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81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동프랑크의 왕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라틴어: Ludovicus I Pius, 독일어: Ludwig der Fromme, 프랑스어: Louis le Pieux, 이탈리아어: Luigi il Pio, 778년 4월 16일 – 840년 8월 28일)는 81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동프랑크의 왕이다. 본래 게르만어식 이름이 "클로도비크"였지만 그의 생전 라틴어로 이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되어 "클로도비쿠스"가 아닌 "흘로도비쿠스(또는 루도비쿠스)"가 되었고, 이것이 독일어의 루트비히, 이탈리아의 로도비코, 프랑스어의 루이 라는 새로운 이름이 만들어지는 어원이 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Ludovicus I Pi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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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바라크의 독일 황제록의 루도비쿠스 피우스. | |
로마인의 황제 | |
재위 | 813년-840년 |
대관식 | 816년 10월 5일 |
전임 |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
공동재위자 |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813년–814년) |
후임 | 로타리우스 1세 |
프랑크인의 왕 | |
재위 | 814년-840년 |
대관식 | 813년 9월 13일 |
전임 |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
후임 | 로타리우스 1세 (중프랑크) 카롤루스 2세 칼부스 (서프랑크)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동프랑크) 아키텐의 피피누스 2세 (아키텐) |
아키텐 국왕 | |
재위 | 781년-814년 |
전임 |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프랑크인의 왕으로서) |
후임 | 피피누스 1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778년 4월 16일 |
출생지 | 프랑크 왕국 카시노길룸 |
사망일 | 840년 6월 20일 |
사망지 | 프랑크 왕국 잉겔하임 |
왕조 | 카롤루스조 |
부친 |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
모친 | 히스파비나의 힐데가르트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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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
기타 친인척 | 손자 아키텐의 피피누스 2세, 외손자 베렝가리오 1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묘소 | 메츠 장크트 아르눌프 수도원 |
능묘 |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파괴되었음 |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여섯째 아들로 781년 4월 15일 로마 교황의 축성을 받은 뒤, 바이에른과 아키텐의 왕에 봉해졌다. 쌍둥이 형제 로타르 및 다섯 명의 형이 모두 요절하여, 카롤루스의 살아남은 유일한 적자 자격으로 프랑크 왕국 전체의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단독으로 계승했다. 806년 아버지는 프랑크족의 관습대로 제국을 분할하려고 하였는데, 다른 아들들이 연이어 죽자 813년 9월 살아남은 유일한 적자 루도비쿠스를 공동 황제이자 유일한 후계자로 삼는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814년 1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 직후 영지 분봉 문제로 재위 기간 내내 혼란을 야기하였다.
즉위식 직후 첫 10년은 비극과 대내외적 망신으로 첨철되었다. 817년에 발표한 제국 칙령으로 영토 분할을 사전에 계획했지만, 로타르 1세의 신하가 되는 것에 반발한 조카 베른하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는 화해하는 척하고 조카 베른하르트를 불러들인 뒤 장님으로 만들었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베른하르트는 사망하는데, 루트비히는 조카의 죽음에 심한 죄책감을 느껴 공개 참회를 하기도 했다. 이로서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823년에는 계비 바이에른의 유디트에게서 대머리 카를 2세가 태어나자 다른 아들들의 영토를 조금씩 쪼개어 알레만니아를 만들고 카를의 몫으로 떼어주었다. 이때부터 아들 로타르 1세, 피핀, 루트비히 독일인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베른하르트의 후손들은 그에게 눈이 뽑혀 죽임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대머리 카를 2세의 후손들을 대대손손 괴롭히게 된다.
상속 문제로 아들인 로타르 1세, 피핀, 루트비히 독일인 등에 의해 830년, 831년, 833년, 834년 권좌에서 축출당했으나 기적적으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도 루트비히 독일인 등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격퇴하였다. 그는 로타르 1세에게 왕국 전체를 넘기고 다른 아들들은 변방 지역의 분봉왕이나 공작 직책을 임명하려 했지만, 아들들의 잇단 쿠테타로 실패하고 만다.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수도원을 후원하였고, 성당과 수도원에 면세 혜택을 부여했으며 성직자를 국가의 요직에 기용하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일생동안 교리를 철저히 지켰고 여색을 멀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력하였다.