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바르 전투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크로아티아군 사이 동부 크로아티아의 부코바르에서 일어난 포위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부코바르 전투(크로아티아어: Bitka za Vukovar, 세르보크로아트어: Bitka za Vukovar)는 1991년 8월에서 11월 사이 크로아티아 동부 부코바르에서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및 기타 여러 세르비아인계 준군사와 크로아티아 간에 87일간 이뤄진 포위전이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에는 바로크 건축 시절의 구도심에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기타 민족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해체가 점차 대두되면서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사이의 민족감정을 이용한 정치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세르비아 정부와 준군사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지역에서 세르비아계의 무력 준동이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반란에 호응하여 크로아티아에 개입하기 시작해 1991년 5월에는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인 슬라보니아에서 군사 분쟁이 시작되었다. 8월이 되면 인민군이 부코바르를 포함한 슬라보니아 전역의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부코바르 전투 | |||||||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
2010년의 부코바르 급수탑. 전투 중 수많은 포격을 받은 급수탑은 부코바르 전투의 상징이 되어 오늘날까지 보존이 되어 있다. | |||||||
| |||||||
교전국 | |||||||
크로아티아 | |||||||
지휘관 | |||||||
알렉산다르 스피르코브스키 (~ 1991년 9월) 보이슬라브 셰셸 |
블라고 자드로 † | ||||||
군대 | |||||||
흰 독수리 |
| ||||||
병력 | |||||||
약 36,000명[3] | 약 1,800명[4] | ||||||
피해 규모 | |||||||
1,103명 사망, 2,500명 부상 전차 및 장갑차 110대 손실, 항공기 3대 격추 |
크로아티아의 공식 입장: 1,649명 사상(879명 사망, 770명 부상) | ||||||
민간인 1,131명 사망[5] (부코바르 학살 제외) | |||||||
1991년 당시 부코바르엔 제대로 무장되지 않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및 자원군 1,800명이 있었으며, 이에 반해 공세를 펼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전차와 포병을 동원한 병력 36,000명이 있었다. 부코바르 전투 기간 동안 시내에 하루 평균 박격포 12,000개가량이 떨어졌다.[6] 이 시기 일어난 전투는 1945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오래 가고 치열한 전투였으며 부코바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완전히 파괴된 유럽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7][8] 11월 18일 부코바르가 세르비아에게 함락되며 크로아티아군 포로와 민간인 300명 이상이 학살당했으며 부코바르 주민 20,000명 이상이 강제 추방당했다.[9] 이후에도 부코바르 대부분 지역에서 비세르비아계 민족에 대한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고 세르비아계가 독립해 세운 국가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계 준군사 및 정치 관료들은 전투 기간과 그 후에 일어난 전쟁 범죄의 피의자로 기소되었다.
부코바르 전투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부코바르 전투가 끝난 지 수 주 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8년까진 부코바르가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크로아티아로 평화롭게 돌어갔다. 전쟁 이후 부코바르는 재건되었으나 전후 인구는 전쟁 전 인구의 절반도 채 되지 않으며, 많은 건물이 전투의 포화에 피해를 입은 채 방치되어 있다.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 2개 공동체로 분할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