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이슬람 국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무굴 제국(페르시아어: امپراتوری مغول 샤하네 모굴, 우르두어: مغلیہ سلطنت 무갈 바드샤, 힌디어: मुग़ल सलतनत)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330년 동안 존속했던 몽골-튀르크계 왕조로, 전성기에는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국가이다.
무굴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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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مپراتوری مغو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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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라호르 델리 아그라 카불 | |||
정치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바드샤 1526년 ~ 1530년 1556년 ~ 1605년 1628년 ~ 1658년 1658년 ~ 1707년 1837년 ~ 1858년 | 바부르(초대) 악바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바하두르 샤 2세(말대) | |||
왕조 | 티무르 왕조 | |||
역사 | ||||
• 성립 | 1526년 4월 21일 | |||
• 멸망 | 1857년 9월 21일 | |||
지리 | ||||
면적 | 4,000,000 km2 | |||
인문 | ||||
공용어 |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 |||
공통어 | 힌두스탄어 | |||
민족 | 무굴인 튀르크인 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 |||
인구 | ||||
1700년 어림 | 150,000,000명 | |||
경제 | ||||
통화 | 루피 | |||
종교 | ||||
국교 | 하나피파 이슬람교 | |||
기타 종교 |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
무굴 제국은 1526년 티무르 왕조의 일원이었던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바부르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 전투을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강력하게 저항하던 아프가니스탄계 세력들을 물리치고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갔다. 그 사이 북인도에서는 후마윤을 물리친 셰르 샤 수리가 수르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6~18년 만을 유지한 채 사파비 제국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 데칸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아 제국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악바르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무굴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고자 인두세(지즈야)를 폐지하는 등 융화책을 취했다. 종교적 융화책은 4대 황제 자항기르와 5대 황제 샤 자한 시대까지 이어지지만, 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다시 인두세를 부활시키고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아우랑제브가 전개하는 정복 사업은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세금 액수의 증가로 이어져 농민들과 소영주들의 불만을 증가시켰다. 때문에 아우랑제브 생전부터 제국에 반발하는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브 사후, 반란 세력 중 가장 강대했던 마라타 제국이 데칸 고원 일대에서 발흥했고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인도 중북부 대부분을 휩쓸었다. 북인도의 라지푸트족과 시크교도들은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무굴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결국 18세기 초부터 무굴 제국은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와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제국의 침략을 받으며 더욱 약화된 무굴 제국은, 18세기 말에는 델리 근교만을 통치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한편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진출이 시작되었는데, 다른 열강들을 꺾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무굴-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19세기 무렵이 되면 인도 반도 대부분의 토후국과 왕국들이 영국에게 복속되었다. 무굴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전 인도의 황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영국은 인도의 직접 통치를 선언했고, 마지막 무굴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킨 후 미얀마로 유배보냈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무굴 제국은 군사적인 정복과 전쟁을 통해 탄생하고 유지되었지만 피지배층이었던 토착 인도인들과 소수민족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행정 제도와 다양한 통치 수단 등을 통해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주고 여러 관직들에 등용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표준화된 통치를 이끌었다. 무굴 제국 정책들의 기반은 3대 황제 악바르가 제정한 농업 세금이었는데, 이는 농민 경작자들이 생산하는 양의 절반을 훨씬 넘는 금액이 국가 주도의 잘 규제된 은화로 지불된 것이었다.
정치학자 J.C. 샤르만은 무굴 제국을 인구(Population), 부(Wealth), 군사력(Military) 등의 측면에서 동시대의 유럽 국가들을 왜소하게 만든 아시아의 강대국이라고 설명한다. 17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무굴 제국에 의해 유지된 평화는 인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의 한 요인이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인도양에서 유럽인들의 입지가 급성장하고, 인도산 원자재 및 제품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무굴 제국은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무굴 제국의 지배층들은 회화, 문학, 직물업, 건축 등의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계속했고, 그 결과 무굴 제국의 정복과 함께 유입된 티무르 제국의 튀르크-페르시아 문화와 인도에서 발전하던 힌두 문화의 혼합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훌륭한 예술품과 건축물들이 탄생했다. 특히 무굴 제국 4대 황제인 샤 자한 시기에 무굴 제국의 문화는 절정에 달했다. 무굴 제국 시대에 지어지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작품들이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그라 요새, 파테푸르 시크리, 붉은 요새, 후마윤의 무덤, 라호르 요새, 샬라마 정원, 그리고 "인도 이슬람 예술의 보석이자 세계 유산들 가운데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걸작 중 하나"인 타지마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