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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군(全城君) 이대(李薱, 1488년 7월 21일 ∼ 1543년 10월 29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자(字)는 성중(盛仲)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조부는 율원군(栗元君), 증조부는 보성군(寶城君). 인순왕후 심씨, 심의겸, 심충겸 등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른 이름은 이대(李對)이다.
생전 관직은 함열현감(咸悅縣監),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주부 등이었지만 후손들의 거듭된 출세로 증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 호조판서와 증 이조판서를 거쳐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는 등 거듭 증직이 추증되었다. 대한민국 초기의 정치인 만송 이기붕은 그의 13대손이다.
1488년(성종 19) 7월 21일 사후 여양군에 추증된 여양정 이자겸(呂陽正 李子謙)과 훈도(訓導) 김기(金耆)의 딸 광산김씨[1]의 아들로 태어났다. 효령대군 보의 차남 보성군 이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율원군 이종(栗元君 李終)이다. 그의 생일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정사룡(鄭士龍)이 쓴 그의 묘비문에 그의 생일이 7월 21일이라고 언급되면서 알려졌다.[2] 조부 율원군은 적개공신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독서를 하였으며 참례도찰방(參禮道察訪)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광산김씨 혹은 대흥현부인 영광신씨으 건의로 내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이후 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를 거쳐 사재직장(司宰直長)에 올랐다가 이무망좌(以無妄坐)를 이유로 파직되었다. 수개월이 지나 복직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군자주부(軍資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했다.
1527년(중종 22) 7월 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면직되었다. 이후 좌익찬(左翊贊), 사복시주부, 겸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장예사평(掌隷司評), 종부시주부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정(副正) 이공장(李公檣)의 천거를 받았다가 사헌부로부터 성품이 본래 침착하지 못하고 소행도 탐욕스럽고 간특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3]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종보(鄭宗輔)의 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는데, 일곱째 아들이 권신 이량이고, 고명딸은 청송 심씨 의정부영의정심연원의 아들이자 좌의정 심통원의 조카 심강에게 출가했다.
1542년(중종 37) 자신의 외손녀딸 인순왕후가 삼간택을 거쳐서 중종의 명으로 경원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는 것을 생전에 보았다. 경원대군은 그가 처가의 가장(家長)이라는 이유로 건의하여 그는 곧 돈녕부주부에 제수되었다. 그는 곧 병이 들었고 중종은 특별히 내의원을 보내서 입진하게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2] 1543년(중종 38) 10월 29일에 사망했다.
사후 여섯째 아들 이량의 영귀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다시 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른 후손들의 출세로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성군(全城君)에 추봉되었다. 후일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인인 이기붕은 그의 아들 이량의 직계 후손이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왕릉골(현,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왕릉골 부락) 좌산 경좌에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아버지 여양군, 조부 율원군의 묘소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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