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를 가리키는 낱말인데, 뜻에 따라 지혜(智慧)로 번역하고, 간단히 지(智) 또는 혜(慧)라고도 한다.[1] 반야는 제법의 실상, 즉, 모든 유위법의 실제, 즉, 우주 만물의 본성이 괴로움(변하고 무너지는 것) · 무상(일시적인 것) · 무아(실체 없는 것) 즉 공(비어 있는 것, 인연따라 생기는 것)임을 아는 것 또는 보는 것[照見五蘊皆空 = 正見]으로, 나아가 이러한 앎과 봄의 극치[究竟覺 = 正見]에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열반을 증득함과 동시에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 = 正見)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반야란 곧 정견이다. 요약하자면, 반야 즉 정견은 길이자 목표이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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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즉 반야는 그 기초 또는 출발이 인과 즉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 즉 연기법[4][5]을 아는 것 또는 믿는 것에 있다.[6][7][8][9] 즉, 인과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사견(邪見)이 없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다. 달리 말해, 8정도의 정견의 시작이다.[10][11] 인과 · 연기법이라고 할 때 불교에서는 특히 고집멸도의 4성제와 무명에서 노사까지의 12연기를 가리킨다. 4성제는 괴로움(고)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번뇌(집)이고 괴로움의 소멸 즉 참된 행복 즉 열반(멸)을 증득하게 하는 원인이 성도(聖道) 즉 8정도(도)라고 천명한다. 12연기는 무명 즉 무지라는 번뇌가 5취온의 삶 즉 윤회를 일으키는 궁극의 원인이며, 무지의 소멸 즉 지혜 즉 반야가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궁극의 원인이라고 천명한다. 반야는 선한 업 즉 유익한 업을 쌓아 현세와 미래에 마음에 드는 좋은 결과 즉 기뻐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는 뿌리 또는 원인인 무탐 · 무진 · 무치의 3선근 중 무치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견을 완전히 갖추는 것, 연기법을 완전히 아는 것, 인과를 완전히 아는 것이 반야의 완성이다. 즉 완전한 깨달음이다.[12][13]
완전한 깨달음 즉 열반의 증득과 관련하여, 충분한 수행력이 쌓였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좌선삼매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4][15]
- 마땅히 열반이라는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한다. 정진의 힘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 4념처 중 법념처에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알아 열반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 괴로움은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즉,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처럼 제법을 관[照]하여 그 모두의 실상이 괴로움 즉 무상 즉 실체 없음 즉 공임을 정견[見]함으로써[照見五蘊皆空], 번뇌가 적멸하여 열반으로 들어가고, 그럼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남김없이 사라진다[度一切苦厄]고 말하고 있다. 정진 · 선정 · 반야바라밀에 의해 열반이 증득된다고 말하고 있다. 반야란 선정에 든 상태에서 제법의 실상이 고 · 무상 · 무아 즉 공임을 아는 것 또는 관하는 것, 즉, 연기를 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무지를 비롯한 내부의 번뇌가 소멸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증득되는 열반의 무분별지라고 말하고 있다.
반야 즉 정견은 길이자 목표이다.[16][17] 인과를 믿는 것에서 출발하여 중도 연기를 보는 것이다. 선법(유익한 법)과 불선법(해로운 법)을 분별하고 식별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지켜나가는 진여의 분별지[依言眞如]에서 시작하여 중도 연기에 대한 깨달음의 극치인 진여의 무분별지[離言眞如]에 이르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혹은 팔리어 빤냐를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고 음역인 '반야'를 사용한 것은 불경의 한역(漢譯) 시 적용했던 원칙인 5종불번(五種不翻: 5가지 번역하지 않는 원칙) 가운데 존중불번(尊重不翻)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반야를 지혜라 번역하면 그 본래의 뜻은 깊고 심대하나 번역함으로 인해 그 뜻이 얕아지고 가벼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 논서들에서는 흔히 반야를 혜(慧)로 번역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반야(般若) 즉 혜(慧, prajñā, paññā)는 택법(擇法) 즉 간택(簡擇: 정확히 식별하여 판단함) · 판단작용 · 판단력 또는 식별력으로,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의 대지법(大地法: 마음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항상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에 속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혜(慧)는 부파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택법 즉 간택 · 판단작용 · 판단력 또는 식별력이지만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의 별경심소(別境心所: 특정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에 속한다. 상좌부 불교의 교학에서는 8정도를 크게 계(戒) · 정(定) · 혜(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를 혜로 분류한다.[34][35] 이와 관련하여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구사론》 등에 따르면, 지(智) · 견(見) · 명(明) · 각(覺) · 해(解) · 혜(慧) · 광(光) · 관(觀)을 통칭하여 혜의 8가지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과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혜(慧)라는 명칭의 법은 있어도 지(智) · 견(見) · 명(明) · 각(覺) · 해(解) · 광(光) · 관(觀)이라는 명칭의 법은 없는데, 이들의 본질[自性, 自相]이 모두 혜(慧)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성자의 지혜, 즉 출세간의 지혜, 즉 번뇌를 단멸하는 힘을 가진 무루혜 또는 무루지를 크게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의 2가지로 구분한다. 법지는 욕계에 대해 4성제를 체득함으로써 증득되는 무루지이고, 유지는 색계와 무색계에 대해 4성제를 체득함으로써 증득되는 무루지이다. 또한, 무루지 즉 '법지와 유지를 합한 전체'를 4성제의 고 · 집 · 멸 · 도의 각각의 측면에서 보아서 각각 고지(苦智) · 집지(集智) · 멸지(滅智) · 도지(道智)라 한다. 그리고 무루지 즉 '법지와 유지를 합한 전체'를 깊이 또는 완전함의 측면에서 보아서 무학위의 아라한이 색계나 무색계의 선정에서 증득하는 무루지를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부처가 증득한, 번뇌장과 소지장을 단멸함으로써 드러나는 진여를 깨친 완전한 지혜 또는 진여의 지혜, 즉 부처의 무분별지(無分別智, 산스크리트어: nirvikalpa-jñāna, 니르비칼파 즈냐나)를 가리켜 반야(般若) 또는 마하반야(摩訶般若, 산스크리트어: mahāprajñā) · 대반야(大般若) · 대지(大智)라고도 하며, 보리(菩提, 산스크리트어: bodhi) · 대보리(大菩提) · 대원경지(大圓鏡智, 산스크리트어: ādarśa-jñāna) 또는 구경각(究竟覺)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가 모든 성자가 선정(禪定)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갖가지 무루혜의 근본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대승불교의 각 종파는 진여의 무분별지에 근거하여 자신의 견해를 세운다. 대승불교의 중관학파에서는 반야 또는 마하반야의 입장에서 현상을 관하여 온갖 번뇌를 벗어나게 하는 방편으로서의 선정(禪定) 수행인 팔불중도(八不中道)의 공관(空觀)만을 세운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를 본질의 입장에서는 근본지(根本智) 또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라 하고 진여를 완전히 깨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증득의 입장에서는 후득지(後得智) 또는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라 하며, 가행(加行: 노력, 방편) 즉 선정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진여의 무분별지의 일부로서의 갖가지 무루혜를 가행지(加行智) 또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라 하며, 가행지는 근본지를 깨쳐 후득지가 드러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대승기신론》등의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 계열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을 본질의 입장에서 본각(本覺)이라 하고, 증득의 입장에서 범부가 최초로 증득하는 무루혜를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하고, 성자가 선정 수행 즉 지관(止觀)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중간의 갖가지 무루혜를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성자가 근본무명을 끊고 진여를 완전히 깨쳐 본각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간략 정보 prajñā의 번역, 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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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지혜, 반야(般若), 혜(慧) 즉 판단작용은 그 범위가 아주 넓고 그 깊이도 차이가 큰데, 크게 대별하면 나쁜 지혜 또는 그릇된 지혜인 악혜(惡慧)와 선한 지혜 또는 바른 지혜인 선혜(善慧)로 나뉜다. 예를 들어, 8정도의 정견(正見)은 선혜에 속하며 그 반대인 부정견(不正見) 또는 사견(邪見)은 악혜에 속한다.
엄격히 말하자면 악혜 즉 그릇된 판단작용도 여전히 판단작용이므로 지혜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지혜, 반야 또는 혜라고 할 때는 선혜만을 뜻한다. 이 경우, 즉 선혜로서의 판단작용 즉 식별력(識別力, 영어: power of discernment, discrimination[52])을 전통적인 불교 용어로는 택법(擇法, 산스크리트어: dharma-pravicaya, 팔리어: dhamma-vicaya, 영어: discrimination of dhammas,[53] discrimination of states[54])이라고 한다. 즉 모든 법(法)을 살펴서 참된 것[眞]과 거짓된 것[僞], 선한 것[善]과 악한 것[不善]을 판별하여,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취하고 거짓된 것과 악한 것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인(忍, 산스크리트어: kṣānti)과 지(智, 산스크리트어: jñāna, 즈냐나)와 견(見, 산스크리트어: dṛṣṭi)은 모두 혜(慧) 즉 택법(擇法)의 일종이다. 이들 중 인(忍)과 지(智)는 거의 반드시 선혜만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되며, 견(見)은 선혜로서의 경우에는 정견이라 하고, 악혜로서의 경우에는 부정견 또는 사견이라 한다.
다시 선혜는 범부의 지혜인 문혜(聞慧) · 사혜(思慧) · 수혜(修慧)의 3가지 유루혜(有漏慧) 즉 3혜(三慧)와 성인의 지혜인 무루혜(無漏慧)로 나뉜다. 유루혜는 세간의 지혜 즉 세속적인 지혜이고 무루혜는 출세간의 지혜이다. 한편, 혜(慧) 즉 판단작용 중에서도 결택 또는 결단의 능력이 있는 것을 가리켜 특히 지(智, 산스크리트어: jñāna, 즈냐나)라고 하는데, 이 때의 결택 또는 결단은 의심 · 무명 등의 번뇌를 끊어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한편, 지(智) · 견(見) · 명(明) · 각(覺) · 해(解) · 혜(慧) · 광(光) · 관(觀)을 통칭하여 혜의 8가지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불교에 따르면, 번뇌를 끊어내는 능력은 오직 무루의 지혜 즉 무루지 또는 무루혜만이 가지고 있으며, 유루혜 즉 세속적인 지혜 즉 문혜(聞慧: 들어서 생겨난 지혜) · 사혜(思慧: 스스로 생각하여 생겨난 지혜) · 수혜(修慧: 수행을 통해 생겨난 지혜)의 3혜는 번뇌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끊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들 3혜는 무루혜를 이끌어내는 또는 증득할 수 있게 하는 방편이 되며, 이 때문에 범부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지혜이다. 특히, 5계(五戒) · 10선(十善)의 계율을 지키면서 출세간을 지향하여 이들 3혜를 닦으면 반드시 어느 날 무루혜가 현전하게 되며 비로소 진정한 성도(聖道: 성인들의 길, 무루의 길, 출세간의 길, 즉 부처의 지위 즉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고, 즉 성인만이 가지는 지혜인 무루혜를 완전히 증득해가는 실제적인 단계인 부파불교의 견도위(見道位) 또는 대승불교의 통달위(通達位)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상좌부 불교에서는 8정도를 크게 계(戒) · 정(定) · 혜(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正見) · 정사유(正思惟)가 혜에 속하며,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이 계에 속하며,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이 정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34][35]
대승불교에서는 성인의 지혜인 무루혜 중에서도 가장 궁극의 지혜로서, 부처가 가진 지혜를 가리켜 흔히 반야(般若)라고도 한다. 이러한 뜻에서의 반야는 모든 사물[事]이나 도리[理]를 명확하게 뚫어보는 깊은 통찰력을 말한다.[1] 이러한 뜻에서의 반야는 일반의 세속적인 지혜 또는 주관과 객관의 상(相)을 떠나지 못한 상태 또는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지혜인 유분별지(有分別智)가 아니며, 아직 부처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다른 성인들이 증득한 여러 무루혜 또는 무분별지보다도 더 뛰어난, 진여를 바르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깨우친 지혜인 부처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무분별지(無分別智)는 주관과 객관의 상(相)을 떠난 평등한 지혜로서, 성인이 가지는 갖가지 무루혜의 근본이 되는 지혜이다.[75]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진여는 언어나 문자로서는 어떻게 묘사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분별심의 상태에서는 진여를 알 수가 없으며, 모든 생각과 분별을 떠난 모양[相] 없는 참된 지혜의 상태에서만 진여를 완전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진여를 전면적으로 깨우친 지혜, 또는, 진여의 완전한 지혜를 부처의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반야를 얻어야만 성불하며 반야를 얻은 이는 곧 부처라고 말한다.[76]
대승불교의 중관학파에서는 단지 반야라는 말로써 부처가 가지는 무분별지를 가리키는데, 이에 비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이 무분별지를 특히 보리(菩提), 대보리(大菩提) 또는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부른다.[77][78]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대원경지는 제8아뢰야식에 대해 전의(轉依: 식(識)이 지(智)로 변형되는 질적 전환)를 득할 때 증득되며, 이와 동시에 제7말나식에 대한 전의(轉依)도 완전히 성취되어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며 대자대비심을 일으키는 무루지인 평등성지(平等性智)도 그 전체가 증득된다. 마찬가지로 이와 동시에 제6의식에 대해 전의가 성취되어 묘관찰지(妙觀察智)가 증득되고, 전5식에 대해 전의가 성취되어 성소작지(成所作智)가 증득된다. 때문에 이들 4가지 지(智)를 불과4지(佛果四智: 성불할 때 증득되는 과보로서의 4가지 지혜)라 하고, 간단히 4지(四智)라고 한다.
초기 불교에서도 제행무상 · 일체개고 · 제법무아를 반야에 의해서 안다고 주장하지만, 반야는 대승불교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반야는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수행하는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의 6바라밀(六派羅蜜) 중 반야 바라밀(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 prajñāpāramitā) 또는 지혜 바라밀로 설법되고 있으며,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 여겨져 중요시되고 있다.[1] 역으로,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직접적인 수단 또는 원인이다.[82]
또한 반야는 "모든 부처(諸佛)의 어머니(즉, 성불의 원인)"라 불리며, 이러한 교의는 많은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이나 논서에서 널리 강조되고 있다.[1][76]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논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육안(肉眼) · 천안(天眼) · 혜안(慧眼) · 법안(法眼) · 불안(佛眼)의 오안(五眼)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 바라밀을 닦아야 한다는 불교 경전의 진술을 인용해 이를 해설하고 있다.[83]
《인왕경》에서 고타마 붓다는 반야 바라밀을 닦는 것이란 복인(伏忍) · 신인(信忍) · 순인(順忍) · 무생인(無生忍) · 적멸인(寂滅忍)의 5인(五忍)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5인은 10신 · 10주 · 10행 · 10회향 · 10지 · 등각 · 묘각의 52위의 보살 수행계위에서 최초의 10신을 제외한 나머지 상위의 42위 즉 42현성(四十二賢聖)을 인(忍) 즉 지혜의 측면에서 다음의 5가지 그룹으로 재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인왕경》에 따르면 반야 바라밀이란 현성(賢聖), 즉 10신의 계위를 벗어난 수행자, 즉 실제로 불교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의 모든 대승불교적 수행과 그 수행의 과보로서 증득된 지혜 등의 모든 공덕을 통칭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살바야해(薩婆若海) 즉 일체지(一切智) 즉 불지(佛智)를 의미한다.
- 복인(伏忍): 10주 · 10행 · 10회향의 3현(三賢)
- 신인(信忍): 10지 가운데 초지 · 제2지 · 제3지
- 순인(順忍): 10지 가운데 제4지 · 제5지 · 제6지
- 무생인(無生忍): 10지 가운데 제7지 · 제8지 · 제9지
- 적멸인(寂滅忍): 10지 가운데 제10지와 등각 · 묘각
불교의 교의에서 반야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반야라고만 하지 않고 흔히 마하반야(摩訶般若) · 대반야(大般若) · 대지(大智) · 대지혜(大智慧)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명칭들은 불교 경전이나 논서의 제목에 흔히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대지도론(大智度論)》 등과 같은 것이 있다. 또한 금강과 같은 수식어를 붙여 금강반야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예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금강경》의 원래 명칭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 있다.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자신이 번역한 《금강경》의 제목을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이라고 하여,[93] 반야, 즉 무분별지혜가 능히 모든 것을 끊어내는[斷滅] 금강(金剛; 다이아몬드)과 같이 근본 무명을 끊어내어[斷滅] 성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유식유가행파에서는 반야 또는 마하반야 대신에 대보리(大菩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주해 1] 유식유가행파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에 따르면, 법공(法空)의 경지에 다다르면 법집(法執)인 소지장(所知障)이 소멸되어 대보리(大菩提: 대지혜 · 완전한 깨달음)가 성취되고 그러면 부처가 된다.[77][78]
한편, 《열반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의 다른 이름으로는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금강삼매(金剛三昧), 사자후삼매(獅子吼三昧),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선남자여,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하나는 수릉엄삼매요, 둘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요 셋은 금강삼매(金剛三昧)요 넷은 사자후삼매(獅子吼三昧)요 다섯은 불성(佛性)이다. 그 짓는 대로 따라서 곳곳 마다 이름을 얻느니라. 《열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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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어) 안혜 조, 지바하라 한역 (T.1613). 《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13, CBETA.
- (중국어)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T.1585). 《성유식론(成唯識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585, CBETA.
성불에 이르게 하는 지혜, 또는, 성불에 이르렀을 때 성취하는 지혜를 지칭함에 있어, 유식유가행파에서 반야 또는 마하반야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보리 또는 대보리라는 낱말을 사용한 이유는 유식유가행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2대조류를 이루고 있었던 중관파에서 반야 또는 마하반야라는 낱말을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세친 조, 현장 한역(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제25권.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T29n1558_p0132c29║八中正見是道亦道支。餘是道支而非道。
T29n1558_p0133a01║七中擇法是覺亦覺支。餘是覺支而非覺。毘
T29n1558_p0133a02║婆沙師所說如是。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제25권:
그리고 8도지 중의 정견은 바로 도(道)이자 역시 도지(道支)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도지일 뿐 도는 아니다. 또한 7각지 중 택법은 바로 각(覺)이자 역시 각지(覺支)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각지일 뿐 각은 아니다.81)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은 이상과 같다.
81) 즉 8성도지 중 정견은 바로 견도인 동시에 견도위에서 닦는 8성도지 한 갈래[支]이며, 7각지 중 택법은 깨달음인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는 한 갈래이다.
안혜 조, 지바하라 한역(T.1585). 《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13, CBETA:
T31n1613_p0853a06║云何邪見。謂謗因果。或謗作用。或壞善事。染
T31n1613_p0853a07║慧為性。謗因者。因謂業煩惱性。合有五支。煩
T31n1613_p0853a08║惱有三種。謂無明愛取。業有二種謂行及有。
T31n1613_p0853a09║有者。謂依阿賴耶識諸業種子此亦名業。如
T31n1613_p0853a10║世尊說。阿難。若業能與未來果彼亦名有。如
T31n1613_p0853a11║是等。此謗名為謗因。謗果者。果有七支。謂識
T31n1613_p0853a12║名色六處觸受生老死。此謗為謗果。或復謗
T31n1613_p0853a13║無善行惡行。名為謗因。謗無善行惡行果報。
T31n1613_p0853a14║名為謗果。謗無此世他世。無父無母。無化生
T31n1613_p0853a15║眾生。此謗為謗作用。謂從此世往他世作用。
T31n1613_p0853a16║種子任持作用。結生相續作用等。謗無世間
T31n1613_p0853a17║阿羅漢等。為壞善事。斷善根為業。不善根堅
T31n1613_p0853a18║固所依為業。又生不善。不生善為業。
T31n1613_p0853a19║云何見取。謂於三見。及所依蘊。隨計為最為
T31n1613_p0853a20║上為勝為極。染慧為性。三見者。謂薩迦耶。
T31n1613_p0853a21║邊執。邪見。所依蘊者。即彼諸見所依之蘊。業
T31n1613_p0853a22║如邪見說。
안혜 지음, 지바하라 한역, 조환기 번역(K.619, T.1613). 《대승광오온론》:
무엇을 사견이라고 하는가? 인과를 비방하고, 혹은 작용(作用)을 비방하고, 흑은 선한 일을 파괴하는 오염된 지혜를 성질로 한다. 인(因)을 비방한다란 무슨 뜻인가? 인온 업의 번뇌성을 말한다. 합해서 다섯 가지가 있다. 번뇌에는 무명ㆍ애(愛)ㆍ취(取)의 세 가지가 있다. 업에는 행(行) 및 유(有)의 두 가지가 있다. 유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는 모든 업의 종자를 말한다. 이는 또한 업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난아, 만약 업이 능히 미래의 과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또한 유라고도 말한다.……”
이를 비방하는 것을 인을 비방한다고 안다. 과보를 비방한다란 무슨 뜻인가? 과보는 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ㆍ생(生)ㆍ노사(老死)의 일곱 가지가 있다. 이를 비방함이 과보를 비방하는 것이다.
또한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을 비방함이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없다고 비방하는 것은 과보를 비방함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없고,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화생(化生)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없다고 비방한다. 이러한 비방은 작용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왕생하는 작용, 종자를 지니고 있는 작용, 생을 맺어 상속하는 작용 등을 말한다. 세간과 아라한 등이 없다고 비방하는 것은 선한 일을 파괴함이다. 선근을 끊는 것을 행동양식으로 하고, 불선근(不善根)이 견고해지는 것이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또한 불선을 낳고, 선을 낳지 않는 것을 행동양식으로 한다.
Mehm Tin Mon (2015). 《The Essence of Buddha Abhidhamma. Third edition. Mehm Tay Zar Mon, Mya Mon Yadanar Literature. p.42.
The above eight cittas can be translated in the same way as we
have translated the eight lobha-mūla cittas; the only change necessary
is to replace ‘diṭṭhi — wrong view’ with ‘ñāṇa — knowledge’. This knowledge
basically means the knowledge of knowing kamma and kamma-result.
Bhikkhu Bodhi & Allan R. Bomhard (2007).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Charleston Buddhist Fellowship. p.40.
Associated with knowledge (ñāṇasampayutta): Knowledge comprehends things
as they are (yathāsabhāvaṁ). In the consciousness associated with knowledge, the word
ñāṇa refers to the mental factor of wisdom (paññā-cetasika), which represents the root
non-delusion (amoha). Consciousness dissociated from knowledge (ñāṇavippayutta)
lacks this factor of wisdom, but it does not involve ignorance (avijjā) or delusion (moha),
which pertains only to unwholesome consciousness.
세친 조, 현장 한역(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제25권.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T29n1558_p0132c13║信等何
T29n1558_p0132c14║緣次第如是。謂於因果先起信心為果修
T29n1558_p0132c15║因。次起精進由精進故念住所緣。由念
T29n1558_p0132c16║力持心便得定。心得定故能如實知。是故
T29n1558_p0132c17║信等如是次第。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제25권:
‘신’ 등은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해진 것인가? 이를테면 인과에 대해 먼저 신심(信心)을 일으킨 이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원인을 닦아야 하므로 다음으로 정진을 일으킨다. 정진으로 말미암아 염(念)은 소연에 머물게 되고, 염의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바로 선정을 획득하게 되며, 마음이 선정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능히 참답게 아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신’ 등의 순서가 이와 같은 것이다.
용수 조,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a09║ 正見是智慧,如四念處、
T25n1509_p0203a10║ 慧根、慧力、擇法覺中說。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K.549, T.1558). 《대지도론》 제19권:
정견(正見)이 곧 지혜[慧]이다. 이는 4념처와 혜근(慧根)과 혜력(慧力)과 택법각분(擇法覺分)에서 말한 바와 같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K.650, T.99 《잡아합경》 제12권 [제301경 〈가전연경〉(迦旃延經). CBETA.
T02n0099_p0085c17║如是我聞: 一時,佛住那梨聚落深林
T02n0099_p0085c18║中待賓舍。 爾時,尊者[跳-兆+散]陀迦旃延詣佛所,
T02n0099_p0085c19║稽首佛足,退住一面,白佛言:「世尊!如世尊
T02n0099_p0085c20║說正見。云何正見?云何世尊施設正見?」 佛
T02n0099_p0085c21║告[跳-兆+散]陀迦旃延:「世間有二種依,若有、若無,
T02n0099_p0085c22║為取所觸;取所觸故,或依有、或依無。若
T02n0099_p0085c23║無此取者,心境繫著使不取、不住、不計我
T02n0099_p0085c24║苦生而生,苦滅而滅,於彼不疑、不惑,不由
T02n0099_p0085c25║於他而自知,是名正見,是名如來所施設
T02n0099_p0085c26║正見。所以者何?世間集如實正知見,若世間
T02n0099_p0085c27║無者不有,世間滅如實正知見,若世間有
T02n0099_p0085c28║者無有,是名離於二邊說於中道,所謂此
T02n0099_p0085c29║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
T02n0099_p0086a01║純大苦聚集,無明滅故行滅,乃至純大苦聚
T02n0099_p0086a02║滅。」 佛說此經已,尊者[跳-兆+散]陀迦旃延聞佛所
T02n0099_p0086a03║說,不起諸漏,心得解脫,成阿羅漢。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K.650, T.99 《잡아합경》 제12권 [제301경 〈https://kabc.dongguk.edu/m/content/view?itemId=ABC_IT&cate=bookName&depth=3&upPath=I&dataId=ABC_IT_K0650_T_012 가전연경]〉(迦旃延經).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리(那梨)라고 하는 마을 깊은 숲 속에 있는 대빈사(待賓舍)에 계셨다.
그때 존자 산타가전연(跚陁迦旃延)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하며, 어떤 것을 세존께서 시설하신 바른 소견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산타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혹은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혹은 유에 의지하고 혹은 무에 의지한다. 만일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과 경계를 얽어매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아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가 시설한 바른 소견이니라.
왜냐하면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내지)……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산타가전연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23║若行者得法念止,厭世間空老病
T15n0614_p0279a24║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
T15n0614_p0279a25║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
T15n0614_p0279a26║深舍摩陀故(深舍摩陀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
T15n0614_p0279a27║陀,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
T15n0614_p0279a28║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
T15n0614_p0279a29║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
T15n0614_p0279b01║及業出生,此苦是苦。入涅槃時一切滅盡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 등이 아니다.{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이와 같은 갖가지 거짓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세친 조, 현장 한역(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제25권.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T29n1558_p0132c29║八中正見是道亦道支。餘是道支而非道。
T29n1558_p0133a01║七中擇法是覺亦覺支。餘是覺支而非覺。毘
T29n1558_p0133a02║婆沙師所說如是。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제25권:
그리고 8도지 중의 정견은 바로 도(道)이자 역시 도지(道支)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도지일 뿐 도는 아니다. 또한 7각지 중 택법은 바로 각(覺)이자 역시 각지(覺支)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각지일 뿐 각은 아니다.81)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은 이상과 같다.
81) 즉 8성도지 중 정견은 바로 견도인 동시에 견도위에서 닦는 8성도지 한 갈래[支]이며, 7각지 중 택법은 깨달음인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는 한 갈래이다.
Bhikkhu Bodhi. “The Noble Eightfold Path: The Way to the End of Suffering”. Access to Insight. 2013년 2월 4일에 확인함.
"The eight factors of the Noble Eightfold Path are not steps to be followed in sequence, one after another. They can be more aptly described as components rather than as steps, comparable to the intertwining strands of a single cable that requires the contributions of all the strands for maximum strength. With a certain degree of progress all eight factors can be present simultaneously, each supporting the others. However, until that point is reached, some sequence in the unfolding of the path is inevitable. Considered from the standpoint of practical training, the eight path factors divide into three groups: (i) the moral discipline group (silakkhandha), made up of right speech, right action, and right livelihood; (ii) the concentration group (samadhikkhandha), made up of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and (iii) the wisdom group (paññakkhandha), made up of right view and right intention. These three groups represent three stages of training: the training in the higher moral discipline, the training in the higher consciousness, and the training in the higher wisdom."
"식별력", 《네이버 영어사전》. 2013년 2월 4일에 확인.
"식별력 識別力: power of discernment, discrimination"
Gethin (1992), pp. 146 ff. In regards to his leaving dhamma untranslated, Gethin summarizes (p. 151):
- The point I wish to make, however, is that the usage of the word dhamma (in the plural) remains in the Nikāyas, canonical Abhidhamma, and even to some extent in the commentarial tradition, a somewhat ambiguous and multivalent term. Its precise understanding continues to be elusive and defies rigid or fixed definition. Possibly this is no accident and the texts delight in the very fluidity of the term.
In the context of dhamma-vicaya, Gethin puts forth the idea (p. 152, also see p. 154):
- In Buddhist thought to take dhamma apart is, I think, to be left with dhammas. Dhamma-vicaya means, then, either the 'discrimination of dhammas' or the 'discernment of dhamma'; to discriminate dhammas is precisely to discern dhamma.
In a related footnote (p. 152, n. 38), Gethin expresses doubt about translating vicaya as "investigation."
Bodhi (2000), SN 46 passim, pp. 1567 ff.
세계사상 > 사 상 용 어 > 동양사상 관계 > 불교 관계 > 바라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바라밀:
波羅蜜 범어 파라미타의 음을 딴 말로 도피안(到波岸)·도(度) 등으로 번역한다. 미망과 생사의 차안에서 해탈, 열반의 피안에 이르는 것. 또한 그 때문에 보살이 수(修)하는 행(行)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야경전>에서 설법하는 6바라밀(六波羅蜜), 즉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을 말하며, 마지막의 지혜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하여 다른 다섯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6바라밀에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넷을 더한 10바라밀이나 그와는 별도로 4바라밀 등도 설법되고 있다."
호법 등. 〈성유식론(成唯識論)〉. 현장 한역. 《대정신수대장경》. 제1권. T31, No. 1585, CBETA, T31n1585_p0001a09(12) - T31n1585_p0001a12(10). 2011년 5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4월 3일에 확인함.
"원문: 今造此論為於二空有迷謬者生正解故。生解為斷二重障故。由我法執二障具生。若證二空彼障隨斷。斷障為得二勝果故。由斷續生煩惱障故證真解脫。由斷礙解所知障故得大菩提。
편집자 번역: 지금 이 논서를 저술하는 이유는 이공(二空: 두 가지 공)에 대해서 미혹하고 오류가 있는 사람들이 이공(二空)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공(二空)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 무거운 장애(二重障: 번뇌장과 소지장)를 끊기 위한 때문이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두 가지) 집착으로 인해 이 두 가지 장애가 함께 일어난다. 이공(二空)을 증득하게 되면 그에 따라 이들 (두 가지) 장애도 끊어진다. (이들 두 가지) 장애를 끊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 뛰어난 과보(二勝果: 열반과 보리, 또는 해탈과 보리)를 얻기 위한 때문이다. (이것을 더 자세히 말하자면) 윤회하는 삶(生)을 계속되게 만드는 원인인 번뇌장(煩惱障)을 끊음으로써 참다운 해탈(眞解脫: 유식학에서 해탈은 열반과 같은 것이다)을 증득하게 되기 때문이며, 지혜(解: 앎 · 이해 · 지식)를 장애하는 소지장(所知障)을 끊음으로써 대보리(大菩提: 큰 깨달음 · 완전한 깨달음 · 출세간의 무분별지혜 · 무상정등보리 ·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법(護法) 등. 현장(玄奘) 한역, 김묘주 번역, 편집.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권,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동국역경원. 2쪽.
"번역자 김묘주 주석: 아공의 도리를 깨쳐서 번뇌장을 끊으면 해탈, 즉 열반을 증득한다. 법공의 도리를 깨쳐서 소지장을 끊으면 곧 큰 깨달음[大菩提]을 성취해서 붓다가 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대정신수대장경》. 제33권. Vol. 25, No. 1509, CBETA, T25n1509_p0305c17(00) - T25n1509_p0305c19(01). 2010년 6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4월 4일에 확인함.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欲得五眼者,當學般若波羅蜜!」 【論】 何等五?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