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록터 앤드 갬블
미국의 다국적 생활건강 기업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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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프록터 앤드 갬블 컴퍼니(영어: The Procter & Gamble Company)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비누, 샴푸, 칫솔, 기저귀 등 다양한 종류의 소비재를 제조 판매한다. 줄여서 P&G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지사는 1989년에 서통과 합작진출하다가 1993년에 설립된 한국P&G이다. 한국에서는 페브리즈, 다우니 라인업 이외에는 전반적으로 부진하여 IMF 사태 이후 쌍용제지를 인수하여 떠안아갔지만 결국 구제불능이 되어 2005년, 2007년에 각각 분할 매각하였다.
형태 | 주식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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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 1837년 10월 31일 |
창립자 | 윌리엄 프록터 제임스 갬블 |
시장 정보 | NYSE: PG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 |
ISIN | US7427181091 |
산업 분야 | 소비재 |
본사 소재지 |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
사업 지역 | 전 세계 (북한, 쿠바 제외) |
핵심 인물 | 데이빗 S. 테일러 (CEO) |
제품 | 생활 용품 |
매출액 | US $ 709억 5천만 (2020) |
영업이익 | US $ 163억 9천만 (2020) |
US $ 130억 3천만 (2020) | |
자산총액 | US $ 1207억 (2020) |
종업원 수 | 99,000명 (2020) |
자회사 | Procter & Gamble Australia Pty Ltd |
자본금 | US $ 468억 8천만 (2020) |
웹사이트 | 공식 사이트 |
회사의 창업자는 윌리엄 프록터(William Procter)와 제임스 갬블(James Gamble)이다. 프록터는 양초 제조업자였고, 제임스 갬블은 비누 제조업자였다. 1837년 프록터 앤드 갬블이라는 회사를 창업하였다. 각각 영국, 아일랜드 이민자이며, 동서지간이었다.[1]
사실,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데에는 비슷한 재료가 쓰인다. 그 까닭에 1837년 미국 대공황 시기에 접어들면서 그 둘의 불화가 심해졌다. 그들의 장인이었던 알렉산더 노리스(Alexander Norris)가 사위 둘을 불러 모아 놓고서는 서로 동업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1837년 10월 31일 그들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그들은 프록터 & 갬블(Procter & Gamble)이라는 회사를 창립하였다.
19세기 들어서, 회사는 번창하였다. 1859년 매출액은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 시기, 프록터 & 갬블은 대략 8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P&G는 남북 전쟁 시기, 남부 연합군에 비누와 양초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냈다. 군수 물자를 조달함으로써, 전쟁 중 회사의 순이익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병사들로 하여금 P&G의 제품을 쓰게 할 수 있었다. 전쟁 후,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P&G의 제품을 구매하여 사용하였다.
1880년대, 프록터 & 갬블은 신상품을 내놓았다. 비누인데, 가벼워서 물 위에 떴다.[2] 회사는 이 제품을 아이보리(Ivory)라고 이름지었다.[2] 이후 수십 년간 계속, 회사는 성장을 거듭하였다. 19세기말에는, 회사의 진보적인 업무 환경을 가지고 유명세를 탔다. 윌리엄 프록터의 손자인 윌리엄 아넷 프록터(Willaim Arnett Procter)는 1887년 회사의 노동자들을 위해 이익 배분(Profit sharing, PS) 제도를 만들었다. 윌리엄 아넷 프록터는 종업원들에게도 회사의 결실을 나누어 줌으로써, 종업원들의 파업을 좀 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점차, 회사는 양초보다는 비누에 좀 더 집중해나갔다. 1890년대에는 약 30 여 종의 비누를 제조하였다. 대부분의 가정에 전기가 들어가게 되자, 양초를 쓸 일이 점차 없어졌다. 창업 때부터 만들어 오던 양초는 생산량이 점점 줄어갔다. 결국, P&G는 1920년에 양초 제조를 중지하였다.
20세기 초, 프록터 & 갬블은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P&G는 해외에도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신시내티에 있는 공장들만 가지고는 생산량이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경영진들은 생산하는 제품을 다양화하였다. 1911년에는 동물성 기름이 아닌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쇼트닝인 크리스코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2] 1900년대 초반, 프록터 & 갬블 회사 내 연구소들이 유명했었는데, 여기서 연구원들은 신상품들을 연구/개발해나갔다. 회사 경영진들은 또한 시장 조사라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시장 조사를 통해서 소비자들의 필요(need)와 제품의 매력(product appeal)을 연구하였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라디오가 유행하였다. 이에 회사는 꽤 많은 수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협찬하였다. 그 결과 이러한 종류의 라디오 쇼에는 "솝 오페라"(soap opera, 비누 오페라)라는 별명이 붙었다.[3]
1979년에는 '릴레이'(Rely)라는 이름의 탐폰을 출시했다. 이 탐폰 샘플을 대량으로 배포하여 단기간에 시장점유율 24%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0년, '릴레이' 탐폰에 있던 화학섬유 물질이 그 제품을 쓴 여성들의 몸에 들어가 미국에서 36명의 여성이 독성쇼크증후군에 걸려 사망하였고 이에 프록터&갬블은 탐폰을 출시한 지 1년도 안 돼 시장에서 철수하였다.[4]
1983년에는 흡수력이 뛰어난 생리대 '올웨이즈'(Always)를 출시하였다. 후에 생리대 패드 중심에서 양쪽으로 보호대가 뻗어 나와 속옷 둘레에 접혀져 안쪽으로 고정되도록 한 올웨이즈 제품을 만들었으며 당시 그 보호대는 '날개'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그리고 1986년, 프록터&갬블은 날개 달린 생리대 올웨이즈를 출시하여 캐나다,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 등의 시장에서 1위를 하였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위스퍼'라는 브랜드명으로 출시되었다. 1989년에는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프록터 앤드 갬블에는 "뉴욕 타임즈 룰(New York Times Rule)"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오늘 한 일이 내일 아침 뉴욕 타임즈 1면에 나오더라도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지침이다. 이 예로, 프록터 앤드 갬블은 서부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서 통관 시 돈을 요구하는 세관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지 않고 대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공장운영을 4개월 중단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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