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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영화배우 (1944–2023)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윤정희(尹靜姬, 1944년 7월 30일~2023년 1월 19일)는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다. 대종상 등 8개 신인상과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비롯해[1] 문희, 남정임과 함께 60,70년대 여자 배우 트로이카로 유명하였다.[2] 1968년 《장군의 수염》, 《절벽》, 1969년 《독 짓는 늙은이》, 《지하실의 7인》, 1971년 《분례기》, 1972년 《무녀도》, 《궁녀》, 1994년 《만무방》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총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3]
후배 연기자 금보라(본명: 손미자)와는 본명이 동명이인인 그녀는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1호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후에는 후배 영화배우 유지인이 사실상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2호의 맥을 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경상남도 부산에서 한 대학 교수의 딸로 태어났다.[4]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내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성장했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발레와 노래를 배웠다.[4][5]
1967년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동영화사 강대진 감독의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하였다.[6] 합동영화사의 전속 배우로 계약하였는데, 김기덕 감독의 《네 멋대로 살아라》에 조연으로 출연해 달라는 요구에 자존심이 상해 전속 계약을 해지하였다.[5] 이후 여러 영화사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게 되어, 첫 해에 22편을 촬영하는 등 많은 영화를 촬영하였다. 데뷔때 함께한 신성일과 파트너로 99편의 영화에 함께 주인공으로 나란히 출연하였다.[7] 데뷔 후 7년 동안 280편에 출연했는데, 촬영이 많을 때는 하루에 3편을 동시에 찍기도 했고, 각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차에서 머리를 바꾸고 차에서 잠을 자는 등 영화 외에 다른 사생활이 없었다고 말했다.[8] 그 결과 프랑스 유학 이전까지 청룡상, 대종상 등에서 여우주연상만 24번 수상하였다.[1] 전성기 시절엔 주연작품 5개를 동시에 상영하기도 했다.[8]
1년에 최소 40편, 일주일에 1편꼴로 영화를 찍었던 세월을 뒤로하고, 1973년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데뷔할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프랑스 유학을 발표한다. 1972년 뮌헨 문화올림픽과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가 동시에 열려 효녀 심청으로 신상옥 감독과 참석했는데, 오페라 계단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처음 보고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자리가 어디인지 물어봐 친절하게 도움을 받았다.[9] 공연이 끝나고 윤이상 선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 청년이 윤이상 선생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백건우는 윤이상 선생과 잘 아는 사이이며, 독일 뮌헨에 연주 여행차 《심청이》 오페라도 보러 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 윤이상 선생의 소개로 둘이 알게 됐다. 회식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제외하고 젊은 친구들만 모여서 따로 맥주를 마시러 갔는데, 적극적이고 잘 놀던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도 적었던 백건우가 윤정희의 눈에 띄었다. 그러던 중 백건우가 윤정희에게 꽃 선물을 건넸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10] 신상옥 감독이 백건우에게 파리 지리를 잘 모르므로 헌팅할 때 도와 달라며 부탁을 하여 파리까지 동행했다가 업무를 마치고 헤어진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오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급히 귀국한 후 백건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1974년 서강대학교 총장 신부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고, 평범한 학생으로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와 영화를 본 후 대한민국 교포들이 자주 찾는, 짜장면이 유명한 광명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순간 백건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놀라고 말았다. 둘은 연락을 한 적도 없었는데 우연히 2년 만에 만난 것이었다.[11] 이후 둘의 연애가 시작되고, 유명세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는 못하고 비밀리에 연애를 이어 갔다. 어느 날 대사관 초청 모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둘만의 시간을 보냈고 백건우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해와, 처음엔 결혼 전엔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으나 사랑이 커지자 곧 몽마르트 언덕에 작은 방 하나를 얻게 되었다.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같이 생활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차에서 내릴 때도 다른 방향으로 내리는 등 보안을 유지했다.[12] 비밀 연애를 이어가던 중 부모님처럼 모시던 화가 이응노 선생 앞에서 둘의 결혼 계획을 알리면서 둘의 관계가 만천하에 알려졌다.[13]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고,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사실상 실직자였던 탓에 백건우의 비서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음악회를 가면 사진 촬영, 인터뷰 등등 스케줄이 많은데, 남편이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같이 있으니 휴대전화도 2대가 필요 없어 하나를 같이 썼다고 한다.[14]
슬하에 장녀 하나만 두었으며, 장녀는 백건우처럼 음악계로 진출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이후에도 대한민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1994년에 출연한 영화 《만무방》 이후 점차 추억 속의 배우로 기억되던 중 영화 데뷔 44년차, 마지막 영화 촬영 16년 만에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작품 《시》에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대되어 10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15] 많은 언론들이 《시》를 주목했고 여우주연상도 노려볼만 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윤정희는 여우주연상보다는 모든 제작진이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황금종려상을 타길 바랐다고 말했다.[16]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은 팀 버튼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화제가 됐다.[17] 16년간 영화 출연을 하지 않았으나 은퇴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90대가 되어서도 매력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18] 그리고 이 영화는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2019년에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백건우를 통해 알려졌고, 백건우가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서 근황을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인 《시》 촬영 당시에도 치매 증상을 보이는 등, 10년 넘게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건강 악화로 2023년 1월 19일에 타계했고, 백건우와 장녀가 임종을 지켰다.
《시》는 오직 윤정희였기에 가능했다. - 르 몽드(Le Monde)
파격적인 캐릭터의 여주인공은 윤정희가 아니면 안 된다 - 신상옥 감독
윤정희는 여배우가 예쁘다라는 사실만으로도 프리미엄을 얻던 시절에 이미 예외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알린 배우이다. - 평론가 변인식
미묘한 뉘앙스와 감수성으로 가득찬 윤정희의 연기는 여우주연상을 받을만하다 - 르 피가로(Le Figaro)[31]
마음을 움직이는 윤정희의 연기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 팀 버튼[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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