37차 정부간위원회) | |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
공민왕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축조 방법에서도 고려 말 왕릉의 완성된 형식으로 평가받는다. 섬세하고 다양한 석물을 가졌으며 조선왕릉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도 여겨진다.[1]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은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비통함을 참지 못해 충렬왕 비인 제국대장공주의 고릉을 본받되 그보다 더 화려하게 9년간 본인이 직접 주관하여 정릉을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인 1366년 정릉과 나란히 수릉인[주해 1] 현릉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1]
공민왕릉은 러일전쟁 시기 일제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는 능의 뒷부분을 폭파시켜 도굴을 감행했는데 파괴된 능은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의해 시멘트로 수리된 상태다.[1]
공민왕릉은 북한 정권의 수립 당시부터 중요한 문화재였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공민왕릉에 대한 현지지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꾸준한 관심과 관리가 있었다. 이 같은 노력은 공민왕릉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결실을 거뒀다.[1]
이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지리, 석조건축물, 조형예술의 수준이 집대성되었다.고려시대에 궁전·무덤 등의 건축물을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건축 구획을 여러 개의 층단으로 배치하던 수법을 도입하여, 제일 윗단에 봉분을 두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층단을 구성하면서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장엄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쌍분인 정릉과 현릉의 봉분 높이는 약 650cm, 직경은 약 1,300cm다. 봉분의 아래쪽으로는 12면의 병풍석이 자리 잡았는데 그 위아래로 다양한 종류의 석재를 배치해 병풍석을 고정시키고 있다.[1]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모셔진 묘실은 봉분에 맞추어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그 두 개의 묘실 측면의 중심부에는 묘실들을 내부에서 하나로 연결하는 관로가 존재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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