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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코 라주나토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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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코 라주나토비치(세르비아어: Жељко Ражнатовић, Željko Ražnatović, 세르보크로아티아어 발음: [ʒêːʎko raʒnâːtoʋitɕ], 1952년 4월 17일~2000년 1월 15일)는세르비아의 조직 폭력배, 정치인, 스포츠 관리인, 준군사조직 지휘관, 유고슬라비아 전쟁 시기의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의 우두머리이다. 아르칸(세르비아어: Аркан, Arkan)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1월에 베오그라드에서 암살되기 전까지 라즈나토비치는 발칸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범죄 인물이었다.
동슬라보니아와 보스니아 동부 등지에서 민간인 살해·약탈·강간·민족청소에 관여한 것으로 학술·언론 자료에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1][2][3] 1970~80년대에는 인터폴 지명수배 대상(강도·살인, 다수의 탈옥)으로 활동했고,[4][5] 1997년 옛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로부터 반인도 범죄 등으로 기소되었으나,[6] 2000년 1월 베오그라드의 호텔 로비에서 암살당해 재판을 받지 못했다.[7] 일부 연구와 저술은 그를 2000년 암살 시점까지 발칸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범죄 두목, 세르비아 체제 후원 범죄자 가운데 최강자로 평가한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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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라즈나토비치는 브레지체에서 태어났으며, 세르비아계 가정에서 자랐다. 성장기 대부분을 베오그라드에서 보냈다. 1970년대 초 유럽 서부로 건너가 은행강도 등 중범죄를 저질렀고, 1973년 벨기에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여러 차례 탈옥했다.[4][5] 1974년 스웨덴 쿵엘브(Kungälv)에서의 은행강도 사건도 그의 범행으로 보도되었다.[10]
준군사조직 창설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0년 그는 델리예(츠르베나 즈베즈다 서포터 클럽) 인맥을 기반으로 준군사조직 세르비아 자원수비대를 조직·지휘했다. 이 부대는 1991~1995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에서 활동하며 동슬라보니아(에르두트, 달리, 테냐 등)와 보스니아 동부(비옐리나, 즈보르니크, 브르치코 등)에서 광범위한 민간인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보고된다.[1][2][3] 전쟁 말기까지 SDG는 세르비아 국내 정치·경제적 이권에도 깊이 관여했고, 일부는 전후에도 유력 인사로 남았다.[3]
난민 강제동원 논란
1995년 크라이나 붕괴와 폭풍 작전 이후 세르비아로 유입된 세르브계 난민들의 강제 동원이 자행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며, 에르두트 기지로 연행된 남성들에게 구타·모욕·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증언이 다수 수집되었다. 세르비아 인권단체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11][12] 국제 인권단체와 언론은 이후에도 ‘호랑이들’ 관련 전쟁범죄의 국내 기소 필요성을 지적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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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활동: 스포츠·정치
전쟁 직후 그는 SDG를 공식 해산(1996년)했으나, 위기 시 재소집 가능성을 시사했다. 같은 해 축구클럽 오빌리치(FK Obilić)를 인수하여 1997~98시즌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상대 선수·심판에 대한 협박 의혹이 국제적 문제로 비화하면서 UEFA 대회 참가 제한 논의가 거론되었고, 그는 형식상 구단 운영에서 물러났다는 보도가 있다.[14]
코소보 전쟁과 공습기 활동
코소보 전쟁(1998~1999)과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시기, 그는 외신 인터뷰를 통해 전쟁범죄 혐의를 부인하고, 외국 기자·여론전에 적극 개입하였다. 공습과 관련한 군사적 사실(예: F-117A 격추 등)은 공개 자료로 입증되나, 라즈나토비치 개인의 기여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다.[15]
ICTY 기소
ICTY는 1997년 9월 라즈나토비치를 기소(확정)했으며, 1999년 3월 기소 사실이 공개되었다.[16][17] 공소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행위가 포함되었다(요지).[6]
암살
2000년 1월 15일 베오그라드 신베오그라드의 인터컨티넨털 호텔 로비에서 그는 무장 괴한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7] 사건 직후 세르비아 당국은 용의자 3명을 체포했고,[18] 장례식은 베오그라드 신묘지에서 거행되었다.[19][20] 유력 언론은 배후에 조직범죄 갈등·정치적 요인이 혼재했을 가능성을 보도했다.[21]
재판 경과(공범·피의자)
직접 범행을 저지른 도브로사브 가브리치 등은 2006년 파기환송심에서 공동살인으로 최종 징역 30년을 선고받았다. 가브리치는 이후 보스니아 여권을 위조 취득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도피했으나, 2011년 케이프타운에서 신원이 드러나 구금되었고, 2020년대까지 본국 송환을 다투었다.[22]
평가
정치학·사회학 연구는 라즈나토비치와 그의 조직을 “전쟁과 범죄의 접합부에서 작동한 대표적 사례”로 분석한다. 그는 체제 후원과 사적 이익을 결합해 준군사조직·정치·범죄 시장을 가로지르는 영향력을 행사했으며,[8][9] 전쟁범죄의 집단적 책임성과 국내 사법처리의 지체가 지속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3][13]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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