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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의 왕족 (1448–1552)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익양군 이회(益陽君 李懷, 1488년 8월 7일(음력 7월 1일) ~ 1552년 2월 15일(음력 1월 21일))는 조선의 왕자로, 이름은 회(懷), 자는 순지(順之)이고,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성종의 10남이자 서7남으로 생모는 숙의 홍씨이다.
중종 반정 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종부시제조, 종친부유사당상 등을 지냈다. 홍일동의 외손자로, 홍길동은 그의 서외종조부가 된다. 효종 때 의순공주를 대신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던 금림군 이개윤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1488년(성종 19년) 7월 1일, 성종(成宗)의 아홉번째 서자로 민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홍일동의 딸인 숙의 홍씨이다. 이름은 회(懷)이며, 명은 석수(石壽)이다.
1496년(연산군 2년) 익양군(益陽君)에 봉작되었고, 이후 첨지중추부사로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정문창(鄭文昌)의 딸 순천군부인(順川郡夫人) 연일 정씨와 가례를 올렸다.
연산군이 옥사와 사화를 일으켜 안양군과 봉안군을 죽이고, 다른 이복 형제들도 미워하거나 의심하자 익양군은 두문불출하고 거짓으로 우매한 척 행동하여 화를 피하였다.[1]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에 협력하여, 반정이 성공하자 그해 말 정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문소전제조(文昭殿提調), 연은전제조(延恩殿提調), 종부시제조(宗簿寺提調)를 겸임하고,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임하였다.
1510년(중종 5년), 모친상을 당하자 사직하고 3년상을 마쳤으며 1513년(중종 8년) 다시 익양군의 작위와 문소전, 연은전, 종부시 제조직과 종친부 유사당상직에 제수되었다.
1533년(중종 28년) 11월에는 산증(疝症)이 심해져 고생하자 중종이 직접 내의원 의원을 보내어 진료하게 하기도 했다.
1552년(명종 7년) 1월 21일 사망했다. 그가 죽자 명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3]
사망 후 바로 순평(順平)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시신은 파주군 남면 오리동(南面五里洞) 기곡(基谷)마을(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묘좌(卯坐)에 부인 연일정씨 묘소 오른쪽에 쌍분으로 매장되었으며, 신도비문은 의정부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주부 한호(韓濩)가 글을 썼으며, 직제학 김응남(金應南)이 비석에 새겼다.
묘소와 묘비, 신도비 등은 1984년 10월 2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고 1987년 8월 17일 파주군청에서 묘소를 재정비한 뒤 비각을 세웠다. 한성부에 사당 순평사가 세워졌으나 대한민국에 와서 1965년 묘소인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터골 묘 아래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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