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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지상파 민영방송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동양방송(東洋放送, 영어: Tongyang Broadcasting Company)은 1964년 12월 7일부터 1980년 11월 30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지상파 민영방송사이다.
‘온 국민에게 보다 잘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고 그를 위해서 스스로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일깨우며, 이 나라에 모든 개인과 가정과 촌락 그리고 국가사회 구석구석에 맑게 샘솟는 도의심이 충만하도록 하자’는 창업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TV 상업광고방송으로 동양방송을 준비하고 있음이 보도된 것은 1962년 9월이었다.[1] 기사에 따르면 동양텔레비죤방송주식회사가 순수한 대한민국내 기술로 전파의 송출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 3대와 중계차 1대를 확보, 대한민국 정부에 채널을 신청하고 대기중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당국의 허가와 함께 채널 7번을 배정받아 당해 5월 개국을 예정하고 있음이 보도되었다.[2] 하지만 개국은 미뤄졌으며, 그해 7월에는 방송국 회장 이재형과 이사 이병철이 도쿄 닛폰 테레비 회장을 방문, 기술 지원 등의 원조를 요청하였다.[3] 당시 정부는 TV 수상기와 송신기를 제작이 불가능한 부품 외에는 국내에서 생산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동양방송국의 텔레비전 카메라는 영화 카메라와 중고 기기를 결합, 자체 제작되기도 했다.[4]
1964년 5월 9일에 라디오 서울(RSB)로 최초 개국했으며, 1964년 12월 7일 동양텔레비전(DTV, 서울본사는 채널 7번, 부산지국은 1964년 12월 12일 채널 9번으로 개국),[5][6] 1966년 1월 15일에 주식회사 중앙방송(JSB)에서 동양방송(TBC)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66년 8월 15일에는 동양FM을 개국했다. 동양방송은 TV 개국 이후 쇼쇼쇼를 비롯한 쇼 프로그램과 다양한 연속극으로 이목을 끌었고, 당시 공사 출범 이전 상태의 국영방송이었던 KBS의 시청률을 능가했으며, 민영방송 MBC가 1969년 8월에 TV 방송을 개국할 당시에는 아직 동양방송이 상대적으로 우위였으나, 당시 MBC가 여러 드라마를 히트시키며, 이후 MBC와 TBC 간 시청률의 접전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동양방송이 문화방송을 근소하게 앞장섰다. (예능 제외) (국·공영방송인 KBS는 두 민방에 밀려났고,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도 두 민방보다는 적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시설 확장을 위해 약 87만여 달러의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기도 했다.[7] 1969년 7월에 아폴로 11호 달 착륙 특집 방송을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중계 방송하였다.[8] 1971년 동양방송의 공칭자본금은 4억원으로 평가되었다.[9] 1970년대초에는 동아방송, 문화방송과 합자하여 방송 송신탑을 건립하였다.[10] 1978년부터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추진하는 등 큰 성장을 하였고, 동양텔레비전 부산지국의 경우, 마이크로웨이브 미설치로 인한 수중계(동시 송출) 불가로, 부산과 울산, 경상남도 지역의 로컬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자체 방송하여, '쇼쇼쇼' 등의 서울본사(프로그램 제작국) 프로그램은 동양방송 본사로부터 직접 녹화본 영상 필름을 공수하고, 항공이나 철도(혹은 육로)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접 수송한 후에, 서울보다 약 일주일 늦게 녹화본이 방송되었기 때문에, 지역 방송의 독립성 강화에 기여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여 허문도가 단행한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1980년 11월 30일에 동양방송은 한국방송공사에 1980년 12월 1일 새벽 0시를 기해서 강제 불법로 통폐합해서 동양방송은 없어졌다. 인수 합병 당시 동양방송의 재산 규모는 340억원에 달했다. 동아방송은 약 42억원, 기타 방송들은 10억대 미만이었다.[11]
노태우 정부 주도의 5공비리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이고 제5공화국 청문회가 열리기 직전인 1988년 10월, ‘동양방송부활 추진위’가 구성되어 방송 부활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12]
1990년 11월 26일, 중앙일보는 한국방송공사와 국가를 상대로 동양방송 강제 양도로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액 860억원을 지급하라는 배상금 지급신청을 서울지검 서울지구국가배상심의회에 제출하였으나 위원회에서는 소멸 시효 3년이 경과했다는 이유로 중앙일보를 포함한 14개사의 손해배상 신청을 기각하였다.[13][14]
폐국 당시 동양방송 AM 라디오는 1980년 12월 1일에 동양라디오에서 KBS 제3방송으로 개칭되어 방송되다가, 1981년 9월 7일 KBS 제2라디오와 통합되어 KBS 제3방송은 폐국하였고, 이후 제3라디오라는 채널명은 2000년 1월 1일에 장애인 대상 채널인 사랑의 소리 방송으로 재개국했다. 1980년 12월 한국방송공사에 인수된 후, 당시 동양텔레비전은 KBS 2TV, 동양FM방송은 KBS 제2FM으로 채널명을 재개편했다. 당시 동양텔레비전 부산지국의 TV 호출부호는 KBS부산방송총국에 불하된 상태 KBS부산 2TV로 개편되었다. 당시 동양방송의 지역 계열사 네트워크였던 한국FM은 KBS대구방송총국에 인수되어 KBS대구FM으로, 전일방송은 KBS광주방송총국에 인수된 후 KBS광주 제3방송을 거쳐 1981년에 KBS 광주 제2라디오로 변경되었고, 서해방송은 KBS군산방송국에 인수, 당시 기준 군산방송국 제3방송 채널(1981년 KBS 군산 제2라디오로 개편됨)로 변경되었다.
TBC 동양방송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FM도 동양방송 동양방송
뉴스도 교양도 오락도
하늘을 전파로 수놓아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아~ 아~ 아~
사랑의 TBC 동양방송
(1절) 겨레를 하나의 마음에 묶어/
뜨겁게 타오르는 우리의 정성/
인류의 고동 가슴에 품고/
자유언론 대도를 우리는 간다(2절) 참되고 슬기롭게 오늘을 살며/
드높이 펼쳐가는 우리의 이상/
내일의 번영 다지고 다져/
사회정의 대도를 우리는 간다/(후렴) 아아 푸른깃발 우리의 기상/
무궁한 내일의 보람을 안고/
나가자 약진하자 중앙일보 동양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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