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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동맹휴학(Student strike of 1970)은 1970년 5월 8일 미국 전역에서 캄보디아 전역 및 켄트 주립대 총격사건에 대한 항의로 이루어진 대규모 동맹휴학이다.
1970년 4월 30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수행지역을 캄보디아까지 넓히겠다고 발표했다.[1] 이에 그 다음날인 5월 1일부터 각 도시 및 대학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시애틀에서는 수천 명이 연방법원청사 앞에 모였고, 메릴랜드 대학교에서는 학생 1,500 여명이 공군 학군단의 병기창을 반달했다. 신시내티 대학교에서는 시위대가 도심 한복판의 교차로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 등 다른 대학교들에서도 학생들이 수업을 빠지고 전국적 맹휴를 계획하기 시작했다.[2]
오하이오주의 켄트 주립대학교에서는 500여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고,[3] 5월 2일 학군단 건물에 방화했다. 5월 4일, 오하이오 국민위병이 교내에 출동해 학생 4명을 사살하고 1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켄트 주립대 총격사건). 이 사건에 대한 반향으로 전국 450여 종합대, 전문대, 고등학교의 400만 여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닫고 각자 폭력적 또는 비폭력적 항의행동에 나섰다.[4][5][6]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은 이미 몇 년동안 미국의 대학가를 들끓게 하고 있었고, 스트라이크 전술 또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매달 15일마다 파업을 할 것을 주장한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모라토리엄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전역의 학생들이 스트라이크를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전술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촉발점은 켄트 주립대 사건이었다.
5월 7일에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폭력화된 시위대가 응용물리학 실험실을 때려부수고 경찰에게 투석했다.[6] 닉슨이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한지 열흘째이며 켄트 주립대 사건으로부터 4일째인 5월 8일, 워싱턴에 100,000여명, 샌프란시스코에 150,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다.[7] 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군사시설인 학군단이 학생들의 분노의 투사 대상이 되어서, 전국적으로 30개소의 학군단 건물이 방화 또는 폭파되었다. 26개 학교에서 학생과 겨찰 사이에 폭력충돌이 있었고, 16개 주 21개 교정에 국민위병들이 동원되었다.[8] 700개 이상의 학교가 전국파업정보센터에 농성과 시위를 보고했는데, 뉴잉글랜드와 중서부, 캘리포니아에 집중되어 있었다.[9]
5월 9일, 링컨 기념관에서 닉슨과 30명의 학생대표단 사이에 회동이 이루어졌으나, 양자는 서로를 설득할 수 없었고 회동 이후 닉슨은 반전운동 참여자들은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4] 이후 닉슨은 해리 로빈스 홀더먼에게 반전운동가들의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는 휴스턴 계획의 발동을 고려할 것을 주문했으나,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의 반발로 그 계획을 포기했다.[4] 이 동맹휴학의 직접적 결과로서 닉슨이 6월 13일 학내소요대통령위원회(위원장: 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윌리엄 스크랜턴)를 설치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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