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대한민국의 법조 출신 정치인, 중앙일보 창간주 (1917–1986)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 또는 창씨개명 토쿠야마 신이치(德山 進一)는 일제강점기[1]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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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정보 홍진기洪璡基, 임기 ...
홍진기 洪璡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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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9대 내무부 장관 | |
임기 | 1960년 3월 23일 ~ 1960년 4월 24일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장면 |
차관 | 이동환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17년 3월 13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 |
사망일 | 1986년 7월 13일(1986-07-13)(69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대저택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학 학사 |
경력 | 제7대 법무부 차관 제9대 법무부 장관 |
배우자 | 김윤남 |
자녀 | 홍라희(장녀) 홍석현(장남) |
친인척 | 홍정도(친손) 이병철(사돈) |
상훈 | 대한민국 국민훈장 훈2등 모란장(大韓民國 國民勳章 勲二等 牡丹章) 대한민국 국민훈장 훈3등 동백장(大韓民國 國民勳章 勲三等 冬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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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는 유민(維民)[2] 배우자(부인)는 김윤남(일제 귀족 김신석 중추원 참의의 딸)이다.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 파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훗날 경성부에서 성장한 그는 당시 천재라 불리었으며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이 일본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인 차별 정책에 의해 그의 꿈인 교수가 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법을 공부하고, 조선 양곡수탈 및 제국주의 일본으로의 공출 하던 본거지인 목포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 홍진기는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진행되던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약이 한국에 불리하다고 파악하여 정부를 설득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하였다.[3] 이는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보타 망언 사건에서도 한국 측 대표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여 미일조약에 한국 내에 있는 귀속 재산의 처리와 일본에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한 인권 등에 대해 명시될 수 있도록 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소유권이 미일간 협약에서 일본 측으로 귀속되는 상황이 오자 이에 대한 국제법 논리로 대처하였으며 이후 독도에 접안시설과 태극기 계양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